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천천히 고개를 들자, 서너 발자국 뒤에서 이쪽의 상황을 관전하는 노인이 눈에 띄었다.
나는 후작의 얼굴을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인물 1순위라며 아르닌 언니가 그의 초상화를 보여 주었던 덕이다.
후작은 헤르젠 할아버지와 비슷한 지긋한 나이의 중후한 신사였다. 갈색 머리칼 사이사이가 희끗했으나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풍채는 헤르젠 할아버지보다는 훨씬 작았다. 대신 재빠르고 영리한 산짐승 같은 인상이 지배적이었다.
“호오.”
마찬가지로 나를 발견한 후작의 낯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스쳤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전하.”
그 역시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블라스코의 꼬마 숙녀께서 이곳엔 어인 일로 방문을?”
“제가 초대했습니다, 할아버님.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급히 따라 나온 황태자가 나를 비스듬히 가리고 섰다.
“아카데미에서 쌓은 인연으로, 마침 공녀가 이번 여름에는 수도에서 머문다고 하기에 초대했습니다.”
“아, 그랬지요. 좋은 시간 보내셨고요?”
“그럼요. 회의는 잘 마치셨습니까?”
“물론, 아무 문제도 없었답니다. 사소한 몇 가지를 빼면요.”
후작의 주름진 얼굴이 얼핏 자상한 미소를 그려 냈다. 그가 매끄럽게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공작의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인다 했더니, 귀한 막내 따님이 이곳에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순간, 짐승의 갈고리 같은 발톱에 옴짝달싹 못 하고 잡힌 것만 같은 강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후작이 고압적인 눈으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초면이지요, 어린 아가씨?”
“……네, 카티샤 블라스코입니다.”
나는 한 박자 쉰 다음,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활짝 웃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늘 후작님이 궁금했거든요.”
“이 늙은이가요?”
“네. 아버지와 언니, 오빠는 아스트로카 귀족들이나 오르겐 후작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요. 그래서 왜 그럴까, 항상 의아했어요.”
어린애처럼 보이자. 공부만 할 줄 알지, 세상의 이치나 정계의 상황에는 아직 무지한 어린아이로.
헤르젠 할아버지는 약자를 자처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이 할아버지가 블라스코의 비극에 대한 실마리를 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거잖아.’
사람은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상대에게 의외로 많은 것을 쉽게 털어놓는다.
‘슬프지만, 내가 센 척한다고 먹힐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하녀는 왜 그리 꽉 붙들고 있을까요? 이 아이가 공녀께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니요, 반대예요. 제가 이 아이에게 시럽을 쏟았거든요.”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누가 보아도 둘 중 더 시럽 범벅인 건 내 쪽이었다. 약간 민망해졌다.
“이 아이가 계속 여기 있다간 혼이 날 것 같아서, 제가 공작저로 가자고 제안했어요. 우선 씻고 새 옷도 선물하고 싶어서요.”
“흐음.”
“허락해 주시겠어요? 이대로 두고 가기가 너무 마음이 쓰여서요……. 절대 해코지하지 않는다고 맹세할게요. 아버지께도 잘 말씀드리고요.”
후작은 잠시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온화함 속에 가시를 품은 시선이었다.
“마음이 따듯한 아가씨로군요. 아비나 형제들과는 다르게 예의도 있고.”
그 말을 듣자마자 욱해서 입꼬리를 무너뜨릴 뻔한 것을 겨우 유지했다.
참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굴면 분명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못해도 한마디는 흘리게 될 테니까.
“예전에 블라스코에도 꼬마 숙녀님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그래, 이런 거.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속으로 재촉했다. 좀 더 해 봐, 후작 할아버지.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은 오르겐 후작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먼 황금 사막에서 온 여자였지요. 참 예뻤는데 말이에요.”
사막.
그 두 글자가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내가 지난 5년간 적지 않게 들어 온 단어였다.
사막. 사막의 냄새. 그곳의 냄새를 몰고 다니던 사람…….
후작이 허리를 조금 굽혀 나와 키를 엇비슷하게 맞추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착한 사람은 다들 일찍 죽고 말지요.”
“……슬픈 일이네요.”
“그래요. 그러니 오래 살아남으려면 못되고 영악하게 굴어야 한답니다, 공녀. 공녀의 아비처럼요.”
“…….”
“때로는 미친놈처럼. 양아치처럼. 내일이 없이 사는 이처럼.”
“…….”
“그래야 먹히지 않고 살아남는답니다. 명심하도록 하세요. 루티어드는 세상의 명암 같은 것은 공녀에게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니.”
그렇게 말을 맺은 후작이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가 내 옆에서 조용히 손을 모은 니엘라에게 명령했다.
“니엘라, 공녀님께서 네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시는구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예, 각하.”
“조심히 다루어 주십시오, 공녀. 일을 잘하는 아이라.”
나는 여전히 인자한 얼굴의 후작을 빤히 쳐다보다가, 기계적인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할게요. 이 아이는 곱게 돌려보내 드릴 테니 너무 염려 마시고요.”
가볍게 감사 인사를 건넨 다음, 여즉 붙들고 있었던 니엘라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내 힘이 강했는지, 니엘라가 조금 휘청거리며 따라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작저를 나왔다.
* * *
‘흠……. 영리한 것 같기도 하고, 헛똑똑이인 것 같기도 하고.’
후작은 저택의 계단을 내려가는 소녀를 지그시 관찰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주황색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멀어졌다.
‘루티어드가 왜 순순히 양딸로 받아들였는지는 알겠군.’
어릴 적에 먼발치서 슬쩍 보았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제법 크고 나니 알겠다.
‘죽은 동생의 연인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라, 차마 내칠 수가 없었나 보지?’
죽은 여자의 이름이 세레이나였던가? 그 이름은 후작에게도 루티어드 블라스코만큼이나 지긋지긋했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 여자는 16년 전 블라스코와 황실 사이에서 벌어졌던 지저분한 치정극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찜찜하게.’
후작은 손자 프리츠의 눈이 아닌 척 몰래 소녀의 뒤꽁무니로 달라붙는 것을 짧은 시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는 단호하게 손자에게 못 박았다.
“정 주지 마십시오, 전하.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아이입니다.”
“…….”
“블라스코는 안 됩니다. 왜인지는 아시지요?”
한참을 망설이던 프리츠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블라스코 공녀와 만난 것도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는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심기가 어지러우실 테니.”
“예, 알고 있습니다.”
손자의 대답을 이끌어내면서도, 후작의 시선은 저택을 떠나는 공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손자에게 언질을 받아, 후작은 카티샤 블라스코가 오늘 저택을 방문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니엘라에게 하녀 복장을 입혀 응접실에 놓아두었더니, 수확이 꽤나 짭짤하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후작은 소녀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뒤, 불안하게 그를 응시하는 황태자를 향해 돌아섰다. 입가에 걸렸던 회심의 미소는 어느새 정답고 인자하게 뒤바뀐 후였다.
* * *
블라스코의 마차는 아직 후작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타운 하우스의 정문에서 웬만큼 떨어졌다고 판단했을 때, 나는 빙글 몸을 돌렸다.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던 니엘라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공녀님?”
“훈련 잘 받았더라, 니엘라.”
내가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니엘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어깨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찝찝하단 말이지.”
“무엇이……?”
“네가 하필 내가 방문하기로 한 날 응접실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는 게 말이야. 훈련하기도 바쁠 텐데.”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굳힌 니엘라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아까 니엘라와 몸이 부딪혔을 때 확신했다. 탄탄하게 잘 잡힌 근육, 그리고 용케도 쟁반을 놓치지 않은 균형 감각. 꽤 쓸 만했다. 블라스코의 문하생 발탁 시험 정도는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니엘라는 동요한 기색 없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공녀님. 저는 기사들이 할 법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착각했나 봐.”
착각은 무슨. 후작의 입장에서는 아싸, 기회다, 싶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니엘라를 직접 데리고 나왔으니, 블라스코에 니엘라를 심으려는 후작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딱 한 가지, 내가 니엘라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점만 빼면 참 완벽한 계획 성공이었을 텐데.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쪽이 키운 첩자, 내가 먼저 찾아서 감사히 잘 데려갑니다.’
니엘라가 물어 올 정보들만 오매불망 기다리게 될 후작에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난 니엘라에게 그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을 거니까.
반대로 빼먹으면 몰라.
“루시스 경.”
내 부름과 동시에, 니엘라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몸을 피하려는 순간, 루시스 경이 인정사정없이 검집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얌전히 있으면 곱게 대해 줄게. 그리고 이거.”
나는 루시스 경에게 로브를 받아 니엘라에게 푹 덮어씌웠다. 커다란 후드가 니엘라의 얼굴을 반 이상이나 가렸다.
“고, 공녀님?”
“쓰고 있어. 얼굴 보이지 마.”
나지막하게 경고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작은 눈표범이 내 발치로 뛰어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드레스 자락에 덕지덕지 묻은 시럽을 혀로 핥는 눈표범을 품에 안았다.
너도 쟤 보지 마.
“루시스 경, 저 애를 저택에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마가렛에게 목욕을 도와주고, 새 옷도 입혀 주라고 전해 주고요.”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지 않으시고요?”
“곧 언니가 데리러 올 텐데요, 뭐.”
거리에 하늘색 오러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내 오러를 끄집어냈다.
맑은 노을빛 오러가 공기 중으로 사르륵 녹아들었다. 오러는 오러 유저들의 눈에만 보이고, 현재 아스트로카에 오러 유저는 블라스코 직계들뿐이니 비상 연락망으로 제격이었다. 과연, 아르닌의 오러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루시스 경에게 손짓해 그들을 마차에 태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