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79)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78화
“분명 후회할걸.”
인파로 바글바글한 동대문 시장.
경연이 모레로 다가왔다. 무대 의상을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보러 이동하는 내내 말이 없던 선우이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스태프들과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악담을 퍼부을 셈인가.’
예찬은 선우이경을 힐끔 쳐다보고 다시 눈앞의 옷더미에 집중하며 물었다.
“제가요?”
“너도, 새벽이도.”
“뭐야. 저주하는 거예요? 이 형 뒤끝 있네.”
집어 든 옷을 선우이경의 몸에 대보며 예찬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선우이경은 한숨을 내쉬며 예찬이 건네준 옷을 받아서 들었다.
– 저는 하고 싶어요. 민폐 끼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배새벽은 안무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
결국 다수결에서도 밀리고 당사자의 의지도 굳건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른손을 쓰는 건 맨 마지막 안무만 유지하고, 다른 부분은 좀 수정했지만.’
바꾼 안무도 연습할 겸 배새벽은 연습실에 남고, 나머지 여덟 연습생은 동대문 시장에 나와 둘씩 짝을 지어 흩어졌다.
깨끗하게 배새벽에 대한 걱정을 털어 낸 예찬과 달리 선우이경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주가 아니라…… 하아, 예찬이 너 새벽이랑 같이 데뷔하고 싶은 거 아니야?”
“티 나요? 근데 배새벽은 왜 모르는 거 같지?”
아직도 파티 창에 이름이 올라오지 않은 배새벽을 떠올리며 예찬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엔 선우이경이 예찬에게 옷을 대보며 말했다.
“새벽이는 지금도 데뷔권이고 팬 사인회에서 사고가 있었던 것도 팬들이 다 알고 있잖아. 무대에서 무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데뷔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다친 애한테 힘든 길을 가게 한 거야?”
“뭐, 형 말대로 무대에서 가만히 서 있어도 웬만하면 데뷔하겠죠.”
예찬은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런데 데뷔만 하면 끝이 아니잖아요. 누가 뭐래도 처음 원서 접수부터 백일 넘게 달려온 건데, 마지막까지 본인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예찬의 말에 선우이경이 마른세수를 했다.
“내 예찬이가 낭만주의자였다니…….”
“누가 형네 예찬인데요. 이래 봬도 냉정하게 판단한 거거든요? 데뷔하고 나서 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구질구질 매달리는 것보다 낫다고요.”
리셋도 없는 이 세상, 되새김질할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게 맞았다.
예찬도, 예찬의 팀 메이트가 될 놈들도.
누구보다 과거에 집착했던 예찬을 알 리 없는 선우이경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찬은 선우이경이 막 집어 든 옷을 다시 매대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옷은 진짜 아니에요. 냉정하게요.”
“정말 냉정하네.”
예찬은 엄숙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매대에 쓸 만한 옷이 있는지 집중해서 찾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통 곡은 제작진 측에서 의상을 준비해 주기 때문에 개별 곡에 입을 옷만 찾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어떻게든 시청률을 뽑기 위해 금액 제한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냥 통 크게 명품 매장 쓸어 오게 해 주지. 금액 제한에 시간까지 이렇게 짧게 주다니…….’
나름 패션 센스가 있다고 생각한 선우이경이 알고 보니 마네킹이 입은 것 그대로 사 입는다는 걸 알게 된 예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흩어져서 의상을 구매하고 있을 다른 연습생들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입을 만한 게 아홉 벌은 나와야 할 텐데…….’
얼마 뒤, 극적으로 카메라맨을 포함한 제작진과 합류한 예찬과 선우이경은 양손을 무겁게 하고 합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진짜 대단한 거 사 왔으니까 기대하라고.”
“하, 저 디자이너를 했어야 됐나 봐여.”
“…….”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예찬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뒤로하고 조원들이 마구 설레발을 치며 펼쳐 놓기 시작한 물건들을 살폈다.
“……야, 이건 인간적으로 좀 심하지 않아?”
“형이 사 온 것도 만만치 않거든요?”
“어우, 다들 개성이…… 강하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색들이 연습실 바닥을 물들였다.
예찬은 허리를 숙여 무지개색으로 번쩍이는 재킷을 한번 들어 올려 보았다.
옷에서 팔락팔락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반짝이와 함께 이 옷을 골라 온 남지유의 시선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상하다. 분명 가게에서는 멋있어 보였는데…….”
한숨을 삼킨 예찬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건 어쩔 수 없네요.”
예찬의 결연한 눈빛에 연습생들이 한껏 긴장했다.
잠시 뜸을 들인 예찬은 팀을 이끌 의무가 있는 리더로서 말했다.
“벗죠.”
* * *
츄즈 마이 프린스 99의 마지막 경연이자 생방송 당일.
경연이 열리는 잠실 실내 체육관 앞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줄 똑바로 서세요!”
카랑카랑한 자원 봉사팀의 목소리에 느슨해져 있던 팬들이 빠릿빠릿하게 줄을 맞췄다.
며칠 전 게릴라 팬 사인회에서 배새벽이 팬들에게 떠밀려 넘어진 사고는 팬들에게도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렇게라도 입소문 타야지 뭐.’
현장 판매 티켓을 사기 위해 전날 밤부터 노숙까지 감행한 프리랜서 정모 씨는 하품을 하며 태연히 생각했다.
깁스를 하고 병원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목격담도 있었으나 딱히 연민은 들지 않았다.
‘걔 팬들이 이때다 싶어서 그걸로 표 구걸하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단 말이지. 뭐, 원래도 순위권이기도 하고 동정표도 적잖게 받을 테니 데뷔하겠지만.’
배새벽을 떠올린 정모 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고로 아이돌이라면 자신을 혹독하게 갈고 닦아 대중들에게 보여 주는 맛이 있어야 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답답한 앞머리를 고수하는 데다 과묵하기까지 한 배새벽은 정말로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평소의 구린 스타일은 무대랑 갭이 좋다고 하고, 말 수 없는 건 어려서 낯가리는 거라고 귀여워하고. 진짜 어리고 잘생긴 게 벼슬이다, 벼슬.’
아이돌 하기 참 쉬워졌다며 혀를 차는 그녀 옆으로 마지막 회 방청 당첨 문자를 확인하던 박모 씨가 지나갔다.
예찬이 사전 인터뷰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따라 입은 그녀는 나눔용 물품들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한적한 위치를 찾아 섰다.
SNS에 미리 오늘 입을 옷차림을 안내해둔 터인지 자리를 잡기 무섭게 예찬의 슬로건이나 부채를 든 팬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혹시 예찬론님?”
“네, 맞아요.”
“와, 진짜 사진 너무 잘 보고 있어요! 방금 지하철역에서도 한참 서서 보다 왔잖아요!”
박모 씨가 하예찬 팬 페이지 ‘예찬론’의 운영자임을 확인한 팬들이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사진과 서포트를 칭찬했다.
그녀들의 말처럼 근방의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은 온통 예찬을 포함한 츄마프 연습생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혼신의 역작이라 부를 만한 사진을 엄선해 준비한 굿즈들을 나누어주자 팬들은 다시 한번 요란스럽게 기뻐했다.
박모 씨는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크, 역시 좋단 말이야, 이 현장감!’
소규모로 진행되었던 이전 경연들과 달리 만 명 단위의 관객이 들어가는 공연이다 보니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게릴라 콘서트도 관객이 많긴 했는데 그거랑은 또 다르다고. 데뷔 후에도 오래오래 콘서트 해 주면 좋겠다! 해외 투어…… 도 애들 돈 벌어야 하니 해야 하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예찬이 데뷔에 실패할 리는 없기에 팬들은 자연스레 데뷔 후의 일을 상상하게 됐다.
SNS에서 활발하게 열리고 있는 각종 이벤트도 예찬의 ‘데뷔’가 아닌 ‘순위’를 가지고 진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 2X0415 츄맢 생방에서 예찬이가 1위로 데뷔하면 투표 인증해 주신 분 중 추첨을 통해 몰디브 왕복 항공권+풀빌라 숙박권을 드립니다. 2번 하예찬 잊지 말아 주세요!
– 하예찬 1등 길만 걷자! 츄마프 99 하예찬 투표 인증하고 치킨 먹자! 치킨 포함 무려 3333개의 선물이 쏟아진다!
– 예찬이가 오늘 1등 왕자님이 되면 세 분께 키위패드 프로 쏩니다! 문자 투표 인증 필수♡
박모 씨는 그 뒤로도 줄줄이 이어지는 SNS의 이벤트들을 한번 쭉 살펴보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단 말이야.’
* * *
같은 시각, 생방송 준비가 한창이어야 할 잠실 실내 체육관 안은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흉흉한 분위기였다.
“이게 무슨 행패냐고요.”
“아니 신 PD, 행패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
“그럼 행패가 아니면 뭡니까? 협박? 하……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목소리를 높이던 메인 PD는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눈앞의 상대를 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일까?”
“글쎄요.”
스태프들의 표정이 어두운 게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연습생들은 불편한 얼굴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변수가 생긴 거면 곤란한데.’
예찬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메인 PD가 갔을 법한 장소를 찾았다.
잠실 실내 체육관에는 리스피릿 시절 공연을 하기 위해 몇 번이고 오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 이 근처에 화장실도 있으니 들켜도 문제없지. 오, 여기군.’
라커룸 문밖으로 메인 PD의 격양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예찬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고 문 가까이에 섰다.
“이봐요, 김 선배. 이 프로그램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알아요?”
“알지, 임마. 그러니까 급하게 찾아온 거 아니야. 너 이대로 마무리했다가 진짜 옷 벗어야 한다니까?”
“허, 선배. 지금 우리 시청률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요? 광고랑 스폰서는? 하긴 아주 잘 아니까 이렇게 날강도 짓을 하려고 하겠지.”
“야, 그러게 적당히 나댔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부정 투표 때문에 인터넷이 시끌시끌했는데 출연진 간수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애 팔을 부러트려 놓냐? 그리고 너, 초반에 몇몇 기획사에 소스도 좀 흘렸다며. 오늘 생방송 끝나면 다 잊히고 끝일 거 같지? 절대 그렇게 안 된다.”
김 선배라고 불린 남자가 호통을 치자 메인 PD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한 번 숙이고 들어가라고. 국장님 조카한테 메인 PD 직함만 넘기면 된다니까? 일은 그냥 지금까지랑 똑같이 하면 돼. 걔는 정말로 이따 와서 구경만 할 거야.”
“부정 투표? 안 그래도 이슈 돼서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시스템상 문제 없다고 뜨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게 왜 제 책임이내고요!”
“어쨌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떠들잖아! 네가 이 프로그램 메인 PD고!”
메인 PD자리만 넘기면 책임 소재도 흐지부지되고 자잘한 문제는 국장 선에서 해결해 줄 거라며 김 선배가 메인 PD를 설득했다.
‘프로그램이 떠도 너무 떠서 위쪽 분들이 실적 채가기를 하고 싶어졌군.’
N-net 국장의 조카인 PD라면 예찬도 몇 번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일을 더럽게 못 하지만 성격은 호쾌한 남자였다.
김 선배의 말대로 느지막이 현장에 도착해 고개나 끄덕거릴 위인이었다.
“……진짜 선배도 국장님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침묵을 지키던 메인 PD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가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면 이런 제안을 쑤셔 볼 틈이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은 죄가 참 크고도 깊었다.
‘흠. 지금 와서 메인 PD가 바뀌면…….’
예찬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진행은 그대로 저 PD가 맡을 테니 문제 될 건 없겠군.’
예찬은 상쾌한 얼굴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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