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서, 설마.’
기척을 최소한으로 줄인 누군가가 내 바로 뒤에 있었다.
목덜미가 스산하다.
‘언제 들어온 거야?’
나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하며 목으로 손을 올렸다.
뒤에 선 누군가 곧장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손의 크기와 감싸 쥐는 모양, 체온까지 익숙하다 못해 원래 내 손이 있어야 할 자리인 양 편안했다.
‘아니…… 잠깐만.’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싼 아이칼이 나를 왼편으로, 그러니까 황태자에게서 멀어지도록 당겼다.
나는 차마 옆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말로 그를 저지하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한 칸 옆으로 움직였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프리츠에게 너무 바싹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갑자기 거리를 벌려도 이상해 보일 텐데?’
그러나 아이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예 내 옆자리에 앉아 버렸다.
소파가 보이지 않는 이의 무게감에 살짝 눌렸다. 나는 속으로 기겁했다.
‘……!’
아이칼이 스쾨티모르의 홍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작은 조각이라 아주 완벽하게 존재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척에 예민한 자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챌 것이다.
예를 들면 니엘라라거나.
반면 내가 갑자기 거리를 벌린 걸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프리츠는 무척이나 진지한 눈을 했다.
“일단…… 하나 정정하는데, 나도 너를 그렇게 시기한 건 아니야. 그냥 왜 하필 너도 입학을 1년 미뤄서 동급생이 된 건지 짜증이 좀 났을 뿐이지. 아주 가끔.”
“아하, 그, 그러셨구……”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을 맞추었다. 내가 저를 봐 주지 않자, 아이칼이 대뜸 내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는 제가 이제 나보다 더 크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고서 이렇게 무게를 실어오곤 했다.
티 나지 않게 어깨를 살짝 털자, 심기가 상해버린 아이칼이 내 어깨를 깨물었다.
“아얏, 좀……!”
“공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 계속하세요.”
블라스코보다도 더 제멋대로인 이 신수 놈은 제 송곳니가 얼마나 날카로운지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이만 안 세우면 다야? 아프다고……!’
황태자 앞에서 그렇게 왈왈거릴 수가 없어서, 나는 아이칼의 보이지 않는 손을 손톱으로 세게 긁어 버렸다. 귓가에 픽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
간지럽지도 않다 이거냐. 삽시간에 아주 억울하고 어이없어졌다.
그 와중에 프리츠는 내 칭찬이 곱씹을수록 좋았는지,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뭐, 내가 영특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공녀의 노력도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렇……죠. 그러니까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 지내봐요, 전하. 이왕 같은 학년인 거, 으, 진짜…… 너무 좋네요! 오해가 풀려서요.”
얘가 도대체 왜 이래. 아이칼이 계속 옆에 붙어 앉아 치대는 바람에 도무지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멋대로 굴지는 않는데. 평소랑 뭔가 다른데……?’
설상가상, 이제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프리츠의 눈초리도 심상치 않았다.
“공녀, 여전히 대화 상대에게 집중을 못 하는군. 괜찮나? 어디서 한기가 드는 것 같기도 한데…….”
프리츠가 내 안색을 살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아이칼이 나를 제 품으로 확 잡아당겨서, 나는 본의 아니게 대놓고 그를 피한 셈이 되었다.
아이칼이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더 있을 거야?’
소리를 죽이느라 숨이 많이 섞인 음성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이제 그만 가자, 카티. 나 너랑 놀고 싶어.’
고개를 트는 척하며 옆자리를 보자, 곧장 다가온 엄지와 검지가 내 턱을 살짝 들어 위치를 조정했다. 저를 똑바로 보라는 뜻이다.
나는 정확히 아이칼의 눈이 있을 허공을 세게 노려보다 결국 체념해 버렸다.
‘알겠어, 알겠어. 이제 갈 거야.’
어차피 황태자와의 대화는 이만하면 됐다. 나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잘 가려 주길 빌며 입 모양으로 벙싯거렸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끼어들지 마. 알겠어?’
그렇게 단호하게 신호를 보낸 뒤, 나는 다시 생글거리며 프리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에요. 슬슬 7귀족회의가 파할 시간인 듯한데, 이만 일어나 봐도 될까요?”
“벌써?”
“벌써라뇨.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걸요. 제가 여기 와 있는 걸 알면 아버지가 곧장 들이닥치실 수도 있어서요.”
“아…… 그러면 곤란하지.”
더 붙잡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황태자는 금방 수긍했다. 그도 블라스코 공작의 성질머리와, 막내딸을 얼마나 아끼는지에 관한 소문을 익히 아는 듯했다.
나는 배웅하기 위해 일어서는 그에게 황급히 손을 저었다.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는 황성으로 와.”
“네?”
“여기는 네게, 아니, 공녀에게 썩 안전한 장소는 아니니까.”
“글쎄요, 황성도 제겐 썩……”
“내 궁으로 오면 돼.”
기분 탓인가? 프리츠의 친절이 과했다.
비슷하게 느꼈는지, 귓가에 아이칼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가긴 어딜 가? 가지 마.’
나는 내게만 들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멋쩍게 뺨을 긁었다.
‘호감을 너무 사 버렸나…….’
천재라고 추켜세워 주면 좋아할 타입일 줄은 알았지만, 효과가 굉장하다.
“초대해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나는 프리츠에게 생글거리며, 사각을 틈타 아이칼의 손을 매섭게 후려쳤다. 너도 좀 가, 이제. 자꾸 방해하면 너한테야말로 안 갈 거야.
그제야 그가 마지못해 내게서 떨어졌다. 거짓말처럼 한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환상의 타이밍으로, 아이칼이 사라진 다음 순간 응접실 밖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나는 얼른 황태자에게 절한 뒤, 빙그르르 돌아섰다.
그 순간, 어깨가 바로 뒤에서 다가오던 이에게 거세게 부딪혔다.
“……!”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쟁반 모서리에 정통으로 박은 어깨가 찌르르 아파 왔다. 쟁반에 올려져 있던 시럽 주전자가 쓰러지며, 드레스 위로 끈끈한 시럽이 쏟아졌다.
“공녀!”
기함한 프리츠가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려 팔을 뻗었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인 뒤, 내 꼴을 내려다봤다. 데운 시럽의 단내가 코를 찔렀다.
생각보다 더 정통으로 뒤집어썼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시럽이 스며들고 있었다.
엉망이 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트레이 위에 올려져 있던 또 다른 시럽 병이 나와 부딪친 하녀의 앞치마로 떨어지며, 그녀도 온통 시럽투성이가 되었다.
그래, 니엘라 말이다.
“…….”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니엘라 역시 크게 놀랐는지, 도통 표정의 변화가 없던 얼굴에 당혹감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런 식으로 표정을 관리하는 건 오랜만이라 심호흡이 필요했다.
나는 꽥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ㅇ…… 아니, 괜찮아?”
“아, 저는 괜찮습니……”
“어디 봐. 앞치마가 엉망이 됐어!”
“고, 공녀님이야말로,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아냐, 아냐. 내가 미처 뒤를 돌아보지 못한 탓이지! 어떡해, 머리카락까지 다 끈적끈적하잖아!”
내가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자, 니엘라가 점점 더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프리츠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저지했다.
“이봐, 1등. 지금 네가 저 하녀보다 두 배는 더 끈끈해. 그리고 너, 니엘라. 공녀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자비를 구하……”
“혼내지 마세요, 전하!”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려니 입이 다 썼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시늉을 하며 니엘라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안 되겠다. 우리 집에 가서 씻을래?”
“예?”
“내 잘못이잖아. 사과의 표시로 새 옷을 선물해 줄게.”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공녀님.”
“내가 가면 너 엄청 혼날걸.”
“…….”
“나 때문에 네가 혼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같이 가자. 금방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해.”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에야 내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깨달았다.
프리츠가 조심스럽게 나를 말렸다.
“저기……. 아무리 잘못이 크다 해도 대뜸 블라스코로 끌고 가는 건 좀 과하지 않아, 공녀? 내가 시종장에게 말해 적당한 벌을 주고, 똑바로 교육하도록 지시를 내려 두지.”
“네?”
“얘 일 잘하는 애야. 불쌍한 애기도 하고. 물론 평민의 목숨 따위야 공녀에 비하면 하잘것없겠지만.”
“어, 으음.”
아 참, 우리 집 블라스코지.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라는 무관용의 블라스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감히 내게 시럽을 뿌려? 너 우리 집에서 된통 당해 봐라’라는 뜻일 거라는 걸 간과했다.
‘블라스코에 끌려가는 것보단 주인집에서 호되게 야단맞는 게 낫겠구나.’
내 침묵을 불길하다 여겼는지, 프리츠가 허겁지겁 말을 얹었다.
“1등, 너도 몇 년 전까지 평민이었으니 알 거 아냐? 동질감이라도 좀 느껴 보지 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려 황태자가 굳이 평민 하녀를 보호하려 드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다. 흠. 나는 가늘어진 눈초리로 프리츠를 쳐다보았다.
‘아는구나, 너?’
니엘라가 네 사촌인 거.
어쩐지, 하녀를 대하는 것치곤 묘하게 말투가 부드럽더라. 프리츠를 향한 내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럼 너도 한 패니? 나만 보면 얼굴 붉히는 건 다 고도의 전략?’
그때였다. 응접실 밖에서 중후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무슨 소란이냐?”
낯선 목소리였지만,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오르겐 후작. 이 저택의 주인이 돌아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