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
10화
고요해진 홀에 탁탁, 구두 굽으로 대리석 바닥을 가볍게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을 가로막는 무언가를 발로 휙 걷어차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이윽고, 둘 중 조금 더 키가 큰 인영이 먼지구름을 뚫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뒤처질세라 보폭을 맞춰 나오는 두 번째 인영은 그보다는 키와 체구가 작았다.
“문을 그새 보수했나 보네?”
높고 낭랑한 목소리가 저택의 침묵을 깨고 날아들었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흑단 같은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머리를 휙 젖히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부르르 진동이 일지언정 부서지지는 않은 문짝을 보곤 휘파람을 불었다.
“강화 마법을 걸었구나. 마음에 들어.”
“네가 하도 문짝을 붙들고 지랄발광을 하니 그러지 않고 배겼겠나.”
마찬가지로 새카만 흑발의 소년이 누이동생의 곁을 지나치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공녀가 키득거리며 다정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러는 저는. 손 쓸 줄 몰라서 발로 쾅쾅 열어젖히고 다니는 무식한 인간이.”
“왜 내가 손을 못 쓸까, 모자란 누이야?”
블라스코 공자, 베르너가 부드럽게 대꾸하며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힘줄이 돋은 손아귀에 누군가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피떡이 된 사내가 괴롭게 신음했다.
“쿨럭, 끄으…….”
“저택 주위에 간자가 판을 치는데, 난 누구처럼 대장간에만 틀어박혀 나 몰라라 하는 성정은 못 돼서.”
공녀, 아르닌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베르너는 벌레를 털어 내듯 사내를 내팽개쳤다.
블라스코의 기사들이 즉시 달려와 사내를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황실에서 보낸 끄나풀일 거다. 적당히 잘 만져 주도록 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자백할 수 있게.”
“예, 공자님.”
사내가 초라한 꼴로 질질 끌려갔다.
베르너가 손을 툭툭 털어 내며 홀로 들어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블라스코의 사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그리고 공녀님!”
“그리고 공녀님?”
대번에 뾰족한 지적이 날아들었다. 질세라 따라 들어오던 아르닌이 눈을 치켜떴다.
“왜 공자님, 그리고 공녀님이야? 순서 바꿔. 아르닌 대공녀님, 그리고 공자님으로.”
시녀장, 마가렛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를 바꾸면 다음엔 공자가 또 눈을 부라리겠지.
“공작 각하께서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난 저거랑 같이 안 간다.”
어느새 저 멀리 훌쩍 멀어진 베르너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아버지는 따로 뵙지. 씻고 옷을 갈아입을 테니 준비해 둬.”
“하지만 공자님, 귀환하는 즉시 서재로 오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만. 서신으로 미리 전달드렸다시피, 선대 공작 각하의 상속 문제가 얽혀 있는지라 시일이 급합니다.”
“내가.”
용감하게 먼저 입을 열었던 시종장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뒤를 돌아보는 공자의 동공이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깨끗하게 씻고 가겠다잖아?”
“예, 예…….”
“불만 있어?”
“아닙니다, 공자님.”
그래, 베르너 블라스코가 피 묻은 상태 그대로 공작을 찾아갈 리가 없지. 공자는 유독 아버지인 공작 앞에서 더욱 깔끔을 떨었다.
“하여튼 성격 하고는. 말 섞기가 싫다니까.”
신랄하게 빈정댄 아르닌이 반대편 계단에 발을 올렸다.
“나도 사실 먼저 할 일이 있어 일찍 온 거라. 대장간에 다녀온 뒤에 뵙겠다고 아버지께 전해 드리렴. 이번 아가는 정말 명물일 것 같단 말이지…….”
“고, 공녀님!”
“귀어스트 뺨치는 명검~.”
스릉 스릉 칼 갈러 가자~ 콧노래를 부르는 공녀의 모습도 이윽고 사라졌다.
블라스코의 시녀와 시종들은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같은 생각을 했다.
‘둘 다 똑같아, 이 망나니들아.’
* * *
나는 핼쑥해진 뺨을 부여잡고 슬그머니 복도로 나왔다.
공자와 공녀가 저택에 도착했단다. 이틀 뒤 점심나절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더니 둘 다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나? 뭣도 모르고 다가갔다가 찍소리 못 하고 밟히면 어떡하지?
‘일단 조용히 숨어서 탐색부터 하자.’
지피지기 백전백승.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이긴다.
‘아자.’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며 바삐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지나치려던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나는 하마터면 문짝에 싸대기를 얻어맞을 뻔했다.
“……!”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이쪽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한 쌍의 파란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냉엄하고 차분한 인상의 소년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히익.’
나는 단박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새카만 머리칼에 블라스코의 청옥 같은 눈동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적자, 공작의 장남 베르너.
“뭐야, 넌?”
나를 노려보는 서슬이 그의 미모조차 죽여 버릴 만큼 묵직했다.
‘어쩌지? 여기서 인사를 해야 하나?’
예기치 못한 만남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정말 의아한 일은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베르너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내게 까딱 손짓한 것이다.
“뭐 하고 우두커니 서 있어? 들어와.”
“네? 어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나는 홀린 듯이 문을 넘어갔다. 오러 유저라더니 목소리에도 검기를 섞었나?
‘이렇게 빠르게 붙잡힐 줄은 몰랐어……!’
이제 나를 포 뜨려나?
짐승의 아가리에 발을 걸친 느낌이었다.
“누구 따라왔어?”
그러나 이번에도 베르너의 반응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네, 네?”
“마가렛, 헤이든, 록시. 누구 따라 들어왔냐고. 쓸데없는 대꾸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바로바로 답한다.”
“마…… 마가렛이요.”
마가렛은 내 잠자리를 봐주는 시녀였다.
베르너가 탐탁지 않게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쥐콩만 한 걸 시중들라고 앞에 세워 놨을 리는 없고. 들어가서 욕실이나 확인해. 물 온도, 수건, 다 체크.”
“어…… 네.”
어쩌다 보니 그가 가리키는 대로 욕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상황은 뭐지 싶었으나 곧 신종 괴롭히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니엘라도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 바로 어제 읽은 원작 초반부에 떡하니 나와 있었다.
“너 따위가 어떻게 블라스코의 성을 달 수가 있지? 네게는 하녀들이나 하는 허드렛일이 딱이다. 욕실과 주방 바닥이나 닦도록 해.”
‘오, 정말 원작과 다른 게 없네.’
잘만 활용하면 유용하겠는데?
곧이어 베르너가 공연히 잡았던 트집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의 입욕제 취향부터, 유독 까탈스럽게 구는 수건과 세면용품의 각 맞춤까지 다.
‘한번 트집 잡히면 끝도 없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트집 잡히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해내면 호감을 살 수도 있단 말이지!
왜냐면 원래도 그 깐깐한 취향을 맞추는 사용인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열의가 불타올랐다.
제한 시간은 딱 3분이다.
“악, 벌써 30초 지나갔어!”
나는 부산을 떨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나는 청소와 정리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까탈스럽기로는 일등이신 헤르젠 할아버지 병간호까지 했으니 자신 있다.
내가 정확히 3분을 지켜 욕실에서 나오자, 베르너가 나를 위아래로 훑곤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욕실 문을 열자마자 향긋한 베르가모트 향이 풍겼다. 엄격한 시선이 알맞게 데워져 김이 솟아오르는 욕조와 각 맞춰 갠 수건과 가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줄 세운 목욕용품들을 스쳤다.
“뭐, 허투루 교육받은 건 아니군.”
베르너의 미간에 나 있던 세로줄이 조금 옅어졌다.
“이제 방 청소해.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네, 공……. 음.”
베르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 무난한 호칭을 골랐다.
“네, 도련님.”
“나오면 마실 수 있게 매일 마시는 거 올려다 놔.”
그것도 다 [지.우.마>에 나와 있었다. 목욕 후에는 무조건 라임을 두 조각 띄운 차가운 캐모마일 티다.
‘와, 너무 편하다. 정주행해 두길 잘했어.’
주방에서 캐모마일 차를 주문해 다시 올라와 테이블에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청소에 돌입하기 전에 함께 준비된 초코 칩 쿠키 한 개를 몰래 먹었다. 바삭한 쿠키 사이사이에 쏙쏙 박힌 초코 청크의 풍미가 대단했다.
‘방 치워 주는 값으로 쿠키 한 조각이면 싸다, 싸.’
나는 다시 트레이 위에 돔을 덮고, 양 소매를 둘둘 걷어붙였다.
“그럼 어디 한번 치워 볼까?”
베르너의 목욕 시간은 정확히 20분.
자, 이제 본격적인 청소 시간이다. 내 솜씨를 보여 주지.
그런데…… 사태는 심각했다.
나는 경멸스럽게 베르너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대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슨 사고를 친 건지, 피가 말라붙은 발자국이 바닥과 러그에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핏자국은 얼른 지우지 않으면 안 지워지는데!’
카우치에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가지들은 말해 뭐 해. 깐깐한 것과는 별개로, 베르너는 지저분하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 타입인 게 틀림없었다.
‘때 빼고 광을 내 주겠어!’
나는 양팔을 둘둘 걷어붙이고 본격적인 청소에 돌입했다.
당분의 힘인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집에서 하던 것처럼 베르너 블라스코의 방을 먼지 한 톨 없이 청소하고 있었다. 다년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헤르젠 할아버지의 잔소리로 연마된 청소 본능이 빛을 발했다.
‘더러워! 피! 찐득거려!’
잠시 이성을 잃고 무아지경으로 피 묻은 바닥을 벅벅 닦는데, 욕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흠.”
번쩍번쩍 광이 나는 방을 둘러 본 베르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의기양양한 마음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봤지? 이것이 이 집안 재산을 꿀꺽하러 온 청소 요정의 실력이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