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55)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54화
“1절만 부르고 끊을 거 아니니 난이도 조절도 해야 할 거 같아요. 안무는 제일 힘 준 동작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해 보죠.”
예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선우이경과 강해솔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번이랑 3번이랑 6번 동작은 2절로 빼죠.”
“그래, 그리고 4번 앞에서 좀 힘을 뺐다가 4번으로 들어가는 걸로 하자.”
그림에 적어 놓은 숫자를 보며 이야기를 들으니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곰곰이 듣고 있던 예찬도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여기다 츄유프 동작도 좀 섞어 보는 거 어때요? 이거 있잖아요.”
“아, 그 동작 말이지? 괜찮을 거 같은데? 해솔이는 어때?”
안무를 짜 본 경험이 있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창작 댄스엔 문외한에 가까운 우휘겸과 이승헌은 눈만 깜빡거리며 앉아 있었다.
예찬은 적당히 가사가 적힌 종이를 두 사람 손에 쥐여 주었다.
둘 다 눈치는 있는지 무릎을 나란히 세우고 가사를 외우기 시작했다. 예찬은 다시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 강해솔과 선우이경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놈들 옆에 꼭 붙어서 조율해야지. 안 그러면 아까 같은 참사가 또 벌어진다고.’
“해솔이 너 여기서 원핸드 에어트랙 할 수 있어?”
“박자만 맞추면…….”
“그거 아닙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또다시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넘어가려는 두 사람의 고삐를 잡은 예찬이 결심했다.
* * *
“뭐야.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요?”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예찬을 발견한 정의탁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에 서 있던 배새벽도 예찬과 눈이 마주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찬은 손을 들어 가볍게 화답한 다음 주변을 살폈다.
‘방 앞에서 기다리고 싶었지만 거긴 카메라가 있어서.’
근처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예찬이 작게 물었다.
“그 후론 어땠어?”
“아, 진짜. 형네 조나 신경 쓰라고요. 보니까 선우이경 형부터 해서 다 대단한 사람들만 모였던데, 우리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어요? 그러다 꼴찌 해도 난 책임 못 져요.”
“의탁이 너는 형 이름 옆에 꼴찌가 붙는 게 상상이 가니?”
예찬이 의아하게 묻자 정의탁은 질렸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와, 진짜 짜증 나는데 반박을 못 하겠네.”
“새벽이는 어땠어?”
“새벽이 취조하지 마세요! 새벽아, 대답 안 해도 돼.”
영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의탁 대신 배새벽에게 묻자 정의탁이 팔을 벌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예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꺾어 정의탁의 팔 아래로 들이밀었다.
“진도는 좀 나갔어? 내일모레가 중간 평가인 건 알지?”
“……진짜 집요하다, 집요해.”
“중간 평가는 포기했어요.”
마찬가지로 고개를 꺾어 예찬과 눈을 마주친 배새벽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쉰 정의탁이 말에 살을 붙였다.
“오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협조할 생각이 아예 없더라고요. 뭐 중간 평가 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으면 위기감이 들어서 좀 나아지겠지 싶어서 내일까진 내버려 두기로 했어요. 자, 이제 됐죠?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요.”
정의탁은 조원들에게 인간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예찬의 생각에 세 사람이 회개할 확률은 0퍼센트였다.
그런 놈들은 대체로 자신이 욕을 먹은 이유를 타인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중간 평가를 망치면 지들끼리 정의탁과 배새벽만 더 신나게 깔 게 분명했다.
‘답은 나왔군.’
좋은 무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이제 확실한 선악 구도를 시청자에게 보여 주는 쪽에 집중해야 했다.
‘나머지 셋 이름이…… 윤지우가 해림, 진용호가 센트럴, 그리고 김대영은 소속사가 없었지. 해림은 뭐 별거 없고. 센트럴이 문제인데.’
센트럴은 첫 합숙 당시 미리 츄마프 주제곡과 안무를 받아 연습해 왔을 만큼 제작진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소속사였다.
그 후에도 항상 하는 것에 비해 분량이나 편집을 잘 받고 있긴 하니 진용호가 철딱서니 없이 까불 만했다.
그렇지만 진용호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츄마프는 이 프로그램으로 데뷔한 그룹을 무려 7년이나 N-net 산하에 두고 굴려 먹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메인 PD가 그 그룹으로 이미 예능 시리즈도 몇 편 기획해 놨을 시점이니, 우승 데뷔 멤버에 대한 관심도가 어마어마했다.
현시점에서 센트럴의 진용호와 이민규는 17위와 20위.
그에 반해 루벨 엔터는 7위인 정의탁과 2위인 범세혁이 속해 있으니 제작진이 어느 쪽의 손을 들지는 명확했다.
‘루벨까지 안 가도 배새벽이 11위인데. 그렇게 밀어줘도 못 받아먹고 빌빌대는 진용호보다야 내부에서 훨씬 높게 평가받고 있겠지.’
그렇다면 제작진이 편집하기 좋은 그림을 만들어 주는 게 지금부터 정의탁과 배새벽이 할 일이었다.
“의탁아, 내 생각엔 터놓고 얘기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
“그 셋이랑요? 터놓는다고 뭐가 변할 거 같진 않던데요.”
“그쪽은 안 변하지. 그런데 너희 그 셋이랑 같이 데뷔할 건 아니잖아.”
진상 손님을 만난 아르바이트생처럼 경계하던 정의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예찬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배새벽은 여전히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같은 조원끼리 팀워크가 안 좋으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고 생각해서 연습 내내 사람 좋게 웃었지? 그러면 방송에 너흴 따돌리는 장면이 나와봤자 본인들이 괜찮다는데 너무 예민하게 보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나와.”
예찬은 두 사람과 번갈아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꼭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때 말해. 다 같이 잘하고 싶고,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싶다고.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묻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게 하면 카메라 의식한 티가 너무 나지 않아요?”
미묘한 얼굴을 한 정의탁을 향해 예찬이 일부러 과장되게 코웃음을 쳐 주었다.
“티 좀 나면 어때.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카메라를 의식해서 그다음부터 잘해 주면 좋은 거고, 지금이랑 똑같이 굴면 너희 둘이라도 살아남아야지.”
거기까지 말한 예찬은 정의탁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같이 데뷔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힘내라. 새벽이도 힘내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예찬의 모습에 정의탁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걸 보니 마음을 잡은 모양이었다.
뿌듯함에 절로 미소가 새어나왔다.
* * *
다음 날도 이른 아침부터 연습이 이어졌다.
연습실 점검을 이유로 오늘은 두 조씩 한 연습실을 쓰게 되었다.
사실 점검은 핑계고 연습생끼리 서로 견제하는 컷을 찍고 싶어서 한 방에 몰아넣은 게 분명했다.
‘시나브로’ 조와 같이 연습실을 쓰게 된 것은 범세혁과 심상록이 속한 ‘Auspicious’ 조였다.
순발식 1위와 2위가 서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제작진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졌으나, 안타깝게도 제작진이 원하는 장면은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됐긴. 다 같이 바닥을 구른 거지.”
“아하하, 진짜 웃겼겠다. 지금 재연해 주면 안 돼요?”
“세혁이 네가 굴러 볼래?”
연습 도중 잠깐씩 갖는 휴식 시간까지 맞춰서 어울리고 있는 연습생들을 본 예찬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범세혁의 저 작은 머리통 안에 경쟁이라든지 견제라든지 그런 단어가 있는지 궁금하군. 아니, 순발식 때 보면 있긴 한가?’
종종 예찬을 보고 호전적인 눈빛을 보낼 때가 있는 걸 보면 나름대로 승리욕은 있는 것 같은데, 종잡기 어려운 놈이었다.
예찬은 범세혁에게 눈길을 주었다.
범세혁은 선우이경에게 연습을 하다가 우휘겸이 강해솔의 천을 밟는 바람에 다섯이 뒤엉켜서 넘어진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대고 있었다.
“쉬는 시간 끝! 다시 연습하자!”
“네~!”
‘얼씨구.’
저쪽 조 리더인 심상록의 말에 ‘시나브로’ 조원들이 힘차게 대답하며 쉬던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우리 먼저 할까?”
“오, 좋아 좋아.”
심지어 지금까지 연습한 노래와 춤을 서로에게 미리 선보이기도 했다.
두 조 모두 자신들이 짠 가사와 안무가 완벽에 가깝다고 자신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혹시 저쪽이 베끼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면 절대 못 하지.’
반대로 이쪽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바꿀 생각이어도, 지금처럼 구김살 없이 남의 무대를 보긴 쉽지 않았다.
내 코가 석 자라 즐길 수 없다는 게 아니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상대 조의 무대에서 영감을 얻어서 활용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거리끼게 되는 것이었다.
심상록에게 받은 음원 파일이 들어 있는 USB를 스피커에 연결한 예찬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묵직한 사운드가 이내 연습실을 채웠다.
조금 전까지 깔깔거리던 모습을 완벽히 지운 범세혁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도입부를 맡았다.
‘Auspicious’ 조의 장르는 하이브리드 트랩으로, 센터는 당연하게도 범세혁이었다.
‘무대 위를 아주 날아다녔지.’
예찬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회차에서도 범세혁은 각 잡힌 검은색 제복을 입고 이 곡의 센터를 맡았었다.
예찬이 들어간 ‘시나브로’ 조가 차가운 인상의 연습생들의 팬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콘셉트라면, ‘Auspicious’는 범세혁처럼 화사한 인상의 연습생들 팬에게 인기가 많은 콘셉트였다.
고작 하루 연습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퀄리티의 무대가 펼쳐졌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번에도 예찬의 조와 1위를 놓고 겨루는 건 범세혁의 조가 될 것 같았다.
‘Auspicious’ 조가 뿌듯하게 서로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이 예찬은 다리를 쭉 늘려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격한 안무를 소화하며 노래를 불렀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뽀송뽀송한 범세혁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예찬은 범세혁에게 ‘시나브로’가 들어 있는 USB를 건네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시작 대형에 맞춰 서 있는 조원들 가운데에 섰다.
“그럼 틀게요!”
범세혁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전주가 시작되었다.
“그…….”
“야! 1연습실 지금 싸움 났대!”
첫 시작을 맡은 강해솔이 입을 떼자마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
완전히 타이밍을 놓친 강해솔이 손을 들어 올린 채로 굳어 버렸다.
멀뚱히 서서 그런 강해솔을 바라보는 우휘겸을 제외한 나머지 연습생들은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싸움 구경에 흥미가 없는 예찬은 유유히 스피커로 다가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아이돌 하겠다고 모여 있는 놈들끼리 싸움이라니, 제정신인가? 어제부터 별 질 떨어지는……’
순간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예찬은 뻣뻣해진 목을 돌려 열린 채로 방치된 문을 바라보았다.
타이밍 좋게 옆 연습실에서 달려가는 연습생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누구랑 누가 싸운 건데?”
“하나는 정의탁이라는데?”
미친.
머리보다 빠르게 다리가 바닥을 박찼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