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 * *
황성으로 향하는 길.
제미언이 못내 불안해하며 공작을 힐끔거렸다.
“카티 아기씨, 그냥 나가시게 둬도 괜찮은 걸까요, 각하?”
“뭐 어쩌겠어? 마냥 숨겨 두고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루테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은 뒤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얼굴에 제미언의 열 배는 될 법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원래 이게 맞아. 블라스코는 아이를 유하게 키우지 않으니까.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히……”
“각하, 눈물 닦고 말씀하십시오.”
“안 울었거든? 딸기, 너 점점 기어오른다?”
제미언에게 날아드는 시선이 언제 침중했냐는 듯 뾰족해졌다. 그러나 루테는 금세 다시 피로한 기색으로 착잡한 한숨을 쉬었다.
‘품에만 싸고도는 것은 블라스코에 어울리지 않으니.’
작고, 어리고, 약하고. 그런 이유만으로 아이를 과보호하는 것은 자칫 억압이 될 수 있다. 능력치가 탁월한 아이일수록 더.
루테는 그의 막내딸이 제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충분히 잘해 낼 수 있는 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열 살에 상속 시험을 네 개나 타파한 것도 그렇고, 악바리로 공부해 죽어도 아카데미 수석을 놓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그 애도 자기만의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혹여 가문에 누를 끼칠까 봐.’
게다가 애초에 ‘하고자 하는 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만 한다’, 그것이 블라스코의 성질머리였다. 그렇게 가르쳤으니 아이의 고집이 대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안 되겠어.”
루테는 자신과 비슷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베르너와 아르닌을 새삼스럽게 살폈다.
‘쟤네 키울 때는 안 이랬는데.’
저 성깔머리들로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지는 않겠군, 하는 자부심과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내는 아무래도 지나치게 착하다. 싱글싱글 웃는 것도 너무 귀엽고, 딱 어디 납치당하기 좋게 몸집도 작다.
“너무 깜찍해서 누가 자기도 딸 삼고 싶다고 데려가면 어떡하지?”
“맞아요. 하필 눈에 띄게 머리카락도 주황색이야, 왜. 까맣게 염색이라도 해 줄까 봐요…….”
“눈에 힘 빡 주고 다니라고 해도 말 안 듣습니다. 한 3초 힘줬다가 배시시 웃어 버려요. 아카데미에서도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제가 진짜 미치고 팔짝 뜁니다.”
남매가 번갈아 가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루테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게, 당장 막내에게 돌아가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보내 주는 것도 아버지의 미덕이지.’
“베르너, 아르닌.”
“네!”
“막내가 갈 만한 길은 미리 다 치워 놓고. 괜히 시비 터는 것들이 있거든 찍소리도 못 하게 밟아 놓은 뒤에 수련소에 던져 놔. 혹시 세작일 수도 있으니.”
“걱정 마세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난 아르닌이 달리는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다녀오겠습니다! 우렁차게 외친 그녀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베르너는 금방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러면 황성에는 아버지 혼자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대충 끝내고 나도 갈 거야. 그때까지만 좀 부탁하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요.
베르너는 창틀에 발을 올리면서도 불안하게 루테를 곁눈질했다. 공작이 하마터면 보는 눈이 수십 쌍인 복도 한복판에서 황후를 상대로 검을 뽑을 뻔했던 게 바로 작년이다.
‘오늘 황성, 누구 하나 죽어 나가지 않고 괜찮을까?’
공작이 그렇게 눈이 돌아가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자식들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아르닌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아니야. 좀 불안한데…….”
“전혀요.”
‘제가 보기엔 아버지가 더 불안합니다.’
베르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티샤도 중요하지만, 역시 저분을 홀로 두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제 자신은 정말로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공작의 짐을 나누어 드는 것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베르너는 뿌듯한 심정으로, 조금이라도 더 듬직해 보일 수 있도록 허리를 곧게 세웠다.
하나뿐인 아버지는 아들이 지켜야지, 뭐 어쩌겠는가?
* * *
아버지와 오빠, 언니가 황성으로 떠난 뒤, 나는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언제나처럼 호위 기사인 루시스와 새끼 눈표범이 내 곁을 지켰다.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아기…… 아가씨. 어디로 가시려고요?”
“오르겐 후작가로 갈 거야.”
웬만한 일에는 놀라는 법이 없는 루시스 경이 눈을 크게 떴다.
“친구분들을 만나러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친구들. 뭐, 굳이 따지자면 예비 친구들이지만.”
마침 오늘이 딱 적기였다.
오르겐 후작 역시 7귀족회의 일원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늘 황성에 출석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후작저는 주인이 비게 되겠지. 내가 맘껏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이참에 황태자와도 친분을 좀 쌓고.’
황태자, 프리츠 카니악 베르누아. 올해 17세.
아스트로카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고, 황후 소생의 적통이다. 오르겐 후작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원래라면 블라스코가 경계해야 할 인물 중 하나였겠지만, 내가 비에스토 아카데미를 다니며 유심히 관찰한바, 황태자는 의외로 공략하기 쉬운 상대였다.
‘맨날 날 훔쳐보고, 말을 걸면 귀가 빨개지고.’
이상하게 자꾸 그러더란 말이지. 꼭 나랑 친해지고 싶은 것처럼. 이번에도 결국 내 막무가내 제안을 받아들였지 않은가!
오르겐 후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블라스코 뺨칠 만큼 으리으리한 대저택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황태자는 후작저에 초대해 달라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조건을 붙였다.
“공녀의 그 신수는 출입을 불허한다. 호위 기사를 대동하는 것도 안 돼. 어떤 종류의 무기도 반입 금지인 것은 마찬가지야.”
“그럼 제 안전은 누가 보장하죠?”
“……그건 황태자인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내가 생각해도 오르겐 후작이 날 처리하려 한다면 제 집에서 수를 쓸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당장 아이칼과 함께 저택 내부를 쑤시고 다닐 셈도 아니기는 했다.
‘게다가 혹시 니엘라를 발견하게 되면, 아이칼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으니까.’
니엘라가 원작에서처럼 아이칼에게 눈독이라도 들이면 곤란했다.
‘얜 내 거야. 사기꾼에겐 안 뺏겨.’
나는 새끼 눈표범의 촉촉한 콧잔등에 쪽 뽀뽀해 준 뒤, 마차 창문을 열었다.
“자, 아키. 기사들 눈에 띄지 않게 지붕 위에 올라가 있어. 주인님이 부르면 오는 거야.”
목에 작은 홍옥 조각을 매단 눈표범이 창문을 훌쩍 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쾨티모르의 홍옥 조각은 내가 몇 년 전에 아르닌 언니에게 주고 남은 일부다. 작은 조각이니만큼 원래의 기능을 다하지는 못하겠지만 모습과 목소리를 감쪽같이 숨기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루시스 경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무슨 생각이 있으신 거지요, 아가씨?”
“그럼. 걱정 마요, 루시스 경.”
내가 어디 한 군데라도 잘못되었다간 오르겐 뿐만 아니라, 이 일대의 수도 귀족들마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블라스코가 어디 보통 다혈질들이던가.
‘우리 가족들을 귀족 살인범으로 만들 수는 없어.’
나는 불타는 사명감을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 * *
블라스코 공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저택 내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응접실에 주인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금발 곱슬머리를 지닌 소년, 황족의 상징색인 금빛과 붉은색 정복을 입은 황태자. 프리츠가 응접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왔군, 공녀.”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나를 쏘아보는 적색 눈에 그런 의심이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에게 적당히 예를 갖췄다.
“아스트로카의 두 번째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무궁한 광영을……”
“됐으니까 앉아.”
“그럴까요?”
나는 프리츠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응접실을 구경하는 척, 하녀들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니엘라는 하녀의 딸이지.’
물론 지금 니엘라는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테니, 그녀의 어머니처럼 저택에서 하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시는 주인과 정을 통했다가 사생아를 낳고, 비참하게 버려진 불쌍한 하녀의 이야기는 저택 사람들 사이에 알음알음 다 퍼져 있을 터.
‘한 명만 붙잡고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한 바퀴 둘러본 찰나였다.
응접실 가장 구석진 곳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는 인영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녀복을 입은 소녀였다. 그녀는 밝은 레몬색 머리카락은 돌돌 말아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얼떨떨한 신음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
밝은 금발에, 열일곱 혹은 열여덟 정도로 보이는 소녀?
나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눈, 눈 색이……!’
다행히 내가 테이블을 뒤엎고 일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금발의 하녀가 묵묵히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린 것이다.
오묘하게 붉은 기가 섞인 개암나무 열매 색 눈동자가 찰나 드러났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친. 한 큐에 찾았네.’
나와 눈이 마주친 하녀가 동요 없이 도로 눈을 깔았다. 당장 다가가서 제대로 얼굴을 뜯어보고 싶었다. 4년 동안 대비해온 것치고 시작이 좋았다.
그러나 들뜬 심장이 마구 내달리려는 순간, 찜찜한 의심이 싹텄다.
‘그런데 쟤가 여기서 하녀로 일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훈련받기도 바쁠 시기 아냐?’
그런데 이렇게 빨리, 쉽게 찾았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