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그래 봤자 양녀잖아?
겉으로는 저렇게 세상 죽고 못 사는 남매처럼 보여도 속사정은 또 어떨지 모른다.
‘막말로, 돈 때문에 호적에 올린 거 아냐?’
프리츠가 삐딱하게 블라스코를 씹어 대는 사이, 카티샤는 같은 학년 동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다음 학기에 봬요!”
“잘 가, 카티! 방학에 나랑 차 마시기로 한 거 잊지 마.”
“이번엔 꼭 수도에 오기로 한 거다? 티타임 잊으면 안 돼! 어, 으음. 베르너 선배도 좋은 방학 보내세요.”
프리츠는 소녀가 제 오빠의 손을 잡고 앞뒤로 신나게 흔들며 홀을 나서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별 의미는 없어. 그냥 나가는 길에 마주치면 기분 잡치니까.’
아마 오늘은 황실에서 직접 기사들을 보냈을 것이다. 황태자라고 온갖 유난을 떨며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교문 밖에 있을 블라스코 공작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조부인 오르겐 후작이 늘 그에게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블라스코 일가를 마주쳐도 기죽은 모습을 보이시면 절대 안 됩니다, 전하. 상대하지 않고 피했다간,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할 놈들이니까요.”
‘……귀찮아.’
그냥 똥이 더러우니 피하는 셈 치면 안 되는 건가.
프리츠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기둥 너머를 흘끔거렸다.
벌써 나간 줄 알았는데, 블라스코 남매는 아직 홀 입구 앞에 있었다.
“어……?”
프리츠는 시선을 거두는 것도 잊고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쪽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카티샤가 오빠의 손을 잡아끌며 홀을 나섰다.
프리츠는 살랑살랑 멀어지는 주황색 머리 타래를 홀린 듯이 응시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그는 황급히 고개를 털어 내고 움직였다.
어느새 블라스코 남매의 모습은 입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프리츠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뒤, 정문 반대편에 있는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내려가 빙 둘러 갈 생각이었다.
‘괜한 소란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황태자가 호위 한 명 대동하지 않고 학기가 끝난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프리츠는 푹 눌러쓴 후드를 더 꽉 여미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골목을 중간쯤 내려갔을 때였다. 담벼락 위에 서 있던 누군가가 가볍게 뛰어내려 그의 앞길을 막았다.
“누구냐!”
프리츠는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비에스토 아카데미 학내에서는 수업 시간 외 무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지만, 교정을 벗어난 직후부터는 검을 소지해도 징계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리츠가 검을 뽑기도 전에, 괴한이 무언가로 그의 손등을 탁 후려쳤다.
‘나, 나뭇가지……?’
프리츠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었다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프리츠의 앞을 막아서서 나뭇잎이 잔뜩 달린 나뭇가지로 손등을 때린 자는 낯선 소년이었다. 그것도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튀어 나갈 만큼 눈 돌아가게 아름다운 소년.
“어…….”
신비로운 은푸른색 눈동자에는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로 가지런히 자른 머리칼은 눈처럼 새하얀 흰색이다.
소년은 비에스토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특이한 점박이 무늬의 허리띠와 가죽신을 제외하면 온통 하얀 훈련복 차림이었다.
색소가 너무 없어서인지, 소년은 주위 풍경과 섞이지 못하고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눈빛은 저보다 하등한 생물을 보는 양 무심하고 오연하다.
어디선가 이 봄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몰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프리츠는 말을 더듬었다.
“누, 누구……?”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맑고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전하!”
프리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담벼락 위에서 가느다란 다리가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왈칵 찡그렸다.
“너……!”
지긋지긋한 만년 1등, 카티샤 블라스코였다.
높은 담에 걸터앉은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생글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기 싫은데, 예쁘긴 정말 예뻤다.
무릎을 덮는 교복 치마를 주섬주섬 갈무리한 카티샤가 담벼락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가뿐하게 땅을 딛고 허리를 펴는 것까지, 착지 자세가 완벽했다.
프리츠의 손등을 눈으로 살핀 카티샤가 낯선 소년의 어깨를 톡 치며 힐난했다.
“너무 세게는 때리지 말라니까. 전하 손등에 자국 났잖아.”
“세게 안 때렸어.”
소년이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양 어깨를 들썩였다.
프리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빨간 줄이 간 손등을 등 뒤로 숨겼다. 목소리가 저절로 사나워졌다.
“멀쩡히 길 가는 사람 앞을 갑자기 가로막고. 이건 무슨 경우지, 공녀?”
아카데미 안에서나 신분제가 해제되지, 교정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더는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 수석과 차석을 다투는 동급생이 아니라 아스트로카 황태자와 블라스코 공녀로 마주하는 것이다.
“아, 맞다.”
카티샤가 교복 치맛자락을 잡고 나붓하게 예를 올렸다. 흠잡을 데 없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아까 홀에서부터 제 쪽을 빤히 보시길래.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해서요.”
사실 절만 올렸지, 황태자에게 으레 붙여야 할 수식어는 모조리 제외한 채였다. 그러나 카티샤가 시종일관 생글거리고 있는 바람에 프리츠는 미처 그 무례를 지적하지 못했다.
“어…… 없어. 할 말은 무슨. 그리고 난 그대를 본 게 아니다, 공녀. 자의식 과잉이군.”
예리한 계집애.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고개를 살짝 기울인 카티샤가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나. 제가 오해했나 봐요.”
프리츠는 참을 수 없는 찜찜함을 느끼며 공녀를 노려보았다.
이 여자애가 대체 왜 이래?
같은 학년이기는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도 드물었다. 애초에 황실과 블라스코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는데 그들이 친밀한 관계인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블라스코와는 다섯 마디 이상 섞는 게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님까지 입 모아 그리 말씀하셨다.
프리츠는 대화를 끊을 심산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용건이 끝났다면 이만.”
“아! 아직 용건 안 끝났는데.”
옆으로 한 발 비켜나 카티샤를 스쳐 지나가려던 프리츠가 인상을 구겼다. 어느새 카티샤가 딱 그가 움직인 만큼 옆으로 한 발 움직여 앞을 막고 있었다.
카티샤가 검지로 그의 손등을 가리켰다.
“제 호위가 전하의 몸에 상처를 냈는걸요.”
“이깟 건 아무것도 아니……”
“손등이 빨개요, 전하. 이거 방금 꺾은 나뭇가지라, 진드기가 옮겨 붙었을 수도 있어요. 두드러기라도 나면 엄청 가려울 텐데?”
그러나 정작 나뭇가지로 감히 황태자의 손을 후려친 당사자는 무료한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전혀 미안한 자들의 태도가 아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뭘 원하는 건데?”
“제게 사과할 기회를 주셨으면 해요.”
사과? 블라스코가?
프리츠는 하도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사과를 빌미로 블라스코에 초대하겠다느니 하는 제안을 할 셈이라면 관둬. 내가 미쳤다고 아르템령에 발을 들이겠어?”
“아, 물론 그렇죠. 걱정 마세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나 상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프리츠는 졸지에 민망해졌다. 상대는 생각도 없는데 괜히 앞서간 셈이었다.
프리츠의 귓불이 붉어지거나 말거나, 카티샤가 그에게로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소녀의 얕은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카티샤가 입가에 손을 대고 소곤소곤 물었다.
“이번 여름 방학, 어디에서 보내세요? 황성?”
“……아니. 오르겐 후작가에서 보낼 예정이다.”
“와, 그렇구나. 마침 잘되었네요!”
“뭐, 뭐가?”
카티샤의 눈매와 입가에 맺힌 미소가 순간 진해졌다.
점점 더 눈앞의 여자애의 의중을 알 수 없어졌다. 블라스코와 황실만큼이나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문이 오르겐 후작가였다.
‘그런데 뭐가 잘되었다는 거지?’
소녀의 연녹색 눈이 쥐덫에 갇힌 쥐를 찾은 고양이처럼 영리하게 반짝거렸다.
“괜찮으시다면 오늘의 무례도 사과드릴 겸, 작은 선물을 가지고 오르겐 후작가를 방문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뭐? 당연히 안 돼! 돌았냐?
……라고 냅다 외쳤어야 하는 것을.
‘제기랄, 뭐 이렇게 예쁜 거야?’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여자애의 초롱초롱한 시선에, 프리츠는 저도 모르게 귓불을 붉히고 말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