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41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414화
하경이 형. 여전히 낯선 이름이었다.
정찬양의 말대로라면 예찬과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난 너와 내가 ‘리셋 아이돌’ 게임을 해서 시간을 돌리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생겼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걸 만든 하경이 형이 이 불가사의한 일과 연관되어 있지 않는 게 더 이상하잖아?”
“……게임을 했다고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이상한 거 같은데.”
하경뿐만 아니라 게임에 대한 것도 전혀 기억에 없는 예찬이 시비를 걸듯 대꾸했으나 정찬양은 개의치 않고 제 할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너를 다시 만난 다음 바로 하경이 형을 찾아봤어. 그랬더니 너와 나 때와는 다르게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고, 그냥 실종되었다고만 나오더라.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회사에 다니는 걸 봤는데.”
“뭐? 봤다고?”
“응.”
덤덤한 정찬양의 대답에 예찬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찬아, 이제 슬슬 가야 할 거 같은데…….”
이어 살짝 열린 문 너머로 고개를 들이민 매니저가 곤란한 얼굴로 예찬과 정찬양의 눈치를 살폈다.
매니저에게서 시선을 뗀 예찬과 정찬양의 시선이 마주쳤고, 먼저 후련한 얼굴로 입을 연 것은 정찬양 쪽이었다.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어쩔 수 없네.”
“…….”
‘여기서 끊는다고?’
예찬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내가 모르는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자리를 펴고 앉고 싶은 기분을 내리눌렀다.
문밖에는 예찬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매니저 외에도 리스피릿을 포함해 LEE 엔터 사람들이 가득하였고, 예찬은 내일도 모레도 무대에 서야 했다.
“……지금 나가요. 넌 이따가, 아니지, 콘서트 끝나고, 아니, 역시 숙소 도착해서……, 후우…….”
뻑뻑한 눈두덩이를 한 손으로 꾹 누르고 나서야 예찬은 자신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횡설수설하는 예찬의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자 옅은 미소를 띤 정찬양이 보였다.
“천천히 해. 네가 내 말을 들어 주겠다고 생각한 이상,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그래. ……연락해.”
정찬양에게 절대로 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이 입 밖으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제가 말하고 제가 놀란 예찬과 달리 정찬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하고 예찬이 병실을 빠져나오자, 복도에 서성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걸렸죠.”
“어우, 아니에요. 찬양이 형이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 건데요, 뭘. 그렇죠?”
예찬의 사과에 김대훈이 황송하다는 듯 양손을 거세게 흔들며 주위에 동의를 구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김대훈처럼 흔쾌히는 아닐지언정 다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시커먼 안색을 하고 있던 박마루가 조심스레 예찬의 옆에 붙어 섰다.
“저기, 예찬 씨. 찬양이는 괜찮아요?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한 거예요?”
“어, 네…….”
정찬양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연이어 이어지는 바람에 얌전히 듣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놈은 몇 시간 전에 쓰러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참이었다.
‘너무 혹사시켰나……?’
당시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정찬양의 파리한 얼굴이 이제야 떠올랐다.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었는지 잠시 돌이켜보던 예찬은 고개를 저었다.
눈치를 살피던 최선이 대화에 슬며시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혹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 왜 때려!”
“그건 좀 아니지, 선아.”
프라이버시 모르냐며 박마루가 최선의 목깃을 잡아 뒤로 끌었다.
조금 전까지 정찬양과 주야장천 떠들던 예찬이 리스피릿이던 시절에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맏형이면서 낯가림이 심해 모르는 사람 앞에선 괜히 발로 땅만 비비적대는 이희샘도, 속내를 숨길 줄 몰라 병실 문만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김대훈도.
– 이번에 돌아가면 진짜 멤버를 갈아야 하나…….
마지막 리셋 버튼을 누르던 순간을 떠올린 예찬은 정찬양의 말을 인정했다. 당장이라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듯 잘난 척 떠들어댔지만, 정찬양의 말대로 예찬은 이 사람들과 좋았던 순간이 여전히 너무 좋아서 아마 그 후 수십, 수백, 수천 번 더 기회가 주어졌다 한들 손을 놓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누군가 꽉 붙잡은 손을 떼어 놓지 않는 이상 말이다.
“죄송하지만 너무 늦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찬아, 가자.”
아까부터 손을 접었다 폈다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던 매니저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예찬의 등을 떠밀었다.
예찬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대로 매니저에게 이끌려 병원 복도를 빠져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시간을 확인한 매니저가 걱정이라든 듯 한숨을 내쉬며 옆자리의 예찬을 넘겨보았다.
“휴, 숙소 도착하고 씻으면 잠깐 눈 붙이고 바로 나와야 할 거 같은데 어떡하냐.”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형도 못 잤네요. 형은 저희 리허설할 때 눈 좀 붙여요.”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 매니저는 단호하게 예찬의 권유를 거절했다.
“안 돼. 너 쓰러질지도 몰라서 대기하고 있을 거야.”
“하하. 무대에선 이상하게 힘이 넘쳐서 절대 안 쓰러질걸요.”
“그러면 내려오다가 쓰러지든지. ……아, 이건 취소. 말이 씨가 될까 봐 무섭다, 야.”
“취소 접수했습니다. 기사는 어때요?”
“예찬이 네가 병원 왔다는 것까지 벌써 났더라. 진짜 우리나라는 비밀이 없다니까. 너야말로 숙소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까 잠깐이라도 자.”
“네에.”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진 않았지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예찬은 얌전히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너머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병실 복도에서 자신을 배웅하던 리스피릿 멤버들이었다.
“…….”
객관적으로 마음을 차분히 돌이켜보니, 리셋을 반복하면서 느꼈던 분노와 절망도, 함께 하면서 즐겁고 보람찼던 감정도 마모되지 않은 채 제 안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리 온전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예찬은 그들과 함께했던 수십 년을 이미 흘러간 과거로 느끼고 있었다.
“예찬아, 도착했어. 좀 잤어?”
“고마워요, 형.”
“……안 잤구만.”
잠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예찬의 목소리에 매니저의 미간이 구겨졌다. 예찬은 그냥 푸슬푸슬 웃은 뒤, 차에서 내렸다.
“이따 봐요.”
“그래.”
매니저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예찬은 층수가 적힌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듯 섰다.
문득 정찬양에게 연락이 왔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스마트폰을 확인했으나 김대훈에게 온 메시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찬양이 형은 잠들었어요. 오늘 고마웠어요.
‘……오늘은 더 이야기 못 하겠군.’
다시 스마트폰 화면을 끈 예찬은 고개마저 기울여 엘리베이터 벽면에 댔다.
7, 8, 9……. 차례로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며 얼마 동안 멍하게 서 있었을까.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굳게 닫혀있던 문이 이윽고 양쪽으로 벌어졌다.
“예찬아!”
그리고 예찬이 발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이 익숙한 목소리로 예찬을 불렀다.
“범세혁?”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숙소 현관문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왜 지금쯤 이불 덮고 꿈나라에 빠져 있어야 할 범세혁이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예찬이 눈을 깜빡이고 있자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온 범세혁이 예찬의 손목을 잡고 끌어 내렸다.
“어서 와!”
예찬이 느끼는 혼란 따윈 상관없다는 듯 범세혁이 활기차게 외치듯 말하며 웃었다.
“예찬이 왔어요!”
그대로 범세혁에게 이끌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이 꺼져있을 줄 알았던 거실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왔어?”
“형, 고생했어요!”
“진짜 오래 걸렸네. 피곤하지?”
“예찬이 빨리 씻고 자게 길 좀 비켜 봐요.”
기다렸다는 듯 레굴루스 멤버들이 예찬을 반갑게 맞이했다.
“……다들 안 잤어요?”
예찬의 물음에 제일 먼저 현관으로 튀어나온 강해솔이 가슴 앞에서 팔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잠깐. 잔소리하지 마라. 너 안 왔는데 잠이 오겠냐고.”
‘잔소리 할 생각은 없었는데…….’
물론 평소의 예찬이라면 오늘 콘서트는 말아먹을 생각이냐고 바로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아니고 여력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다들 이렇게 잠도 자지 않고 저를 기다렸다니 조금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뭉클한 기분을 잠시 뒤로 치운 예찬이 여전히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범세혁의 손을 낚아채 역으로 붙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건 선 넘었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언제부터 기다렸어? 밤에 그렇게 밖에 오래 있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여름이라고 얕보는 거야?”
“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을 가로막은 멤버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저 안쪽에서 정의탁의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작 예찬의 잔소리에 얻어맞은 범세혁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샐샐 웃고 있었다.
“누구 나올 거 같으면 얼른 숨었지!”
“그걸 말이라고…….”
다시금 한 소리 하려던 예찬을 막은 것은 심상록이었다.
“세혁이만 서 있던 거 아니야. 바람 쐴 겸 번갈아서 잠깐잠깐 나가 있던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누가 바람을 경치 좋은 테라스를 내버려두고 꽉 막힌 아파트 복도에서 쐰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 예찬이 걱정돼서 한 짓이라는 걸 알기에 이 이상 잔소리를 할 의욕은 나지 않았다.
평소에는 무심한 것 같지만 이런 때는 또 남의 기색을 기민하게 읽어 내는 범세혁이 예찬에게 잡힌 손을 앞뒤로 신나게 흔들며 말했다.
“예찬아, 피곤하지? 내가 머리 감겨 줄까?”
됐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뿌듯한 얼굴로 예찬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우이경이 정색했다.
“예찬아, 아무리 피곤해도 절대 세혁이한테 맡기지 마. 감기는 게 아니라 찢는 수준이야.”
“에이.”
“에이? 에에이? 나 농담 아니거든?”
두 번 부탁했다가는 탈모 광고를 찍어야 할 수준이라며 선우이경과 범세혁이 티격거리기 시작했고, 그새 신발을 벗은 예찬은 현관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익숙한 방향제의 향이 코끝을 스치자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렇게 집착했던 리스피릿이 과거가 된 것은, 아마 이제 예찬에게는 새로운 자리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얘들아, 얼굴 봤으면 이제 들어가서 자자. 예찬이도 빨리 씻고 자야…… 예찬아, 뭐 할 말 있어?”
예찬의 표정이 묘했는지, 길 좀 막지 말라며 멤버들을 밀쳐 내던 심상록이 하던 일을 멈추고 예찬에게 물었다.
예찬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전부 쏟아 내는 대신, 조금 전부터 혀끝에 맴돌던 말이나 하기로 했다.
“……다녀왔습니다.”
내가 있을 곳으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