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53)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52화
“그렇게 1절이랑 똑같이 정직하게 들어가면 재미없다니까.”
“네 말대로 하면 안정성이 너무 떨어지지.”
“안무 짤 거 생각하면 그냥 비워 두는 게 제일 예쁜데?”
강해솔과 선우이경, 그리고 이승헌까지.
세 사람 모두 단순히 자기 파트를 늘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각자 구상한 곡을 제대로 구현하려고 저러고 있다 보니 끼어들기도 애매했다.
셋의 첨예한 대립을 구경하던 예찬은 가엾게도 넋이 나간 채로 무릎을 세워 앉아 있는 우휘겸을 발견했다.
좀 전까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보컬 파트가 확정이 난 후부터는 계속 저 상태였다.
슬슬 이 싸움을 끝낼 때가 온 것 같았다.
“잠시만요.”
아무리 생산적인 토론이라 해도 시간이 금인 이 합숙에서 이 정도 참았으면 오래 참은 셈이었다.
“그냥 듣기만 하면 셋 다 괜찮아 보이거든요. 어차피 각자 맡은 파트 가사를 써서 모으기로 한 이상, 다 쓴 다음에 수정도 불가피하잖아요. 일단 원하는 대로 써 보고 더 괜찮은 쪽으로 하는 거 어때요? 이경이 형 말대로 비우는 게 나을 수도 있고요.”
예찬의 말에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세 사람은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동의했다.
“제목은 이미 시나브로로 정해져 있으니 가사를 여기에 맞게 써서 모으는 걸로 할게요.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라는 뜻인데 따로 하고 싶으신 주제 있어요?”
선우이경을 의식해서 다시 존댓말로 돌아온 강해솔이 말했다. 예찬은 바로 손을 들었다.
“그거 말인데요,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예찬의 기획은 완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츄마프에 합류하고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던 시절부터 생각해 뒀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조원들의 눈이 점차 빛나는 것을 느끼며 예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이었다.
* * *
예찬과 연습생들이 한창 연습실에서 열을 올리고 있던 그 시각.
마침내 회사원에서 백수로 전직을 마친 전 회사원 박모 씨는 전날 열린 츄마프 2차 사인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정하고 있었다.
“하, 일주일만 빨리 퇴사했어도 게릴라 콘서트도 다 따라다니는 건데.”
퇴사 직전에 인수인계 중이다 보니 일요일에 열린 서울 콘서트 말고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뻔히 내일 콘서트가 있을 것임을 짐작하고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무력함이란……!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남는 것은 시간이었다.
앞으로는 단 한 개의 스케줄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아니, 근데 예찬이는 뭐 보정할 게 없네. 그냥 완벽 그 자체야.”
건드리면 오히려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아까부터 색감만 깔짝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쉴 틈 없이 셔터를 누르고 와서 보정에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거라 예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지울 컷이 없는 게 문제지.”
마지막 사진까지 색감 수정을 마친 박모 씨는 사인회 날짜가 적혀 있는 폴더를 화면에 띄웠다.
분명 쓸 만한 사진만 남기고 솎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지어 연속으로 찍어 댄 사진조차 지우지 못했다. 0.001mm 정도 달라졌을 뿐이지만 어느 쪽이든 휴지통에 가기엔 너무 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걸 버리는 건 신성 모독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한 장 허투루 날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찍고 남겼다가는 컴퓨터 용량이 부족해질 터였다.
박모 씨는 냉정한 눈으로 다시 한번 사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리고 얌전히 외장하드를 주문했다.
박모 씨가 사랑을 담아 찍은 사진은 SNS에서 좋은 의미로 제법 화제가 되었다.
그중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리본을 머리에 달고 팬을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는 예찬의 사진을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바꾼 최모 양은 발걸음도 가볍게 독서실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누구의 팬이 독보적으로 많다는 것을 딱히 느끼지 못했지만, 게릴라 콘서트가 끝나자 그녀가 응원하는 하예찬이 최상위권임이 절로 느껴졌다.
‘홈마판만 봐도 그렇단 말이지.’
이미 SNS에 수십 수백 장의 프리뷰가 올라오고 있었다.
더욱이 2차 순위 계승식이 방영되는 사흘 뒤부터는 지하철 광고를 시작으로 팬들의 본격적인 서포트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최모 양 또한 저금해 뒀던 용돈을 탈탈 털어 참여했다.
마음 같아선 발로 뛰는 서포트에도 참여하고 싶었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였다.
‘그래도 울 오빠는 무사히 데뷔할 거니까. 어디 대학생만 돼 봐라!’
느슨해진 팬덤에 긴장감을 주겠다며 최모 양이 다짐했다.
아직 코앞으로 다가온 입시가 실감 나지 않는 3월의 어느 날이었다.
* * *
“다 썼어요?”
강해솔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예찬과 우휘겸을 향해 악보를 내밀었다.
“우리 셋은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으니 너희 둘이 먼저 봐.”
“그거 괜찮다!”
선우이경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승헌도 말없이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볼게요.”
세 사람이 음악을 다시 듣는 사이 예찬과 우휘겸은 악보에 적힌 가사를 신중히 살폈다. 가장 위쪽은 선우이경의 것이었다.
‘와, 지독한 악필이다…….’
그냥 별로라고 넘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예찬은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해독했다.
‘얼굴은 멀끔하면서 글씨는 이게 뭐냐고. 내용은…… 괜찮군.’
가사를 전부 확인한 예찬과 우휘겸은 세 사람이 특히 강조했던 브릿지 부분을 다시 점검했다.
“그럼 이렇게 전달한다?”
“응.”
“좋아, 다 됐어요!”
우휘겸과 의견을 모은 예찬이 세 사람을 불렀다.
“일단 가사는 나쁘지 않은데 좀 따로 놀긴 하네요.”
조원들이 각자 써 온 가사를 서로 돌려 본 후 예찬은 평가를 내렸다.
‘시나브로’라는 제목에 예찬이 제안한 제목까지 명확하다 보니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파트끼리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이건 일단 한 사람이 다듬고 나서 다 같이 다시 보는 걸로 해요. 그리고 중요한 브릿지 파트 말인데요.”
열정 넘치는 세 사람의 눈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예찬은 뜸 들이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해솔이 형 말대로 하는 게 제일 나을 거 같아요.”
강해솔이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냥 웃어도 되는데.’
참 변함없이 내숭쟁이라고 생각하며 예찬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중간에 이 가사 있잖아요. 여기에 이경이 형이 말했던 안무를 넣는 건 어때요? 전 브릿지랑 통일감이 사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가사를 읽어 가던 선우이경과 이승헌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선우이경이 예찬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야,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예찬이 너 진짜 센스 있다.”
예찬이 정색했다.
“우휘겸이랑 같이 한 건데요.”
“그래그래. 휘겸이도 고생했어!”
퉁명스러운 예찬의 말에도 선우이경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킬킬거렸다.
실실 웃는 선우이경을 흘겨보던 예찬은 참지 못하고 결국 한 소리를 더했다.
“고생은 그거보다 형 글씨 해독하는 데 더했거든요?”
“진짜? 아하하! 미안, 미안! 내가 꼭 글씨 연습을 할게!”
‘진심으로 저 새끼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싶다…….’
예찬과 마찬가지로 쉽게 읽히지 않는 글씨를 보고 한참이나 인상을 쓰던 강해솔이 선우이경에게 악보를 건넸다.
“이경이 형은 이거 좀 읽어 주실래요?”
“그래. 아, 웃기다. 정말.”
선우이경이 자신이 쓴 가사를 읽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가사에 강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가사를 먼저 수정해 볼게요. 그다음에 다시 다 같이 보는 걸로…….”
“응? 해솔이 너는 이제 나랑 안무 짜야지! 포지션이 랩인 거지 춤도 장난 아니잖아!”
예찬은 조금 놀랐다. 츄마프 내에서 단연 1위를 달리는 랩 실력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선우이경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확실히 범세혁 말고는 해솔이 형보다 춤 잘 춘다고 장담할 수 있는 놈이 없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강해솔의 상태창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상태창을 보지 않아도 이미 실력을 인정하고 있으니 확인할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못했었다.
‘근데 안 봤다고 자각하니 갑자기 궁금하네.’
갑작스럽게 쏟아진 칭찬과 제안에 강해솔이 당황했다.
“아니, 그래도 제가 리더인데 책임을 지는 게…….”
“제 생각에도 그래요. 가사 손보는 건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해솔이 형은 안무 쪽으로 가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형, 저 악보 좀 다시 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예찬이 자연스럽게 강해솔의 손에서 악보를 건네받았다.
‘상태창.’
아이돌 연습생 ― 강해솔
비주얼 : S
노래 : B
춤 : S
랩 : S
언변 : C+
반짝임 : A
범세혁 이래로 이렇게 S가 많은 상태창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결과이기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보다 예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가장 아래에 적힌 강해솔의 상태였다.
상태 : 리더로서 막중한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니. 고작 조 리더인데 뭘 마음이 무겁기까지 하냐, 이 형은.’
생긴 것과 다르게 성실 그 자체인 강해솔이었다. 새삼 예찬이 감격하고 있을 무렵 선우이경이 끼어들어 악보를 채갔다.
“자자, 얼른 정하자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예찬이 다시 악보로 손을 가져갔다.
“가사 작업은 제가 할게요.”
“좋아, 그럼 휘겸이랑 승헌이도 일단 안무 쪽에 붙자. 여럿이서 해 봐야 하는 부분들이 있거든.”
자신만만하게 웃는 선우이경의 머릿속에는 이미 어느 정도 안무의 틀이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악보를 테이블 위에 내려 둔 예찬이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필요한 것 좀 구해 올게요.”
“필요한 거?”
그게 뭐냐고 묻는 조원들에게 대답하는 대신 예찬은 빠르게 연습실 밖으로 나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얼마 뒤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은 예찬이 돌아왔다.
한창 안무에 집중하고 있던 조원들이 모두 감탄했다.
“와, 이거 진짜 생각 잘했다.”
“그러게.”
예찬이 가져온 것은 무대 의상인 도포와 비슷한 재질의 긴 천이었다.
“연습 때 의상을 직접 보여 주면 곤란하니 이걸로 빌려 왔어요.”
“허리띠를 하고 두르면 대충 비슷하게 나오겠어. 좋아, 그럼 처음부터 가 볼까?”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기 허리에 먼저 천을 두른 선우이경이 힘차게 외쳤다.
다른 조원들도 하나씩 천을 집어 드는 것을 확인한 예찬이 악보를 챙겼다.
‘어떻게 짰을지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이가사가 먼저지.’
그 후 조원들은 사담 한마디 없이 각자 할 일에만 집중했다.
또다시 열정에 불이 붙은 조원들이 식사를 거르고 싶어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제야 첫날인데 이러다 굶는 걸 당연하게 생각할까 봐 예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오늘 하루하고 말 거 아니니 밥 먹고 합시다.”
단호한 예찬의 말에 그제야 나머지 네 사람도 음악을 끄고 연습실을 정리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다른 조는 대부분이 이미 식사를 끝마치고 나갔는지 무척 한산했다.
“늦게 오니까 줄 안 서서 받을 수 있는데? 진작 이렇게 올 걸 그랬네.”
“대신 10분 만에 먹고 나가야 하지만요. 아, 이제 9분 남았…… 음?”
선우이경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배식을 받으러 가던 예찬의 눈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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