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51)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50화
두 조가 차례대로 지난 경연의 커버 곡 무대를 선보인 후 곧바로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얼굴이 엉망인 연습생들이 많다 보니 그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붕어눈 기태랑을 의식했는지 한껏 목소리를 낮춘 팬이 속삭였다.
“예, 예찬아…… 넌 순위 잘 나온 거지? 제발 그렇지? 응?”
“공주님, 스포일러는 금지예요. 우리 같이 본방에서 확인하기.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눈웃음을 치는 예찬을 정면에서 보고야 만 팬이 가슴 앞에서 성호를 한 번 그었다. 그러고 나서야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내밀어 예찬의 손가락에 걸 수 있었다.
“꼭…… 볼게……!”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예찬이 웃음을 터트린 순간이었다.
“어떡해, 진짜 예찬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였지만 말투가 로봇처럼 딱딱했다. 예찬은 웃는 얼굴 그대로 제 앞에 선 다음 팬을 마주 봤다. 어디서 울고 온 모양인지 눈가가 퉁퉁 부은 팬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찬이 오늘 너무 잘생겼다! 완전 최고야. 우리 오빤 떨어졌는데!”
순위 발표식이 아직 방송 전인데 저렇게 단언해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대단히 하위권인 연습생의 팬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결과가 나올 때까진 기적을 믿어보지 않나? 아니면 1차 순발식 때 떨어진 연습생 팬인가? 뭐 어쨌든…… 어떻게 할까.’
아닌 척 비꼬는 건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이니 대놓고 제지를 할 수도 없었다. 리스피릿 시절이라면 뒤에 서 있는 매니저를 불러서 조용히 끝냈겠지만, 지금은 매니저도 없었고 그때처럼 극도의 신비주의 컨셉을 밀고 있지도 않았다.
예찬이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사인을 적은 순간이었다.
[선택지 발생! 저급 어그로에 고급스럽게 대응할 필요가 있을까요? 혼쭐을 내 줍시다!>― 세상에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
― 이번에 떨어진 애들이 제 경쟁자급은 아니죠.
―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맞춰 볼까요?
‘……이거 진짜 내 편 맞아?’
지난밤 샤워실에서 했던 생각이 무색해지는 끔찍한 선택지였다.
첫 마디를 저따위로 해서야 잡음 없이 보내는 방법은 틀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퇴치하기로 결심한 예찬은 펜을 들어 올리는 척하며 선택지를 눌렀다.
“세상에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
“뭐?”
어차피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구설수에 오르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이런 때야말로 그동안 또라이 같은 이미지를 쌓아 온 게 도움이 되지.’
거지 같은 첫 마디가 녹음되어 두고두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건 감수하기로 한 예찬이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건 꼭 받아 주세요.”
“지금 뭐라는 거…….”
예찬이 테이블에 있던 물통을 당황한 팬에게 건넸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애써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목소리 갈라졌어요. 목 아프지 않아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당황한 팬을 향해 예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도, 다른 연습생들도 촬영하는 내내 응원해 주시는 공주님들이 있어서 하루하루 힘낼 수 있었어요. 공주님이 보낸 사랑은 분명 헛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츄마프를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예찬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팬의 눈가에도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움직이던 상대가 종이를 낚아채더니 아예 무대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팬이 넘어올까 봐 가슴 졸이던 와중 모든 이야기를 들어 버린 임채진이 예찬과 달려가는 팬을 번갈아 바라보다 귓속말을 했다.
“……예찬이 너 진짜 X나 말 잘한다.”
“채진아, 예쁜 말.”
점잖게 임채진의 입단속을 시킨 예찬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 팬을 향해 미소 지었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별일 없이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사인이 끝난 후, 예찬을 센터로 열두 명의 연습생이 추는 ‘츄즈 유어 프린스’가 이어졌고 2차 사인회가 무사히 종료되었다.
큰 사건 없이 조용히 끝나서 다행이라고 연습생들은 입을 모아 말했으나 팬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인회 후기를 찾아보던 예찬은 분노로 불타고 있는 익명 게시판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츄마프 제작진 진짜 X졌으면 좋겠다.]데뷔 간절한 애들 데리고 탈락자 포함 사인회ㅋㅋㅋㅋㅋ
사실 안 웃김 이게 사람 새끼 맞냐?
어제 2차 순발식 한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오늘 게릴라 사인회 한다고 공지 떴을 때부터 얘네 미쳤나 싶었음
근데 나도 미친X이라 내 새끼 얼굴 보고 싶어서 사인회장까지 반차 내고 꾸역꾸역 기어 갔다 ㅅㅂ
첨엔 그래도 애들 얼굴 보니까 걍 좋았는데 사인 받으려고 올라가니까 죄책감에 얼굴을 못 들겠더라
떨어진 연생도 연생인데 남은 연생들이라고 마음이 좋겠냐고 사람이 상도덕이 있지 내 새끼가 붙었든 니 새끼가 붙었든 거기서 어떻게 웃어 주변도 다 울고불고 난리 남
서바이벌이니 누구는 붙고 누구는 떨어지는 건 아는데 적어도 떨어진 연생 인권은 지켜 줘라 개X끼들아 트라우마 생긴다고
과격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꽤 온건한 글이었으나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은 혼돈과 파괴와 절망 그 자체였다.
– 과몰입 지린다 지가 연생인 줄
– ㅎㅎ 응 울 세긩이는 안정권이라 마음 편해
– 저렇게라도 나와야지 뭐 어쩌라고ㅋㅋ 멀쩡한 애들 피해자 만들지 말고 정병 왔으면 자라
– 지도 알고 있네 그러게 왜 미친X처럼 거길 갔어
– 지긋지긋하다 츄마픈지 뭔지 노관심이니까 작작 올려 ㅅㅂ
– 근데 서바이벌 예능이 원래 다 그렇지 않나? 솔직히 마라 맛이니까 다들 보지 순한 맛이었으면 아무도 안 봐서 망했을 듯
└ X 같지만 성공한 프로그램이랑 따뜻한데 시청률 애국가인 프로그램 둘 중 고르라면 닥전이지
– ㅂㅅㅎ 오늘도 ㅈㅊㅇ 따라 하던데 애미들 눈 감고 모른 척하는 거 소름
– 게릴라 사인회 가는 놈들 다 백수임?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는 거임?
– 예찬이 데뷔하자!
└ 눈치 챙겨 미친X아
중간에 뜬금없이 범세혁과 정찬양을 비교하는 보는 눈 더럽게 없는 악플러가 섞여 있었으나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예찬은 일단 캡처를 하고 다시 다른 반응을 살폈다. 츄마프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연예 관련 커뮤니티는 대부분 이번 사인회를 주제로 각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걸 제작진이 원하는 대로라고 해야 하나.’
중반부를 넘어선 츄마프는 오늘도 순조롭게 어그로를 끌며 순항하고 있었다.
의외인 점은 돌아가자마자 예찬에 대해 한바닥 욕을 써서 올렸으리라 생각했던 팬이 잠잠한 것이었다.
– 근데 예ㅊㅏㄴ이한테 사인 받고 뛰쳐나간 애 뭐임?
└ ㅁㄹ 급똥이었나 보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있는데 대답해 줄 사람은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라는 폭탄 발언까지 했으니 당연히 사인회가 끝날 즘에 싸움판이 벌어져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분명 녹음도 했을 텐데. 중요한 시기에 터트리려고 묵혀 두는 건가?’
예찬의 눈에 이상한 후기 글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 나 목소리 갈라졌었구나. 진짜 몰랐어. 사인회 공지 올라왔을 때부터 계속 울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삐딱하게 나갔는데 걱정부터 해 줘서 미안하고 많이 고맙더라.
네 말대로 다 미웠거든. 주변에 투표 좀 해 달라고 더 말했어야 했는데, 더 사랑한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계속 후회뿐이라 나도 밉고 너도 밉고 다 싫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이, 내 감정이 헛된 게 아니라는 걸 너한테 증명받아서 정말 기쁘고 염치없고 마음이 복잡하다.
단 하나 확실한 건 고마워 예찬아. 알아 줘서 고마워. 그리고 진심을 건네줘서 고마워.
지치지 않고 계속 응원할게. 사랑해.
진심이 느껴지는 짧은 글에 함께 첨부된 물통과 사인 사진에 보이는 건 예찬의 글씨체였다. 그리고 오늘 예찬이 물통을 건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계정 프로필을 눌러 보자 오늘 사인회장에서 뛰쳐나가자마자 만든 건지 썰렁했다, 그렇지만 몇 없는 글들로 판단하건대 예찬에게 입덕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세상엔 별의별 계기로 시작되는 사랑도 있구나.’
오는 팬은 안 막고 가는 팬은 최선을 다해 붙잡는 예찬이었기에 입덕은 언제나 환영이었지만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버스가 다시 합숙소에 도착했다. 연습생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제작진들은 탈락자들을 모아 한 버스에 태웠다.
창 너머로 눈이 마주친 김주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에 예찬도 말없이 마주 고개를 까딱였다.
“여러분! 이제 강당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도 남은 연습생들은 버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2차 순위 발표식이 정말로 막을 내린 기분이었다.
[후보생 여러분들, 어서 오시죠.]강당에서 연습생들을 기다리고 있던 MC 앤드류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금부터 츄즈 마이 프린스 99 네 번째 합숙의 주제를 공개하겠습니다.]MC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당의 불이 꺼지고 대형 스크린에 글자가 떠올랐다. 글자를 확인한 연습생들이 작게 술렁거렸다. MC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그렇습니다. 이번 4차 합숙의 경연 주제는 바로 ‘콘셉트 곡’입니다. 여러분은 공주님들께서 투표한 결과에 따라 다섯 명씩 한 조가 되어 서로 다른 콘셉트의 곡을 준비하게 됩니다.]화면은 이내 지난 투표에 나왔던 여섯 가지 각기 다른 옷차림 사진으로 변했다. 옷 사진이 한 장씩 곡의 장르로 바뀌기 시작했다.
세일러 카라에 베레모는 트로피컬 팝으로, 각 잡힌 제복에 망토와 모자까지 세트였던 사진은 하이브리드 트랩으로, 아이보리색 스웨터와 옅은 갈색 면바지는 딥 하우스였다.
후드티에 야구 점퍼를 걸쳐 놓은 사진은 힙합으로 변했고 하네스와 셔츠, 가죽 바지 사진은 댄스 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도포에 갓이 놓여 있던 사진의 장르는 뭄바톤이었다.
잠시 연습생들에게 모든 장르를 전부 확인할 시간을 준 MC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럼 이번엔 공주님들이 고른 조를 발표합니다!]여섯 등분한 화면을 각각 가득 채우던 장르 이름이 작게 축소되고 그 아래로 연습생들의 이름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군.’
장르마다 한 명씩 총 다섯 명이 한 번에 공개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이 나왔는지 찾느라 사방이 분주해졌다.
예찬은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자신과 같은 조가 된 연습생들에게 주목했다.
[뭄바톤]― 하예찬
― 선우이경
― 우휘겸
― 강해솔
― 이승헌
예상했던 멤버와 거의 비슷했지만 약간의 오차도 존재했다.
‘정의탁은 없나.’
다른 장르 쪽을 살피자 딥 하우스 아래에 자리 잡은 정의탁의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
선비복 컨셉인 만큼 뭄바톤에는 대체로 냉랭하게 생긴 놈들이 들어왔는데, 정의탁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청순한 느낌의 스웨터 쪽 표가 더 많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드디어 해솔이 형이랑 같은 조가 되었군.’
“와, 드디어 같은 조가 됐네! 잘 부탁해.”
강해솔의 이름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던 예찬의 등 뒤에서 불쑥 귀에 익은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