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세상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게다가 상대는 오르겐 후작가다. 16년 전에 블라스코의 가주 후계자를 죽음으로 내몰고도 꼬리를 밟히지 않은 뱀 같은 작자의 소굴.
‘설마 생김새만 비슷한 다른 사람이라든가……?’
아무래도 이름까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하녀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머리를 바삐 굴릴 때였다. 맞은편에서 기분 상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내게 사과를 하고 싶다더니, 공녀는 내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군.”
“아.”
“후작가의 사용인에게 관심이 있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니엘라를 찾아낼 방법만 궁리하다 보니 눈앞의 황태자를 잠시 잊었다.
나는 재빠르게 실수를 무마했다.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참 예의 바르고 정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전하를 두고 딴생각을 한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누, 누가 걱정을 했다고!”
프리츠가 펄쩍 뛰며 반박했다. 아니면 다행인 거지 뭘 저렇게 열을 내고 그런담.
나는 니엘라에게 자석처럼 따라붙으려는 시선을 겨우겨우 그에게 고정했다.
‘집중, 집중.’
오늘의 타깃에는 프리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내게 적의를 품고 있지 않은 거라면,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눈도장을 찍는 게 내게도 이득이다.
나는 얼른 영업용 미소를 내걸며 가져온 작은 상자를 테이블에 놓았다.
“그보다, 전하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는데. 지금 열어 보실래요? 위험한 건 아니니 너무 경계하진 마시고요.”
경계의 벽이 높디높은 프리츠는 내 선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대기하고 있던 그 금발의 하녀를 불렀다.
“니엘라, 와서 풀어 봐.”
‘니엘라’.
입술이 순식간에 말랐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흘렀다. 불시에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니엘라가 맞았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여주인공. 반전 매력이 장난 아닌.
나는 서둘러 찻잔을 들어 떨리는 입꼬리를 감췄다.
‘이렇게 바로 니엘라를 맞닥뜨리게 되다니.’
우연인가,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
공손히 다가온 니엘라가 손으로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었다. 상자 안에 든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투명한 초록빛 액체가 가득 찬 작은 유리병이었다.
“……저게 뭐지?”
프리츠가 미간을 잔뜩 구겼다.
무슨 독극물을 내미는 거냐는 추궁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가까스로 니엘라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집중!
“전하, 오른쪽 손등 안 괜찮으시죠? 제 호위 기사에게 맞은…… 아니, 다치신 곳 말이에요.”
아이칼은 힘이 인간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내 나를 의식하는 황태자를 못마땅해했으니, 암만 나뭇가지로 후려쳤대도 분명 상처가 남았을 터.
예상대로, 프리츠는 내내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기다려 봐도 도통 그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나는 저 유리병 속 액체를 쓰는 법을 직접 보여 주기로 했다.
“제가 전하의 옆자리에 앉아도 되나요?”
“뭐, 뭐?”
프리츠는 경악해선 두 번씩이나 되물었지만,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뭐라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프리츠의 옆자리에 사뿐히 자리를 잡은 다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손 주세요.”
“손을 왜……?”
“장갑을 끼고 계신 걸 보고 계속 신경이 쓰였거든요.”
프리츠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살짝만 볼게.
나는 그가 무슨 말인가를 더 하기 전에 재빨리 오른손을 낚아챈 다음, 흰 장갑을 벗겨 냈다.
“야, 야, 1등. 잠깐만……!”
공녀라는 호칭과 무게 잡던 말투도 잊은 프리츠가 급히 나를 저지했지만, 난 이미 보고 난 뒤였다. 소년의 손등을 떡하니 수놓은 피멍을.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천장을 노려보았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치겠다, 아키.’
황태자 손등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이래 봬도 아스트로카의 차기 황제인데!
나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약초병의 뚜껑을 땄다.
“뭐, 뭐 하는 거야!”
“자, 보세요.”
나는 일부러 약초즙을 내 손등에 조금 덜어 냈다. 그리고 즙이 스며든 손등을 프리츠에게 보여 주었다.
“아무 일도 없죠? 저 여기 독 안 탔어요. 제가 가족들이랑, 가문의 기사들에게 늘 만들어 주는 약이거든요.”
“……직접 배합한 거라고?”
“네. 어떻게 쓰는 건지 보여 드릴게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 계세요.”
이 정도의 멍이라면 충분히 블라스코에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감히 황족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아마 그러지 않은 건 황태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검도 아니고, 나뭇가지로 얻어맞은 손등이 일주일째 낫지 않는다고 누구에게 말하겠어?
‘심지어 내게 매번 수석 자리도 뺏기는데…….’
갑자기 애잔해졌다.
‘꼭 몇 년 전의 아르닌 언니를 보는 것 같다.’
이래서야 정말 미안해진다.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프리츠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꼭 잡고, 약초즙을 조심스럽게 손등에 펴 발랐다. 차가운 감촉에 그가 연신 흠칫거렸다.
‘아이칼, 너 때문에 주인님이 적에게 이런 서비스까지 해 준다.’
효과는 언제나처럼 즉각적이었다. 손등의 멍이 차츰차츰 빠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프리츠가 움찔거리던 것도 잊고 얼떨떨한 탄성을 흘렸다.
“이렇게 빨리…….”
“저희 할아버지가 약초 박사셨거든요. 두세 시간 간격으로 몇 번 더 덧바르면 완전히 빠질 거예요.”
나는 더 퍼진 멍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소맷자락까지 살짝 들춰 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4년 동안 헤르젠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연마한 약초 배합 실력은 이곳저곳에서 무척 유용하게 쓰였다.
“타박상에 좋은 즙이에요. 보시다시피 붓기를 가라앉히고 멍을 빼는 데 탁월하죠. 보존제를 넣어서 1년은 너끈히 갈 테니, 비상시에 사용하세요.”
“…….”
“비매품인데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버리지 마세요.”
“……약초학을 특별히 더 잘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맞아요. 저는 특별히 더 잘하는 거 없이 다 잘하거든요.”
검술 빼고.
블라스코 직계가 검술엔 젬병이라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죽어라 수석을 사수하는 데 썼던 내 지난 3년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온다.
나는 프리츠의 손에 다시 장갑을 끼워 주며 흘끗 그의 기색을 살폈다.
‘오러가 들썩이네. 당황했다.’
어째 귓불뿐 아니라 뺨까지 좀 불그스름한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겠지. 지금 블라스코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이 상황 자체가 그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안 해쳐요.’
안심시켜 주려고 싱긋 웃었는데, 프리츠의 얼굴이 더욱 시뻘게졌다.
‘……왜 이래? 여자애 손 처음 잡아 보는 것처럼’
나는 떨떠름하게 여기며 다시 그의 맞은편 자리로 돌아오……려다가 멈췄다.
니엘라가 바로 이 자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원래 내가 앉아 있던 곳보다 더 관찰하기 좋은 위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도로 궁둥이를 붙였다.
“그런데 조부님과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전하. 황성이 아니라 후작가에서 방학을 보내신다니, 신기해요.”
“……조부님께서 나를 많이 아끼시니까. 어마마마께서도 내가 후작가와 더 각별히 정을 쌓기를 바라시고.”
하긴, 그렇겠지. 그래야 나중에 황태자가 제위에 올라도 오르겐이 외척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슬쩍 니엘라가 더 잘 보이는 쪽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공교롭게도 내가 움직인 방향이 황태자 쪽이었는지, 그가 슬쩍 더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 좋아.
나는 남은 틈을 얼른 좁히며 최적의 관찰 위치를 잡았다.
‘자, 이제 어쩔까? 둘만 남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굳이 하녀 하나를 콕 집어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건 이상하고.’
그때였다. 황태자가 무척 어색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차는…… 안 마실래? 아니, 안 마시겠나?”
“저야 당연히 좋아요.”
황태자는 다시 니엘라를 불러 차를 내오라 시켰다.
곧 우리 앞에 디저트 트레이와 찻주전자, 찻잔이 가지런히 세팅되었다.
니엘라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동안,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낱낱이 관찰했다.
나는 체격 조건이나 근력 면에서는 검사로서 탈락이지만, 다행히 타고난 감각만은 좋았다. 오러 민감도가 일반 검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눈으로 보기에 니엘라는.
‘오러 개화까진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티가 나.’
기척을 최소한으로 누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게 바로 기척을 숨길 줄 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발소리와 일부러 낸 발소리는 엄밀히 다르다.
나는 빈 찻잔을 채우는 그녀에게 상냥하게 부탁했다.
“시럽 좀 더 가져다줄래? 난 스콘에 데운 메이플 시럽을 뿌려 먹는 걸 좋아하거든. 따듯하고 걸쭉한 거.”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공녀님.”
명령을 받은 니엘라는 곧 응접실 밖으로 사라졌다.
황태자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운을 떼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본 목적을 꺼내 봐, 공녀. 이런 치료를 빌미로 후작저까지 온 이유 말이야. 처음 날 막아섰을 때부터 그걸 노렸겠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그런 거창한 이유 없었어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한 번쯤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카데미 안에서는 아무래도 시선이 많이 모이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항상 차석이시잖아요.”
황태자의 미간에 빡 금이 갔다.
나는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수석을 유지하려면 매일매일 쪽잠을 자야 하거든요. 공부는 잘하지만, 천재는 아니라서요.”
“…….”
“하지만 전하께선 꼭 그러지 않으셔도 항상 상위권에 드시니까. 대단하고 또 부럽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
“하지만 저도 거저 얻은 결과는 아니니까 저 너무 미워하지 마시라고, 한 번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다예요.”
뭐, 거짓말은 아니다. 공부가 재능을 타는 영역이었다면 나는 황태자에게 무조건 졌다.
‘이 정도면 괜찮은 대화 축에 끼겠지. 적당히 명분도 있고.’
나는 몸을 살짝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응접실 문 너머를 힐끔거렸다.
니엘라는 언제 돌아올까? 이제 슬슬 마무리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왼뺨에 익숙한 한기가 스쳤다. 허공에 꽃을 피우듯 하얗게 증식하는, 내가 모를 수가 없는 오러였다.
나는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