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Just an Ordinary Office Worker RAW novel - Chapter (149)
평범한 회사원입니다-149화(149/180)
< 149화 >
황성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레이첼은 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푸르른 하늘. 눈 부신 햇살.
그리고 그 아래에 반짝이고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자랑하는 멋지고 찬란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고귀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렇고 저렇고 요렇고 그런 이안 님.
먼발치에서라도 이안 님을 볼 수만 있다면 평생 채식만 해야 한다 해도 좋아.
“그 감정은… 그냥 착각일 뿐이야. 문서로만 접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좋을 거 같아? 환상이 깨질 뿐이라고!”
“응. 울지 말고 말해보렴, 동생아.”
아버지만 초대받은 연회에 함께 가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가.
둘 중 하나만 데려갈 수 있단 말에 쌍둥이 남동생과 검술 대련까지 해야 했다.
남동생은 레이첼에게 목검으로 두들겨 맞아 생긴 멍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출발 당일까지 쫓아와 사람을 귀찮게 했다.
“이안 님은 이번 연회에 오지 않으실 거야! 분명 다음 연회…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황성을 방문해주실 거라고!”
“그래. 너도 이안 님을 만나볼 수 있을 거야. 아마 다음 생쯤에?”
귀족이라고는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진상을 부리기 시작한 동생을 버려두고 온 황성이다.
황제 폐하?
다른 귀족들과의 인맥?
사교계에 갓 데뷔한 또래의 귀족가 영애, 영식과의 친분?
다 필요 없다.
오로지 이안 님.
이안 님을 만나는 것만이 레이첼에게는 사명이자 전부였다.
그리고 황성에 도착한 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저, 저저, 저기 저분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남자였다.
“이안 님?”
설마 벌써?
이렇게 운명처럼?
황성에 들어선 지 오 분도 안 되었는데 이안 님께서 눈앞에?
역시 간절히 바라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군요!
감격에 젖어있는 레이철과 검은 머리의 남자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바로 레이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왜, 왜 이쪽으로 오시는 거지? 내가 너무 쳐다봤나. 아니면 무슨 실수라도…? 그게 아니라면… 설마 이안 님을 향한 나의 뜨거운 열정을 알아보신 건가!’
이 모든 예상을 깔끔하게 박살 내고,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레이첼이 상상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방으로 안내해드릴까요? 궁금하시거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아. 네.”
길거리에서나 볼 법한 호객행위에 정신이 혼미해진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뭐야, 이 남자.
“필요하신 걸 말씀해보세요.”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해보시라니까요.”
“그럼 질문 좀 할게요. 혹시 이아,”
“질문하고 싶으신 거면 ‘이것에 대한 답변을 가져오라.’고 정확하게 명령을 내려주시겠어요?”
미친놈이다.
이건 그냥 미친놈이야.
말하는 거뿐 아니라 하는 행동도 미친놈 같다.
허공을 눌러대질 않나.
빨리 명령을 내려달라고 재촉하지 않나.
레이첼이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자, 남자는 다른 귀족에게로 가버렸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황성의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믿을법한 외형의 남자가.
검을 드는 대신 온갖 귀족들의 코트를 받아 들고 심부름을 하러 뛰어다녔다.
“……”
레이첼은 말문이 막혔다.
“레이첼. 조금 늦었구나.”
“아버지!”
레이첼은 자신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아버지께 달려갔다.
“아버지, 여기 이안 님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남자가 있어요. 하지만…”
“걱정 마라, 레이첼. 그분은 이안 님이 아니란다.”
“역시 그랬군요. 다행이다.”
아까 그 사람이 이안 님이었다면 레이첼은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베라포드에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이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느냐?”
“이안 님과 같은 곳에서 왔다고 알려진 그 사람들이요?”
“그래. 황제 폐하께선 그들을 황성에 들이신 모양이다.”
레이첼은 안도했다.
방금 본, 예의범절이라고는 밥 말아 먹은 그 남자도 그냥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중 하나일 뿐이구나.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이안 님을 위해 동향 사람들을 성에 고용한 것일지도 몰라!
그렇다는 건! 이안 님께서! 오시는 게 확정이라는 뜻?
레이첼은 기대감에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레이첼이 봤다는 그 남자는, 귀족 NPC들이 주는 서브 퀘스트 보상에 미쳐 날뛰고 있는 덩치였다.
레이첼은 도서관을 가는 길에 두 번째 검은 머리의 남자를 만났다.
이번에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저 사람도 황제 폐하께서 고용한 이들 중 하나겠지.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부집사.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
‘처음 봤던 검은 머리의 하인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이네.’
레이첼은 얼떨결에 정답을 맞혔다.
남자는 집사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례한 면이 있었지만. 이방인들 대부분이 그런 편이기는 했다.
그래도 이안 님과 같은 세상의 사람이라는데!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부집사와 함께 모르는 장소로 이동된 것까지는 괜찮았다.
충분히 놀랄 일이기는 했지만, 레이첼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녀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이안 님이 연회에 도착하시기 전까지 황성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이었다.
“연회 전까지 나가려면 지금이라도 발 빨리 움직여야 해요!”
“예에.”
떨떠름한 표정의 부집사를 뒤로하고 레이첼은 먼저 나섰다.
“이곳이 어디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봤자 라 엘타 안. 성을 찾아보죠.”
당차게 걸어가던 레이첼은, 마침 딱 알맞은 길이와 두께의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을 주워들자 부집사가 질문을 던졌다.
“쓰레기는 왜 줍고 그러세요.”
“쓰레기라뇨? 이것은 검이에요, 검.”
인간의 표정이 그렇게까지 썩어들어가는 것은 생전 처음 보았다.
“검이요?”
“제 이름은 아시면서 제 소문은 못 들어보셨나요?”
“못 들어봤는데요.”
“그렇다면 기억해주세요. 레이첼 베렌은 뛰어난 검사라는 걸.”
언젠가 이안 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미친 듯이 노력해온 지난날들.
이안 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들은 후로는 이전보다도 더 수련에 열중했다.
그분께서 전처럼 몬스터 퇴치를 위해 길을 떠나면, 동료로서 그 곁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만큼이나 실력을 키워왔다.
물론 동료 같은 건 안 만드는 사람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알게 뭐람.
혹시 알아? 이쪽에서 따라다니다 보면 은근슬쩍 동료 같은 게 되어있을지.
“그건 그렇다 치고. 제가 궁금한 건 왜 나뭇가지를 검이라고 우기고 있냐는 건데요.”
“집사님은 별로 아시는 게 없으시군요! 그건 바로.”
“바로?”
“이안 님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죠.”
안 그래도 썩어있던 부집사의 표정이 더 썩어갔다.
“이안 님은 검이 부러지면 검집이나 부러진 검, 심지어는 나뭇가지만을 들고 수십, 수백의 적을 무찌르셨다고 해요.”
“예에…”
부집사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있던 얼굴이 더 구겨질 수도 있구나.
신기하다.
믿지 않는 건가?
하긴. 믿을 수 없겠지. 그분의 업적은 그 누가 들어도 믿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니까!
“위대한 검사는 검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기억해주세요.”
***
그래, 위대한 검사는 검을 들고 싸우든 붓을 들고 싸우든 문제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상식적으로 철로 사람을 내리치는 것과 툭 하면 톡 부러지는 나뭇가지로 사람을 내리치는 게 어떻게 같겠냐마는. 이안이나 이성한 정도 되면 할 수 있겠지. 근데 넌 위대한 검사가 아니잖아. 이안도 아니고 이성한도 아니잖아! 그 나뭇가지 내려놓고 그냥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할 말은 많았지만, 그저 미소만 지어줄 뿐이었다.
내가 잘못했네.
내가 왜 그때 나뭇가지를 들고 설쳐서. 괜한 사람들 허파에 바람이나 넣어주고.
그게 기록으로 남겨져서 남들이 읽어볼 줄은 몰랐지.
그런데 상식적으로 나는 나뭇가지 들고 설칠 만하니까 그러지 않았을까?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검술 실력이 어떻고 간에 그쪽이 나뭇가지 하나로 나를 지켜주겠다고 하는 건 좀, 너무, 멀리 간 거 아닐까?
나뭇가지를 신나게 휘두르며 새 검을 길들이겠다고 설치는 새싹을 보다 보니 멘탈이 가출을 할 뻔했다.
일단 퀘스트를 깨고 나가기나 하자.
이 공간으로 이동됐던 방식이, 퀘스트 보드에서 퀘스트 수락을 하고 이동했을 때랑 똑같은 방식이었어.
새싹이 말대로 아마 이곳은 라 엘타의 어딘가일 확률이 높다.
길 찾는 거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그리고 반나절이 지났다.
“아무것도 없어!”
여기는 라 엘타가 아니다.
라 엘타라면 분명 뭔가가 나타나도 진작 나타났어야 했는데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이니까!
반나절씩이나 멈추지 않고 걸었는데!
마계도 아니라는 건 확실해.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몬스터도 안 보이고 사람도 안 보인다.
진심,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여긴 어디냐고!
“연회 시작까지 하루하고 반나절이 남았네요. 그 전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옆에서 카운트 다운하지 마, 새싹. 정신 사나워.
그리고 그 나무 막대기 좀 어디 갖다 버려.
“무작정 걷는 데는 한계가 있을 거 같아요. 마을이라도 있으면 말이라도 구해볼 텐데…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퀘스트 용 공간 같은 게 아닐까.
사실 알고 보니 던전 안이라거나.
모르겠다.
퀘스트 내용을 알면 뭐라도 감이 잡힐 거 같기는 한데…
퀘스트 창이 생성되다 말았단 말이지.
고대어로 적혀 있어서 어차피 못 읽겠지만.
그래도 있는 거랑 없는 거랑은 차이가 난다.
퀘스트 창이 전부 생성 완료되면 라 엘타 공용어로 바뀔 수도 있는 거고.
아. 고대어 통역기, 라마를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덩치는 기껏 그 지옥에서 탈출시켜줬더니 혼자 서브 퀘스트 받는다고 이리저리 놀러만 다니고.
고대어도 못 읽고.
도움도 안 되고.
퀘스트 창, 퀘스트 창.
퀘스트 창이라.
분명 책을 펼쳤을 때 퀘스트 창의 일부가 나타났다.
그럼 책을 끝까지 읽거나 일정량 이상 읽으면 완성된 퀘스트 창이 생성되려나?
“레이첼 씨. 책 좀 줘보세요.”
“책이요?”
“네, 책이요.”
“무슨 책을 말씀하시는지요?”
“책 말입니다. 그 책. 도서관에서 보고 있었던 책.”
“그 책은 제가 집사님께 드렸는데요?”
“무슨 말을. 나는 못 받…”
지금 생각해보니 넘겨주긴 했네.
근데 나한테 없는데?
설마 그 책은 도서관에 남겨진 건가?
그걸 다시 보면 완성된 퀘스트 창을 못 받더라도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지금 퀘스트 창도 없고 책도 없고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거잖아!
지금 이 퀘스트를 플레이어더러 깨라고 만들어둔 거냐?
양심이 있으면 대답해봐라, 시스템아!
“앗! 집사님, 집사님!”
“뭡니까.”
“저기요, 저기! 사람! 사람이 있어요!”
“반나절 동안 걸어 다녔는데 없었던 사람이 여기 있…?”
…네.
사람이 여기 있네!
심지어 두 명!
새싹이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힘차게 달려갔다.
기다려, 그렇게 뛰어가다간 저 사람들이 위협받는다고 생각……
…하진 않겠지.
누가 나뭇가지 들고 신나서 달려오는 새싹이를 보고 겁을 먹겠냐.
애들한테도 무시당할걸?
새싹을 따라 두 사람에게 다가갔…
두, 사람?
분명 뒷모습은 둘 다 사람인데 말이야.
오른쪽에 있는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렸네?
“집사님 큰일이에요.”
“그러게요. 저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렸어요. 아, 뿔이 달렸으니까 사람이 아닌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그럼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이분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건 또 무슨…”
타이밍 좋게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
“^&*@%?”
어?
“그쵸? 집사님도 못 이해하시겠죠?”
“예. 전혀 못 이해하겠네요.”
왜냐면 저건.
“&^%*#? %$@.”
고대어니까.
여기 대체 어디야?
< 14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