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9)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8화
‘그래, 더 당황해라.’
예찬이 산책 중에 동네 이웃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들어오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트레이너들과 심사 위원들이었다.
– 저희를 보고 놀란 연습생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막상 하예찬 연습생이 너무 느긋하게 인사하니까 이거 혹시 내 깜짝 카메라인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하하.
훗날 인터뷰에서 유피테르의 이가원은 아련한 눈으로 이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시작할까요?”
부스 안에 준비된 마이크를 집어 든 예찬이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는 심사 위원을 향해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트레이너가 헛기침했다.
“흠흠, 그으래요.”
익숙한 반주가 스피커를 통해 흐르기 시작했다.
예찬은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오르는 긴장을 굳이 풀지 않고 즐기기로 했다.
“Choose your prince. 네가 선택하는 세계, 그 끝에 내가 있기를.”
수만 번은 부르고 추었을 노래를 예찬은 편안하게 소화했다.
어려운 안무도, 급격히 높아지는 파트도, 물이 당연히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기자 예찬을 뜯어 보던 심사 위원들의 표정에 점차 감탄이 어렸다.
“Choose me princess. 네가 선택한 세계, 그 끝에 내가 있어.”
약 4분여의 노래가 예찬의 윙크로 끝나자 심사 위원석에 앉아 있던 익숙한 빨간 머리 청년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힘차게 손뼉을 쳤다.
“가원이가 노래를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네요. 여기 이렇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데 안 놀랐어요?”
이가원과 같은 유피테르 멤버인 주태현이 온몸으로 호감을 내뿜으며 선 채로 물었다.
“놀랐습니다.”
예찬은 뻔뻔해 보일 정도로 덤덤한 얼굴을 하고 정중히 답했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요?”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목소리로 끼어든 것은 이 무렵 최고의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계정엽이었다.
계정엽 쪽으로 몸을 돌린 예찬은 이번에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얼굴에 티가 잘 안 나는 성격이라서요.”
‘그 수준이 아닌데?’
심사 위원 중 반 정도가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나머지 반은 주태현처럼 눈을 반짝이며 예찬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앞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찬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을 하고 눈만 깜빡였다.
‘됐다!’
물론 속으로는 계획대로 흘러가는 지금 상황에 안심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에 선택지 창이 던져 준 이상한 멘트들 때문에 멀쩡한 놈처럼 보이긴 글렀다.
무엇보다 어찌어찌 지금까지의 발언을 수습한다 해도 빌어먹을 선택창이 또 언제 튀어나와 산통을 깰지 모르는 상황.
차라리 이랬다가 저랬다가 도통 알 수 없는 놈이 되어서 어떤 소리를 지껄여도 ‘그래, 너는 원래 좀 또라이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그 또라이가 어느 순간부터 눈에 보이면 반갑고,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나고, 자기 전에 떠오르고, 꿈에도 한 번 출현하고, 또라이 짓을 안 하면 아쉽고……뭐 그렇게 마음에 스며드는 것 아니겠는가.
일명 또며들기.
그것이 예찬의 노림수였다.
“흠, 그렇다고 해 둡시다.”
계정엽이 어딘가 찜찜한 듯 말을 마치자 자신들의 페이스를 찾은 심사 위원들이 너도나도 호평을 늘어놓았다.
“하예찬 연습생, 노래도 대단하지만 춤도 능숙하네요. 지난번보다 많이 늘었어요.”
“본인이 무대에서 어떻게 해야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연습생이에요.”
특히 츄마프의 트레이너들보다 외부에서 충원해 온 심사 위원들이 예찬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예찬은 새삼스레 심사 위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연습생들의 얼굴과 실력이 츄마프가 성공하는데 가장 큰 축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첫 방송 전 유출된, ‘대체 그 라인업을 어떻게 모은 거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려한 중간 테스트 심사 위원 명단도 초기 관심 몰이에 톡톡히 이바지했다.
아이돌 3대 기획사 중 제일로 꼽히는 올림포스에서는 트레이너로 이가원을 내보내더니 이번 심사 위원에는 주태현까지 얹어 주었다.
나머지 두 기획사는 아예 사장이 직접 와서 앉아 있었다.
그밖에도 유명 작곡가나 작사가, 안무가들과 여러 아이돌 기획사의 높으신 분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기획사 쪽 관계자들은 아무래도 예찬이 개인 연습생이라는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보통 이런 프로그램에서 개인 연습생은 별로 뜨질 못하거든.’
데뷔 조에 기껏해야 한둘 정도 이름을 올리니 여기서 미끄러지면 잘 꼬드겨서 데려가려고 밑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뻔히 보이는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예찬은 고개만 꾸벅꾸벅 숙였다.
‘근데 이 라인업을 안 건드렸네.’
예찬은 리셋 3회 차와 4차 때는 이 심사진이 성사되지 않도록 미리 선수를 쳐 두었다.
5차 리셋부터는 이런 자잘한 곳까지 손을 대지 않아도 다른 몇 가지를 크게 터트려 츄마프 99를 충분히 묻어 버릴 수 있으니 그냥 내버려 뒀지만.
‘나야 츄마프 말고도 할 일이 태산이니 바빠서 못 건드린 거지만 정찬양은 왜 내버려 둔 거지? 어차피 내가 밟은 길만 걷고 있는 거 같던데.’
이제야 리셋창을 벗어나 인간의 삶을 사는 주제에 게으름을 피운 것인지, 아니면 예찬이 마지막으로 했던 선택을 무조건 따라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찬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호재였다.
‘이왕이면 후자면 좋겠군.’
“아무튼 고생했어요. 결과는 모든 연습생의 도전을 다 보고 발표할 테니 예찬 연습생은 방에 가서 쉬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예찬은 정중하게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예의가 바른 건 아이돌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본 소양이었다.
우리나라 정서상 또라이도 예의 바른 또라이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예찬은 스태프에게 숙소의 여벌 키를 건네받고 안내받은 대로 다른 연습생들과 마주치지 않게 건물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이걸로 첫 합숙의 가장 큰 반환점을 무사히 돌았다.
첫날과 달리 예상대로 프로그램이 흘러가자 이제야 리듬이 맞는 기분이었다.
S등급이야 당연히 유지할 것이고 남은 것은 주제곡 센터 자리였다.
센터는 2차 등급 테스트의 심사 위원들이 모든 연습생의 평가를 마치고 결정했다.
리셋 전에는 심상록이었고 예찬이 프로그램을 건들기 시작한 후에도 한두 번 빼고는 심상록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초반 화제성 면에서 제일 적합한 연습생이니 그럴만 했다.
예찬은 매번 심상록을 끼워 넣던 츄마프 99의 티저들을 떠올렸다.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는 생각해 봐야 소용없지.’
애초에 주제곡 센터 자리는 예찬의 계획해 둔 목표에 없었기 때문에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일 뿐이었다.
예찬은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방을 나섰다.
이렇게 빨리 누군가 돌아올 줄 몰랐던 모양인지 숙소 건물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혼자 전세라도 낸 것처럼 샤워실에서 느긋하게 씻고 나온 예찬은 탈의실에 붙어 있는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고작 몇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해서 그런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예찬은 거뭇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칠칠치 못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니, 이전의 예찬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준다.
생방송 무대 직전에 맹장이 터져도, 같은 그룹 멤버가 마약 스캔들로 콘서트장에서 긴급 체포를 당해도, 투어 도중 회사가 투자 사기를 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와도 예찬은 태연하게 웃으며 무대에 올랐다.
그것이 예찬이 생각하는 아이돌이었다.
물 아래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발버둥을 쳐도 물 위에서는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처럼 오롯이 정상에서 빛나는 우상.
실제로 올림포스의 아이돌들이나 리스피릿은 그런 고고한 존재로서 팬층의 호감을 샀고 명실상부 1군 아이돌이 되었다.
그러나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참가자에게 바라는 것은 좀 달랐다.
이 연습생이 왜 아이돌이 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아이돌이 되고 싶은지, 지금 나오는 무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혹은 연습생으로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는지에 주목했다.
실력과 외모가 받쳐 주면 어느 정도 높은 순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어떠한 ‘서사’ 없이는 1등의 자리에 앉기 힘들었다.
시청자들은 연습생들이 그들의 간절함을 증명하길 바랐고, 그들의 간절함에 순위를 매겨 줄을 세웠다.
예찬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마음에 어떻게 점수를 매기는 건지도 모르겠고……. 간절하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해서 실력을 갖출 테니 그걸로 판단하는 게 심플하고 좋잖아.’
이 업계에는 자신을 포장하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 많았다.
카메라 앞에서와 뒤에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환멸이 날 정도로 겪은 예찬에게 말은 아무런 증명이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예찬은 자신이 얼마나 아이돌이란 직업에 진심인지 행동으로 증명했고, 그러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츄마프에서 연습생을 아이돌로 발탁하는 것은 예찬이 아니라 시청자들이었고 가장 높은 왕좌에 앉기 위해서는 그들의 바람에 맞춰야 했다.
긴 연습에 지쳐 초췌해진 미형의 얼굴은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였기에 예찬은 굳이 다크서클을 화장으로 가리지 않았다.
‘피디 놈이 밤새 연습한 걸 내보내지도 않는 게 아쉽군.’
복도와 방에 설치된 고정 카메라를 의식한 예찬은 철저한 계산하에 부스스하게 말린 머리를 하고 수건을 목에 걸친 채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부터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다 주제곡 촬영을 할 테니 이 틈에 좀 자 둘 생각이었다.
아직 해가 중천이니 적어도 룸메이트들이 돌아올 저녁까지 푹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 예찬은 딱딱한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예찬이 눈을 감으려던 순간, 눈앞이 반짝였다.
[연계 퀘스트 발생!>― 주제곡 등급 테스트에서 강해솔이 S등급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세요!
(남은 기간 8시간 11분)
이걸 띄울 거면 침대에 올라오기 전에 띄우든가.
예찬은 천장에 둥둥 떠다니는 홀로그램 창을 짜증스럽게 노려보다 몸을 일으켰다.
이미 숙소에 돌아온 예찬이 뭘 할 수 있다고 이런 미션을 주는 건지.
지금 다른 연습생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스마트폰을 자연스럽게 주워 든 예찬은 다시 카메라가 없는 샤워실로 향했다.
문을 닫아 복도 카메라에 자기가 찍히는 것을 원천 봉쇄한 예찬은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작 새벽에 한 번 연습을 같이한 사이에 뭐라고 말을 해서 강해솔을 S등급으로 끌어올릴까.
고심 끝에 연락처 앱을 켜고 강해솔의 이름을 찾아 문자창을 띄운 예찬은 돌연 떠올렸다.
[해솔이 형 010-XXXX-XXXX]리셋하자마자 핸드폰에 저장했던 열한 자리의 번호.
이 번호는 예찬이 멋대로 과거의 기억에서 떠올려 저장해 둔 번호일 뿐 현실의 예찬은 아직 강해솔과 번호를 교환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