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409)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409화
예찬은 정찬양의 손을 쳐 내는 대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닿아 있던 손가락이 떨어졌지만, 정찬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없이 예찬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찬양이었다.
정찬양은 더 이상 예찬과 어떤 종류의 힘겨루기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렇게 병실에 누워 있는 걸 대체 언제 본 거냐고 물었지? 말해도 너는 모를 거야.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할 거야.”
정찬양은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지지부진하게 돌고 도는 대화에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기운 없이 늘어진 몸과 달리 예찬을 바라보는 눈만은 또렷했기에 예찬은 조용히 헛소리 그만하라고 타박했다.
“일단 말을 해.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아, 그래.”
느리게 눈을 깜빡거린 정찬양이 말했다.
“지금부터 3년 후, LEE 엔터가 망했다는 기사가 뜬 날.”
예찬의 입이 벌어졌다.
정찬양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네가 처음으로 리셋을 한 날.”
“…….”
“그날 봤어.”
“……그날이라고?”
예찬의 되물음에 정찬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예찬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찬은 제 나이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겪었다. 그만큼 시간의 흐름에 마모돼 흐릿해진 기억 또한 남들보다 많았지만, 어떤 강렬한 순간들은 마치 조각칼로 새긴 것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처음 리셋창과 조우한 그날의 기억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럼에도 예찬은 곧장 정찬양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찬찬히 그날의 기억을 순서대로 짚었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서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가볍게 세안과 양치질을 마친 다음 박마루와 시시껄렁한 통화를 하느라 프라이팬에 올려놓은 달걀흰자가 타 버렸다.
그 후 옷을 갈아입고 막 회사에 가려는 차에 이희샘에게 회사가 망했다는 연락을 받아 뉴스를 확인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까지 달려갔었다.
회사에 도착한 뒤엔 빨간색 딱지로 뒤덮인 사무실을 보고 호흡이 가빠졌고, 흐릿해진 시야 위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다시 도전해 보겠습니까?>―RESET―
A&D Corp.
리셋창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벌써 한참 전이지만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눈앞에 떠오른 리셋 버튼을 눌렀고, 시간이 되돌아갔다.
그날은 그게 전부였다.
병원도, 침대도, 그리고 누워 있는 정찬양도.
어디에도 끼어들 곳이 없는 완벽한 기억임을 확신한 예찬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난 병원에 간 적이 없어.”
“그래. 네 기억은 사무실에서 리셋 버튼을 누르는 걸로 끝났을 테니까.”
“…….”
알만하다는 듯 정찬양이 대답했지만, 예찬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찬양은 아주 오랜 시간 예찬의 그림자에 달라붙어 예찬이 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보다 모조리 베껴 간 모방범이 아니던가.
막연히 정찬양이 자신에게 붙은 것이 처음 리셋을 했던 순간부터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들러붙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정찬양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 찾아오고야 말았다.
“네 기억이 잘못됐다면 어떻게 할래?”
예찬은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려던 손을 틀어 마른세수를 했다.
예찬이 시선을 피하고 있는 사이에도 정찬양은 예찬의 눈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찬양이 보고 있는 것은 예찬의 눈이 아니었다. 어느새 완전히 형형한 빛깔을 띤 갈색 눈동자는 예찬의 눈, 그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샅샅이 탐색하고 있었다. 예찬이 모르는 무언가를.
‘……기억이, 잘못되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엔 걸리는 점들이 있었다.
이번 리셋을 시작하기 전까진 분명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예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지자 정찬양은 다시금 건조한 입술을 달싹였다.
“리셋창을 눌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리고 넌 전화를 한 통 받았지.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야.”
“…….”
“교통사고가 났다는 연락이었어. 차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보조석에 타 있던 사람은 숨이 붙어 있었지.”
정찬양은 그저 보고라도 하듯 고저 없이 말을 이어갔는데,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예찬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기억에 전혀 없는 이야기들이다.
“넌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왔고, 침대에 누워 있는 보조석에 있던……, 여기까지 말해 놓고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도 웃기네. 그래,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았지.”
분명 기억에 전혀 없는 이야기들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요동치는 지 알 수 없었다.
때때로 느끼던 기시감들이 여느 때보다 강렬하게 예찬의 온몸을 찔러댔다.
“우욱……!”
예찬은 밀어닥친 토기를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입을 가렸다.
안쪽에서 불쾌하게 울렁이는 것들을 전부 토해 버리면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뜨거운 날숨뿐이었다.
“네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야. 진짜 처음으로 시간이 돌아간 것은.”
어느새 눈을 감은 정찬양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떨리는 팔로 의자를 짚고 다시 일어난 예찬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너, 뭐야?”
바보같이 했던 질문을 반복하는 것.
정찬양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하경이 형, 거기 있지?”
조금 전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 * *
“찬양아!”
“……하경이 형.”
공항 한복판에 서서 나잇값 못하고 불안한 얼굴로 이리저리 돌아보고 있는 찬양의 이름을 부른 것은 하경이었다.
이쪽을 향해 두 손을 흔드는 하경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기 위해 손을 든 찬양은 그제야 제 손에 땀이 배어 나온 것을 깨달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찬양의 캐리어와 배낭을 낚아채듯 뺏어 든 하경은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찬양은 그 뒤를 따라붙으며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어땠어?”
“그냥, 그랬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 벌써 1주일 전.
예찬이 공항까지 따라와 옆에 붙어서 수속을 밟는 것을 전부 지켜봐 주고 헤어진 후, 장장 1주일을 낯선 땅에서 찬양 홀로 지냈다는 뜻이었다. 몇 해 전 팬을 자칭한 스토커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제 뒤를 쫓아오는 찬양이 기특해 죽겠다는 듯 하경이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찬양이 다 컸네! 혼자서 제주도엘 다 다녀오고!”
“조용히 해, 형! 창피하잖아…….”
“장하다, 장해!”
말이 여행이지 예약한 숙소에 콕 박혀서 바다를 구경했을 뿐, 생산적이거나 사교적인 활동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띄워주면 거북할 뿐이다.
찬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경은 연신 웃는 낯으로 주차장까지 걸어갈 뿐이었다.
두 사람이 트렁크에 짐을 넣는 사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등에 떨어진 방울이 꽤나 굵었기에, 찬양은 지금부터 내릴 비가 스치듯 지나가는 소나기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뺨에 묻은 빗방울을 닦으며 하경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벌써 내리기 시작하네. 빨리 타자.”
아니나 다를까 차가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갔을 무렵엔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요새 날씨 진짜 엉망이다. 제주도도 장난 아니었지? 돌아다니기 힘들었겠네.”
“뭐어…….”
동생의 성장을 흐뭇해하는 하경에게 차마 아무 데도 돌아다니지 않고 창가에만 붙어 있었다고 자백할 수 없었던 찬양은 말꼬리를 흐렸다. 찬양의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뉴스 좀 틀게.”
“응.”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묻히는 것은 아쉬웠으나 궂은 날씨에 저를 데리러 공항까지 나와 준 하경이었다. 차내에 흐르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고 있던 찬양은 곧이어 이어진 어떤 연예 기획사의 도산 뉴스에 얼굴을 굳혔다.
운전 중에는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하경 또한 드물게 뉴스 화면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이거 예찬이네 회사 맞지?”
“……어.”
“와, 미치겠네. 찬양아, 예찬이한테 전화 좀 해 볼래?”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하경의 말에 찬양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은 채 급하게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최근 통화 목록에 있는 연락처라곤 하경 아니면 예찬 둘 중 하나였기에 금세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뚜르르, 뚜르르. 기본 연결음이 이어질수록 찬양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예찬이 얼마나 자신의 회사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찬양을 배웅나온 공항에서 드디어 데뷔가 정해졌다며 좋아하던 예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 와, 길었다, 길었어!
– 이번엔 진짜야?
– 어. 일정도 대충 다 나왔는걸? 노래도 이미 나왔고, 같이 작업하게 될 분들도 정해졌고. 살다 보니 진짜 데뷔를 하는구나, 내가.
그 목소리 위로 비명 같은 하경의 외침이 섞여 들었다.
“찬양아!”
끼이익―,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 뒤로 무언가 큰 소리가 연달아 들린 것 같은데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뜨거운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데, 고무 냄새와 화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찬, 양아… 찬양, 아……. 너, 괜찮아……?”
옆자리에서 뻗어 나온 차가운 손가락은 하경의 것이었던가.
현실감 없는 현실보다 공항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던 예찬 쪽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 다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진짜 작년에 희샘이 형이 다 때려치우고 군대나 간다고 했을 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행복해.
– ……그 회사가 아니었다면 훨씬 빨리했을걸.
LEE 엔터에 대한 불만이 머리끝까지 차 있던 찬양의 입에선 축하의 말 대신 빈정거림이 튀어나왔다.
– 또 그 소리! 좀 늦게 하면 어때. 그만큼 준비할 시간이 많았다는 건데 감사해야지.
– …….
– 앨범 나오면 들어 줄 거지?
되지도 않게 툴툴거리는 자신을 달래듯 예찬이 물었을 때, 왜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앨범이 나오기 전에 들려달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네가 데뷔하는 것을, 너만큼이나 나 또한 기다렸다고, 그렇게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딱 한 번만 더 예찬과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안 돼요, 하나님. 찬양이는 안 돼요. 제발, 제발……. 찬양아, 괜찮은 거지? 찬양아…….”
그러나 찬양은 언제나 늦었다. 딱 달라붙은 입술은 예찬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는커녕, 옆에서 애타게 자신을 찾는 하경에게 여기 있다고 대답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눈꺼풀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어릴 때 이후로 교회에 나간 적도 없는데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하경을 따라 찬양 또한 신을 불렀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예찬이가 데뷔하는 모습을 보게 해 주세요.’
기도하며 눈을 감았던 찬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예찬이 아니라 머리부터 운동화까지 빗물로 완전히 축축하게 젖은 예찬이었다.
창백한 뺨을 타고 계속해서 새로이 흐르는 물은 분명 빗물보다 온도가 높겠지. 그것이 찬양이 생에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