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
1화
시작은 여타 빙의물의 첫머리와 다를 바 없었다.
환생 트럭이 아니라 술 취한 어느 미친놈이 운전하는 시커먼 자가용에 치여 죽었다는 점만 다를 뿐.
어두운 밤길에 집에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
두 시간 전까지 읽고 있었던 소설에 빙의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눈감기 전에 힐링 육아물이나 달달한 로코의 여주인공으로 빙의하게 해 달라고 빌기라도 할 걸 그랬지.
하기야, 소원을 빌었어도 원대로 이루어졌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악녀라거나, 등장하자마자 끔살당하는 조연이 아닌 게 어디야.’
나는 무척 다행스럽게도 원작에서 이름도 나오지 않는 평민 n으로 환생했다. 주인공들과는 평생 가도 옷깃 한 번 스칠 일 없을, 평범한 배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새롭게 시작된 카티샤 아인슬리의 삶에 이럭저럭 만족하는 편이었다. 전생에서 가난에 찌들어 살았던 내겐 지금 이 삶도 감지덕지였다.
고아의 몸이지만 뭐, 부모 역할도 못 하는 부모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돌봐 줄 사람과 이 한 몸 누일 집, 배곯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기 마련이다.
‘아마도 오늘이 지나면 그 세 가지 다 없어질 것 같지만.’
깨끗하게 빤 수건을 힘껏 비틀어 짰다. 그러나 수건에서는 여전히 덜 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우, 팔이야…….”
역시 누군가를 간호하기에 열 살 여자애의 몸은 너무 어리다. 키도 작고, 악력도 약하고. 체력도 형편없다.
나는 네모나게 접은 수건을 쥐고 조심조심 침대로 올라갔다.
휑뎅그렁한 침대에는 죽어 가는 노인이 누워 있었다. 내가 위층에 세 들어 사는 이 3층짜리 집의 주인 할아버지다.
최첨단 의료 기기가 없는 세계니 할아버지께 남은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 새벽을 넘기지 못하실 것이다. 몇 달간 가까이서 간호해 온 사람만의 직감이었다.
솔직히 일흔도 안 된 나이면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노환으로 돌아가실 나이까진 아닌데…….
‘헤르젠 할아버지가 정말로 돌아가시면 어쩌지?’
생각만 해도 설움이 울컥하고 앞이 깜깜했다.
내가 카티샤 아인슬리로 태어나 전생의 기억과 지적 능력을 되찾은 시점은 5년 전, 막 다섯 살을 넘겼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이미 헤르젠 할아버지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겨우 상황 파악을 마쳐 보니, 아마 애를 기를 형편이 안 되었던 여자가 재산이 많다고 소문난 헤르젠 할아버지네 집 앞에 갓난아이인 나를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꼬장꼬장하고 풍채 좋은 헤르젠 할아버지는 온갖 불평은 다 하면서도 나를 거둬 키웠다. 그 깐깐하고 예민하신 성정에, 생면부지의 갓난애를 똥 기저귀 갈아 가며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내가 제법 자란 뒤부터는 2층에 따로 방을 내주고, 월세는 매일매일 1층으로 내려와 할아버지의 말 상대를 하고 집을 청소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청소 깨끗이 하라며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잔소리하실 때마다 이거 아동 착취라며 빽빽대긴 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를 이 나이까지 키워 준 은인이고 부모였다.
‘몇 달 전부터 원인 모를 병환을 앓기 전까지는 나를 옆구리에 덜렁 끼고 등산까지 하실 정도로 강골이셨는데.’
죽음은 이렇게도 갑자기 닥쳐오는 모양이다.
“아가……?”
내가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목을 바지런히 닦고 차가운 손발을 주무르는데, 실낱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나는 당장 고개를 들었다. 잠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괜찮으세요? 좀 어떻……”
“내가 시킨 건 다 했냐……?”
이틀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시는 말씀이 심부름 확인이라니.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 주신 주소로 잘 부치고 왔어요. 무사히 도착했을 거예요, 편지.”
말로는 유언장이라고 했다. 수도에 있는 자식과 손주들에게 보낸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편지를 부친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됐는데 가족이란 놈들은 대체 누군지 답신 한 장이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위중하다는데 어떻게 한 명도 오지 않을 수가!
“내 마지막 순간에…… 네가 있어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에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지막이라뇨! 끄읍.”
눈물을 참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울음을 가까스로 참는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거라는 건 알았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을 눈물로 배웅하는 것만큼은 싫었다.
“맨날, 우흑, 월세 내놓으라고, 흐윽, 부지깽이 휘두르던 욕쟁이 할배는 어디 가고……. 약한 소리 뭐야, 대체. 끕.”
하도 울음을 참으려고 드니 급기야 딸꾹질이 나기 시작했다.
새빨개진 얼굴로 딸꾹거리는 내가 웃기신 건지, 안쓰러우신 건지. 할아버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우리 꼬마, 할애비 없이 살길은 다 궁리했냐?”
“그런 거 궁리 안 할 거예요. 어헝.”
애쓴 보람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로 보내 드려야 한다는 다짐이 새하얗게 증발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달에 나랑 여름 축제 같이 가준 다고 했으면서 어디 가요! 다음 겨울엔 썰매 태워 준다고, 작년에 분명히 그랬으면서. 흐으읍, 할아버지 이렇게 가 버리면 내가 이 집 꿀꺽해 버릴 거야. 끕. 유산 내가 다 가로챌 거라고요…….”
“가로채 가라, 그래.”
“치이, 말만 맨날……!”
헤르젠 할아버지의 말버릇이었다. ‘내가 죽으면 이 집이 네 집이니 깨끗이 청소해라’.
물론 그건 그냥 약한 결벽증이 있는 할아버지가 내게 집이 광이 나도록 닦게 시키기 위한 으름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살길은 전혀 생각 안 해 뒀구먼. 쯧쯔……. 걱정 마라, 카티. 내가 다아 수를 써 놓았으니까는.”
“으허엉, 안 중요하다고요, 그런 거!”
유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내겐 할아버지가 필요했다.
지난 몇 달간 매일같이 각오했지만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무겁고 공포스러웠다.
나는 이제 세상에 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뭐, 내 몫뿐이라 얼마 되지는 않는다만……. 너 아니면 누가 자격이 되겠누?”
섬망이신가? 할아버지는 다 꺼져 가는 쉰 소리로 뜻 모를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셨다. 그러곤 내 통곡이 귀찮다는 것처럼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 울지 마라, 아가. 곧 다시 안 만나겠냐…….”
싫어. 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을 거니까 할아버지 다시 만나려면 앞으로 90년은 걸릴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랑 조금만 더 있다 가요.’
꺽꺽대며 우느라 그 말은 제대로 다 하지 못했다.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작 몇 시간 후, 헤르젠 할아버지는 편안히 눈을 감은 채 후우- 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 그 한 줄기 호흡으로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흐어어엉, 울음이 자꾸만 목을 치고 올라왔다.
“좋은 데로 가세요, 할아버지…….”
부디 이곳이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이기를.
성격은 좀 꼬장꼬장했지만, 연고 없는 어린애를 10년이나 도맡아 키울 만큼 인정 많은 분이셨으니 꼭 천국에 가시기를.
‘90년 후에 꼭 다시 만나요.’
나는 점점 차가워지는 노인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 * *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장례식은 섭섭하지 않은 규모로 치렀다.
어…… 그렇게 치르려고 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의 관이 집 문턱을 넘기도 전에, 웬 기사 무리와 가르마를 칼 같은 2 대 8로 나눈 젊은 청년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무척이나 새빨간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카티샤 아인슬리 양 되십니까?”
너무 울어서 퉁퉁 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제가 맞는데요. 누구세요……?”
“반갑습니다. 블라스코 공작가의 세무사, 제미언 파커입니다.”
어디라고요?
나는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끔뻑거렸다.
‘블라스코?’
블라스코는 내가 사는 이 아스트로카 제국에 단 하나뿐인 공작 가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환생한 소설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여주인공 니엘라가 유년 시절에 입양되는 집안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블라스코의 역할은 악역. 여주와 남주 페어에게 반목하는 악당이고 흑막이고 최종 보스다.
인성은 폐기 처분한 지 오래이며 도덕성은 약에 쓸래도 없는 살인귀들이 득실거린다는, 그 공포의 공작 가문이 갑자기 왜 나오지?
내 의문은 채 1분도 안 되어 풀렸다.
“‘내 관은 화려하게 치장해 아르템에 있는 블라스코 본가의 묘지에 안치해라.’”
“네?”
“……라는 선대 공작 각하의 유지에 따라, 관을 모시러 왔습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나는 이번에야말로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아무래도 귀지가 많은가 봐. 선대 공작 각하라니. 누가? 헤르젠 할아버지가?
“당장 관을 가지고 냅다 뛰어오라는 영령의 성화가 있으셔서, 바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블라스코의 세무사라는 남자가 고개를 까딱하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관 위에 칼과 나비 문양을 수놓은 검은 깃발을 덮었다.
아니, 저 문양…… 낯이 익었다.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블라스코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진짜로?’
선대 공작이었다고? 그 악귀가 씌었다는 가문의?
‘할아버지, 생전 그런 말씀은 한마디도 없으셨잖아요!’
그러나 그 충격은 약과였다. 내가 당황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더 엄청난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고하신 선대 블라스코 공작께서 카티샤 양에게 모든 유산을 상속하셨습니다.”
“네?”
경악해 소리치는데도 상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빨간 머리 청년이 손에 든 서류를 뒤집어 내게 보여 주었다. 줄줄이 끝나지 않는 목록들이 적혀 있었다.
“상속세를 제외한 현금과 아스트로카 중앙은행의 개인 금고, 아르템, 리덴, 겔포르 영지에서 나오는 순수익, 선대께서 생전에 운영하셨던 정보 길드의 소유권, 수집하신 미술품과 고대 유물 컬렉션, 그 외 헤르젠 블라스코 선대 각하의 명의로 된 모든 것들을 그대로 가져가시면 됩니다.”
유…… 유산 리스트였어.
나는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대충 얼만큼이라는……?”
“아, 이해하기 쉽게 설명드릴 걸 그랬군요. 쉽게 말하면, 블라스코 가문에 귀속된 모든 재산의 약 3분의 2 정도의 규모랍니다. 사실상 가업에서 나오는 수익을 제외한 전부나 다름없거든요.”
“네에?”
“가문이 아니라 개인 명의로 된 재산 수준을 랭킹화하면, 카티샤 양이 아스트로카 황족 다음가는 부자가 되겠군요!”
나는 기겁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중얼거렸던 말들이 퍼뜩 뇌리에 떠올랐다. 그래, 분명 무슨 수를 써 두었다고 하셨다.
아니, 할아버지. 정말 유산을 남겨 줄 줄도 몰랐지만……. 얼마 안 된다면서요……!
“저기, 저 말고 다른 상속인은……?”
“없습니다.”
“…….”
“카티샤 아인슬리를 유일한 상속녀로 정한다는 게 유언장의 요지니까요.”
너무 단호한 대답이라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내 나이 10세, 아무래도 백만장자가 된 것 같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