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 * *
그로부터 4년 뒤.
아스트로카 제국력 442년 5월. 황립 비에스토 아카데미.
교정에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학생들로 온 기숙사가 부산했다.
학생 대부분이 귀족이라, 아카데미 정문 밖에는 아스트로카는 물론이고 대륙 전역의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마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아직 교정을 빠져나간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한 학기의 대미를 장식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엘로즈 후작가의 차남, 코넬 이엘로즈가 창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룸메이트를 향해 외쳤다.
“학기말 고사 성적 떴대, 프리츠!”
“……안 봐도 돼.”
“왜? 보나 마나 차석이라?”
킬킬거리던 코넬의 웃음소리는 매섭게 책을 덮는 소리에 뚝 끊겼다.
코넬은 흠칫 놀라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전하? 벌써 몇 년째 똑같은 등수 가지고…….”
“닥쳐. 한 대 맞기 전에.”
신경질적으로 지껄인 소년이 기숙사 계단을 내려갔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화려한 금발이 금세 저 아래로 멀어졌다.
코넬은 들리지 않게 쯧쯧 혀를 찼다.
‘어휴, 저 싸가지 전하. 만년 2등인 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나? 친구 아니었으면 내가 먼저 한 대 때렸다.’
하기야, 아스트로카의 귀하디귀한 황태자신데.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제외하면 누구도 황태자의 윗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을 것이다.
‘뭐, 두 살이나 어린 애한테 한 번도 못 이겼으니. 원래 블라스코와는 사이도 안 좋고.’
코넬 이엘로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년의 뒤를 따랐다.
오늘은 비에스토 아카데미의 봄 학기가 끝나는 날이었다. 학기말 고사 결과지가 아카데미의 중앙 홀에 커다랗게 나붙는 날이기도 했다. 결과지에는 학년별로 수석부터 10등까지의 이름과 점수가 공개된다.
황태자, 프리츠는 결과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쌩하니 홀을 나섰다.
……그러려고 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학생 무리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열댓 명의 여학생과 남학생들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학기말 고사 성적표가 붙은 게시판 앞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서로서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무리 한가운데 둘러싸여 있다시피 하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데미 교복을 야무지게 입고, 탐스럽게 곱슬거리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쫑쫑 묶은 여학생이었다.
주황 머리 소녀는 주위의 학생들보다 서너 살은 족히 어려 보였다. 게시판에 나붙은 전교 석차를 확인한 소녀가 활짝 웃었다. 튤립 꽃망울이 톡 터지듯 싱그러웠다.
바로 곁에서 등수를 확인한 또 다른 여학생이 호들갑을 떨었다.
“대단하다, 우리 카티! 이번에도 또 3학년 수석이야.”
“우리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직도 열다섯 살이잖아. 딱 신입생들 나이인데!”
“역시 괜히 블라스코의 직계가 아니라니까.”
주위에서 한마디씩 거들며 치켜세우자, 소녀의 양 뺨에 발갛게 열이 올랐다.
“헤헤……. 아빠, 아니. 아버지 오시면 칭찬해 주시겠다.”
“공작님이 오셔?”
“네! 이제 방학이니까요. 이따 점심에 데리러 오신다고 했어요.”
주위 학생들과 밝게 대화를 주고받는 저 소녀는 카티샤 아브릴 블라스코. 4년 반 전 블라스코 공작가에 입양된 그 유명한 상속녀다.
만 열 살에 비에스토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해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천재.
블라스코 공작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지경이라며 싸고도는 막내딸.
카티샤가 비에스토에 합격했을 당시, 공작이 직접 아카데미를 방문해 교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화젯거리로 돌았다.
“우리 막내가 아직 학교를 가기에는 많이 어려서 말입니다. 이제 막 생일이 지나서 열한 살이 되었거든요.”
‘열한 살’이라는 나이를 무척 강조하질 않나.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몸도 약하고, 블라스코답지 않게 너무 착하기만 해서. 아무래도 열댓 살들 사이에서 수학하기엔 버거울 것 같더군요. 또래 친구도 없으니.”
“아, 그…… 조금 어리기는 하시지요, 공녀가…….”
“네 살씩이나 차이 나는 언니 오빠들 사이에 끼어서 기숙 생활을 하게 할 수도 없고. 요즘 그 문제로 시름이 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딸은 낯을 많이 가리고, 아직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할 나이인데.”
몸이 약하고, 낯을 많이 가린다는 점을 두세 번씩 강조하질 않나 – 프리츠는 이 대목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낯을 가려? 누가? 공작이 제 양딸에 대해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희대의 내숭덩어리거나.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
“그래서 입학을 1년 미뤘으면 합니다.”
“예? 하지만 그런 예외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
“예외는 만들면 그만이지. 우리 막내가 학교 갔다가 친구도 못 만들고, 적응 못 하고, 울적하게 공부나 하다가 코피 흘리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책임질 겁니까?”
“아니, 그게……”
“뭐로 책임질 건데?”
그러니 그 협박 아닌 협박의 결론은 입학을 미뤄 달라는 거였다.
상대가 ‘그’ 블라스코인 데다, 입학시험 등수를 조작하려다 딱 걸린 전적이 있는 비에스토 교수진들로서는 차마 공작의 제안을 걷어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티샤는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1년 뒤, 열두 살에 황립 비에스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래도 여전히 최연소 입학생이었다.
“공작님은 카티를 정말 많이 아끼시나 봐. 3년 내내 방학마다 데리러 오시고, 학기 중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오셔서 주말 나들이도 같이 가고.”
“오실 때마다 눈 호강…….”
“그런 걸 보면 블라스코의 악명도 다 뜬소문 아닌가 싶다니까. 우리 카티가 그 산증인이잖아!”
학생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카티샤가 눈을 반짝 빛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맞아요. 대체 왜 소문이 그렇게 난 건지 모르겠다니까. 다들 얼마나 사려 깊고 진중한데.”
“그래. 사실 소문이 너무 허황하긴 했어. 아무리 블라스코라도 그렇게 무식하게……”
“아, 물론. 블라스코가 가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긴 해요. 잘못 걸리면 그날로 이 세상과는 안녕이니까요. 우리는 기회를 두 번은 안 주거든요.”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날린 등골 섬뜩한 발언에 학생들이 주춤했다.
가볍게 둘러싼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한 카티샤가 과장해서 한숨을 쉬었다.
“나라면 굳이 우리 아빠 심기 거스를 짓은 안 할 텐데 말이죠. 꼭 그런 멍청한 인간들이 있더라. 그걸 그냥 두면 호구지. 안 그래요?”
“어…… 그건 맞지, 사실.”
“그래. 대륙 최고의 검술 명가인데, 그 위명을 유지하려면야…….”
학생들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문과는 달리 자애롭고 정 많은 가문, 으로 누그러질 뻔한 블라스코의 이미지는 다시 ‘그래도 역시 거긴 무서워. 함부로 까불면 큰일 나’를 회복했다.
그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프리츠는 기가 차 실소했다. 말 몇 마디로 블라스코의 흉악한 소문은 완화하되, 혹여라도 얕보이지는 않게끔 선을 긋는 언변이 보통이 아니었다.
‘재수 없는 계집애.’
쟤 때문에 다 망했다. 자신의 아카데미 입학시험도, 입학식도, 입학 후 치르는 시험마다 족족!
‘이번에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실망하시겠지. 할아버님도.’
저 조그만 여자애만 없었어도, 자신이 몇 년째 황성에서 눈칫밥이나 먹으며 지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져도 하필이면 블라스코의, 그것도 순혈도 아닌 출신 모를 입양아에게 지냐며 돌려 타이르던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자 위가 뒤틀렸다.
‘쟤만 어디로 치워 버릴 수 있다면……. 애초에, 쟤가 그냥 예정대로 열한 살에 입학만 했어도. 학년만 달랐어도!’
입학시험에서 카티샤에게 수석을 빼앗긴 뒤, 프리츠는 결국 재수를 선언했다. 1년 뒤 다시 친 시험에서 기어이 수석 자리를 따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저 여자애도 같은 학년으로 입학한 게 아닌가!
결국 프리츠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입학시험이 마지막이었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프리츠의 적대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내내 소녀의 품에 안겨 있던 흰 눈표범이 고개를 슥 들었다. 카티샤의 반려동물, 이클라스족의 쿼터인 신수였다. 저 짐승 역시 제 주인만큼이나 학내에서 유명했다.
흠칫한 프리츠는 얼른 눈을 돌렸다.
‘젠장할. 뭐 저렇게 호위들을 주렁주렁.’
손가락으로 톡 튕기면 휘릭 날아갈 것 같은 저 여자앤, 가는 곳마다 쟁쟁한 이들로 아주 무장을 하고 다녔다. 비단 저 사나운 눈초리의 신수뿐만이 아니었다.
장내에 무뚝뚝한 음성이 나직이, 그러나 힘 있게 내려앉았다.
“카티샤.”
“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카티샤가 학생들 틈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러곤 종전까지의 미소와는 비할 바도 되지 못할 만큼 활짝, 눈매를 휘었다.
“오빠아!”
학생들을 헤치고 도도도 달려간 카티샤를 키 큰 남학생이 황급히 붙잡아 세웠다.
“뛰지 마. 넘어진다.”
“안 넘어지거든요!”
“너 저번에 그 소리 하면서 계단에서 뛰다가 무릎 나갔잖아.”
올해로 스물두 살, 졸업할 나이가 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블라스코의 장남, 베르너 블라스코였다.
이제 더는 소년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장성한 청년이 익숙하게 막냇동생의 교복 넥타이를 정리해 주었다.
“아버지 언제 오신대?”
“점심시간 맞춰서 오신다고 했으니까, 아마 한 시간쯤 일찍 오실걸요.”
“그럼 슬슬 도착하셨겠군. 나가자.”
“응! 아, 오빠. 저 이번 학기도 1등 한 거 봤어요?”
“내가 제일 먼저 봤지. 잘했어. 매번 잘해서 새삼 말하기도 입 아프다만.”
“헤헤…….”
저 사이좋은 남매에 얽힌 이야기도 몇 년째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화제다.
입학한 이래 단 한 번도 학년 수석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으며, 당연하게도 검술제란 검술제는 죄 휩쓸고 다니던 비에스토 아카데미의 학생 대표, 베르너 블라스코가 4년 전 갑자기 유급을 선언했을 때 온 아카데미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 선배는 대체 왜 졸업을 미뤘대?”
“아, 그게…… 막냇동생이 내년에 입학한다잖아. 그 왜, 최연소 만점자. 걔가 너무 어려서 입학을 1년 미뤘는데, 그렇게 되면 같이 아카데미 오래 못 다닌다고…….”
“그래서 일부러 유급한 거야? 3년을?”
“그렇대. 근데 그건 사실 핑계고…… 그냥 막내랑 집에서 놀고 싶었나 봐.”
“뭐어? 에이, 설마. 블라스코 공자인데!”
“진짜야. 누가 직접 물어봤다잖아. 근데……. 아버지랑 동생은 백날 천날 막내 끼고 노느라 바쁜데, 자기만 이딴 학교에 틀어박혀서 썩어 갈 수는 없다고 그랬대.”
아주 눈물 나는 가족애 되시겠다.
프리츠는 대놓고 콧방귀를 팽 뀌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