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Evil Wife of a Young Husband RAW novel - Chapter (180)
아기 남편의 흑막 아내입니다 (180)화(180/180)
무슨 일이지?
키브린의 시선은 손에 쥔 편지에 고정된 채였다.
내가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며 다가가자 키브린은 말없이 편지를 보여 주었다.
잉크가 아닌 독특한 물빛의 이능이 문자를 그려 내고 있었다.
보낸 이는 내 정령 아빠였다.
휘하의 정령들을 통해 모르페우스 영지가 안정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그만 나를 보금자리로 데려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돌려보내 주겠다면서 말이다.
아빠는 사람들이 많은 영지를 불편해하는 데다가 수시로 나를 찾았으므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혼자서 공간 이동을 할 줄 알았다. 여기서 보금자리가 얼마나 멀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걸 키브린도 잘 아는데?
나는 고개를 기울인 채 뒷장도 확인했다.
너는 오지 마, 라는 문장이 있었다.
“…….”
키브린한테 저랑 겨울 내내 떨어져 있으라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는데요!
“……체리아 님.”
키브린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살짝 붉어진 눈가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연기란 걸 아는데도 내 남편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었다.
“키브린 혼자 두고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인가요? 아르카나가 원하지 않는데도?”
키브린의 두 팔이 기다렸다는 듯 내 어깨를 감쌌다.
저기, 눈만 슬퍼하지 입술이 웃고 있잖아요.
나는 아빠가 키브린을 싫어하는 이유를 떠올려 봤다.
단순히 키브린이 내 남편이라서……는 아빠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니까 해결 방법이 없고.
정령들 때문일까?
작은 정령들은 아빠와 다르게 정신연령이 어렸다. 감정에 솔직했고, 나를 졸졸 따라다녀서 좀처럼 키브린과 둘만 있기 힘들었다.
그 훼방이 키브린의 마음에 들었을 리 없었다.
“으음, 키브린이 지금보다 정령들을 부드럽게 대하면 아빠도 마음이 바뀔 거예요.”
“이미 체리아 님이 충분히 잘해 주고 계시잖아요. 저는 그때마다 혼자 남아서 마냥 기다리고.”
역시나 시큰둥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달빛의 색을 가진 속눈썹이 길게 내리깔렸다.
나를 품에 가두는 행동도, 이 목소리와 눈빛도 전부 계산적이었다.
“사실 아빠랑 사이 나쁜 거, 하나도 안 속상한데 속상한 척하는 거죠?”
“그래도 속아주실 거잖아요. 저를 사랑하시니까.”
홀릴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하여간 뻔뻔하다니까.
“네. 키브린을 제일 사랑해요. 지금은 조금 얄밉지만.”
그가 코끝으로 웃고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은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어떻게 해야 체리아 님께 미움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음…….”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요구를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속내를 눈치챈 키브린이 입술을 움직였다.
“빨리 대답해 주셔야 할 텐데.”
미끄러지며 내려온 입술이 코에 닿았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서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시간 지났어요.”
내 입술에 키브린의 입술이 포개졌다.
포기를 요구하는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이, 이제 안 얄미워요!”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소리쳤다.
키브린은 그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주무실 시간이에요.”
“네에. 방금 전까지 숨 막히는 키스를 했는데 잠이 아주 잘 오겠어요.”
나는 투덜대면서도 침대에 누웠다.
키브린이 선심 쓰듯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마지못해 잡았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기분이 금방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현실도 충분히 행복해서 꿈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하면 어떡하죠?”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데 키브린이 흘러내린 보라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체리아 님이 헷갈리기 전에 제가 깨워드릴게요. 그런데 방법은 상관없어요?”
“……저 그냥 제 방에서 잘게요!”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시부모님께 보금자리로 간다는 편지를 보냈다.
가서도 영지 관련 업무를 계속 처리할 예정이고, 시부모님도 문을 이용해서 만나러 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두 분께 사소한 소식이라도 들려 드리는 건 어느새 내 일과가 되어 버렸다.
편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보라색 구체한테 편지를 물려서 이동시키면 곧바로 윈터의 책상에 놓아 두었으니까.
역시 내 이능은 똑똑하단 말이야.
지난날 구박했던 건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는 뿌듯해했다.
그리고 한숨 더 자려는데 언니한테 통신석으로 연락이 왔다.
응? 급한 일인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받았더니 언니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있잖아, 내가 오해했던 거 있지? 그날 아그라베인은 마물들의 습격을 받을 뻔했던 마을 사람들을 돕느라 데이트 약속 시간을 어겼던 거였어. 은근히 사려 깊다니까?]나 아직 인사도 안 했는데.
애초에 그런 속사정이 궁금하지도 않았어!
[그래서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어. 뭘 입고 갈지 벌써부터 고민…… 동생? 왜 대답이 없어? 동생?]그냥 잠이나 마저 잘 걸 그랬어.
벌써부터 처제 소리에 이골이 난 나한테는 마냥 기뻐하기 힘든 소식이었다.
나는 세모꼴이 된 눈으로 통신을 종료했다.
으윽, 졸려.
밤새도록 키브린이랑 떠들었더니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갔다.
하품을 하며 나가던 나는 막 성 안으로 들어오는 백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다.
갑자기 잠이 달아나고 눈이 번쩍 떠졌다.
“엄마!”
나는 우다다 달려가서 안겼다.
“어쩐 일이에요? 저 보고 싶어서 왔어요?”
“후후,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구나. 난 우리 딸이 보고 싶어서 혼났는데.”
엄마가 나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엄마의 입가에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 생물학적 친모인 레일라 메이올이 감옥에서 독약을 마셨을 때, 엄마는 무척 화를 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도망치려 하다니. 너에게 사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저렇게 날려 버릴 줄이야.
내가 레일라의 면회 요청을 거절했을 때 엄마는 편지라도 쓸 거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레일라는 간수를 포섭하여 독약을 구했고, 제 과오로 점철된 현실에서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절대로 저 여자를 네 엄마라고 생각하지 말렴. 그리 부르지도 말아야 할 게야.
나보다 분노하고 나보다 슬퍼하는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저절로 입술이 열렸다.
―제 엄마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단 한 사람뿐이에요.
나는 가족끼리 있을 때나 둘만 있는 상황에서는 윈터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무척이나 기뻐했기 때문에 진작 부르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난입해서 엄마로부터 나를 빼앗아갔다.
“나도 왔어. 나한테도 관심 가져 줘.”
메넬리크 아빠였다.
키브린과 똑같은 은발이지만 내 눈은 세모꼴이 되었다.
“……네, 아빠. 오셨어요.”
“너무 눈에 띄게 차별하는 거 아니야?”
아빠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체념한 나는 몸에서 힘을 뺐다.
가족들이 다 장신이라서 안겨 다니는 것도, 들려 다니는 것도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윈터가 아직 여기저기 뻗친 구석이 남아 있는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오늘 날씨가 비교적 따듯한 것 같길래, 이대로 보금자리에 보내기 아쉬워서 왔어.”
나는 눈을 댕그랗게 떴다.
“벌써 편지를 읽으셨어요?”
“딸이 보낸 편지인데 당연히 바로 읽어야지? 게다가 키브린이 너는 아닌 척해도 외로움을 잘 타니까 자주 찾아오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으응?
자주 찾아오라고 당부했다고?
내 반응에 아빠가 피식하고 웃었다.
“신기하지? 모르페우스 영지에 자리도 잡았겠다, 찾아와서 방해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역시 키브린도 우리가 좋은 거야. 너를 핑계 삼아서 우리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싶은 거지.”
“……입구에서 그렇게 떠들면 다 들려요. 그리고 마지막 말에는 동의 못 하겠는데.”
키브린이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전에 처리해야 할 일감을 챙긴 로즈와 체셔도 함께였다.
진작 기척을 느낀 아빠가 나를 내려 주었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뭘.”
예전 같았으면 계속 부정했을 키브린이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반면에 나는 활짝 웃었다.
예전에 키브린은 나만 곁에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키브린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갈라놓는 불청객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내 가족이었고, 키브린의 가족이었다.
우리가 조금 먼 길을, 아주 천천히 돌아오긴 했지만 그 당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불변이었다.
그렇기에 두 분은 언제까지나 키브린을 기다려 줄 수 있었다.
내 또 다른 아빠가 기약 없이 나를 기다려 준 것처럼.
지금도 보금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맞아요. 엄마랑 아빠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싶으니까 자주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배시시 웃었다.
특별할 것 없는 행복한 하루였다.
<아기 남편의 흑막 아내입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