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 * *
루시스 경과 니엘라를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떠나는 걸 확인하자마자 안고 있던 눈표범을 확 째려보았다.
“아이칼.”
눈표범이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나는 당장 눈표범을 내려놨다. 그리고 와르르 잔소리를 쏟아 냈다.
“너 좀 혼나야 해. 주인님 일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아카데미에서는 안 그러더니, 갑자기 왜 그래? ……당장 안 돌아와, 너?”
눈표범의 모습이 휙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삐딱하게 쭈그려 앉은 백발의 소년이 나타났다. 손등에 뺨을 대충 기댄 아이칼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고아하고 정결한 인상의 소년이었지만, 은푸른빛 눈동자에는 불만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달라.”
“뭐가 달라?”
“내가 옆에 있을 때 누군가 접근하는 거랑, 내가 없을 때 네가 다른 인간과 함께 있는 거랑. 다르다고. 완전히.”
아이칼이 내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시럽으로 진득했던 프릴 사이사이에 살얼음이 끼더니, 곧장 허공으로 증발했다.
그가 이어 내게 손짓했다. 못마땅하게 마주 쭈그려 앉자, 끈끈하게 엉킨 내 머리카락에도 아이칼의 손이 다녀갔다.
“항상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카티.”
“……뭔데?”
금세 부드럽게 풀린 내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쓸어내리며, 아이칼이 목소리에 지그시 힘을 실었다.
“나를 옆에 두지 않을 거면, 아무도 네게 가까이 오게 허락하지 마.”
“왜애.”
“자꾸 네 오러에 이상한 게 묻어오잖아.”
“이상한 거라니. 황태자는 오러 유저가 아니야, 아키.”
“비단 오러만 말하는 게 아냐.”
아이칼이 다시금 내 손을 찾아 쥐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주황색 오러가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가, 그의 냉기를 덧입고 다시 내게로 흡수되었다. 어깨를 파드득 떠는 나를 아이칼이 더 세게 붙잡았다. 평소와 다르게 조급하게까지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내가 아는 네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게 싫어.”
“…….”
“네 무언가가 바뀐다면, 무조건 내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해.”
제가 그렇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는 듯, 아이칼이 눈짓으로 물었다. 나랑 키가 똑같은 꼬꼬마였을 때보다 더 서늘하고 호전적으로 벼려진 눈이었다.
“그때처럼 또 쓰러질래?”
그러나 묻는 말의 내용만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결국에는 내 걱정이다. 사실 아이칼이 성질을 부릴 때는 늘 내 안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민망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그래…….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
“겨우 4년인 거겠지. 넌 경각심이 너무 없다. 그리고 그 머리 노란 애, 네 가족들이랑 사이 안 좋다면서?”
“그건 그렇지……. 아, 알겠으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 하지 마.”
아이칼이 가끔 냉기를 흩뿌릴 때면 아무리 나라도 겁이 났다. 크면서 오러에 조금씩 더 예민해지고 나니, 나는 아이칼의 체내를 휘도는 오러가 얼마나 방대하고 흉포하며 무자비한지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오러를 방출하면 나 같은 인간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저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까도, 그렇게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잖아…….”
“놀랐어?”
“그럼 안 놀라? 난 간이 작은 인간이란 말이야.”
아이칼은 내가 움찔거리는 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꼬꼬마 시절보다 눈치를 배는 더 키운 소년이 곧장 새초롬하게 눈매를 휘었다.
“알겠어. 미안해. 이제 안 그런다.”
그가 거리낌 없이 방출하던 한기가 미약한 찬바람만 남긴 채 갈무리되었다. 아이칼이 살살 나를 달랬다.
“그러니까. 다른 인간을 나 대하듯 하진 않을 거지, 카티?”
“……이 질투 대마왕.”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괜스레 투덜거렸다.
사실 아이칼은 눈표범이 아니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 같은 걸지도 모른다. 저렇게 작정하고 꼬시는 얼굴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내…… 내 사회생활을 얼마나 훼방 놓을 셈이야, 요놈!”
“대답해.”
“알겠어. 애초에 내 옆에 너 말고 누가 있다고. 왜 이렇게 불안해 해?”
“네가 혼자 있는 걸 싫어하니까.”
“…….”
“나로는 만족을 못 하잖아. 늘.”
아이칼이 불만과 체념이 뒤섞인 한숨을 쉬었다. 나는 흠칫해서 주위 양옆을 살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그게 왜 또 그렇게 돼? 난 너만 있어도 충분해. 맨날 말해줘도 이렇게 못 믿더라.”
“확인하는 거야. 안심하려고.”
“……하여간, 넌 나를 너무 좋아해.”
나는 밉지 않게 아이칼을 흘기며 양 뺨을 쭉 잡아 늘렸다.
아이칼은 눈썹만 꿈틀했을 뿐 얼마간 내게 잡혀 주었다. 개운하지는 않지만 이럭저럭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고개를 비틀어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온다, 네 언니라는 인간.”
낮게 속삭인 아이칼이 곧바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미처 그를 안아 들기도 전에, 나는 머리 위에서부터 떨어진 아르닌 언니의 품에 쏙 안기고 말았다.
* * *
블라스코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고 보니, 아버지가 먼저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뭐라고 운을 떼기도 전에 다다다 달려가 안겼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오전하고는 기분이 완전히 딴판이다, 오렌지?”
“으헤헤.”
그야 목표했던 걸 다 이루고 왔으니까!
나는 헤벌쭉 웃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총총 올라갔다.
“그래서, 황태자하고는 뭐 했어?”
아버지가 지나가듯 물었다.
나는 순식간에 식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미행?”
“청소지. 네 언니 오빠가 길을 미리 닦아 놓았을 뿐이야.”
홱 고개를 돌리자, 아르닌과 베르너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가 시켜서 한 거야, 카티! 절대 널 스토킹한 건 아니고.”
“맞아. 아버지가 시켰다.”
조금만 더 후작가에서 미적거렸다간 언니와 오빠, 나, 그리고 황태자와 오르겐 후작까지 5자 대면을 할 뻔했다.
“저것들이, 진짜.”
아르닌과 베르너를 밉지 않게 흘긴 아버지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나를 달랑달랑 들어다 다이닝 룸의 의자에 앉혔다. 호미 주방장님의 저녁 특선 코스 요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작저에서 황태자랑 무슨 얘기를 했는데?”
이 화제는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집요했다. 어쩐지 ‘황태자’를 발음할 때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별거 안 했는데. 그냥 차 마시고, 선물도 드리고요. 아카데미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랬어요.”
“무슨 선물?”
“타박상에 바르는 약초즙이요. 사실, 지지난주에 아카데미에서 아키가 전하의 손등을 긁어 놓은 적이 있거든요.”
“신수에게 공격을 당했어? 상처가 오래 남았겠군.”
“멍이 아직 안 빠졌더라고요. 그래도 동급생이고, 또 그건 어디까지나 제 과실이니까. 사과드리고 왔어요.”
“……그렇게 착하게 살 필요 없어, 카티.”
나는 입에서 살살 녹는 연어를 행복하게 음미하다 멈칫했다.
아버지가 내 접시에 작게 토막 낸 고기를 놓아 주며 흘리듯 덧붙였다.
“정 많은 사람은 오래 못 살아.”
“착한 사람은 다들 일찍 죽고 말지요.”
오르겐 후작이 충고랍시고 건넸던 말들이 환청처럼 겹쳐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착하게만 살 생각은 없었다. 착하기만 하다는 건 호구와 동의어고, 난 헤르젠 할아버지에게서 호구처럼 살지 말라고 교육받은 애였다.
“그런데 네 침실에 올려다 놓은 건 뭐야, 카티?”
아르닌 언니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나는 잠시 그 말뜻을 고민하다, 곧 니엘라를 가리키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세작이요.”
“……뭐?”
“오르겐에서 블라스코에 심어 놓으려고 준비하고 있던 세작이에요. 확신하는 건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일단 빼 왔어요.”
아버지, 그리고 언니 오빠. 세 명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아버지가 깍둑깍둑 썰어 준 고기를 꼭꼭 씹어 삼키고,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나는 [지.우.마>의 존재에 대해 가족들에게 실토할 생각이었다. 올해는 제국력 442년. 슬슬 원작이 제대로 시작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니엘라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이제 더 숨길 이유가 없었다. 내 조개 로켓 속 아공간과,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사라진 세계’,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내용, 할아버지도 그 내용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 내용을 일단 가족들에게 공유해야 오르겐 후작이 어떤 수를 쓰든 적절히 물리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실은, 저와 할아버지가 함께 본 ⎕-이 있는데, 어?”
그러나 나는 첫 문장을 떼자마자 당황했다.
베르너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뭐가 있었다고, 카티?”
“그게, 제가 잡아 온 ⎕ ⎕⎕⎕⎕⎕ 소녀가 ⎕⎕⎕⎕⎕ ⎕⎕⎕ ⎕⎕⎕ ⎕⎕⎕ ⎕⎕⎕⎕ 빼 간다는…….”
제가 잡아 온 그 니엘라라는 소녀가 블라스코에 잠입해 정보를 오르겐 후작가로 빼 간다는 내용인데,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정작 내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거의 없었다. 상당 부분이 묵음 처리되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카티, 너무 작아서 안 들려.”
“네가 잡아 온 소녀가 뭐?”
베르너와 아르닌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자연스럽게 말을 바꾸었다.
“자꾸 저를 예의 주시하길래 살펴봤더니, 훈련받은 태가 확연히 났어요. 다른 사용인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수상해서 일부러 시럽을 쏟은 뒤에 제가 데려가겠다고 하니 후작이 금방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더 의심스러웠어요.”
언제 목소리가 안 나왔냐는 듯 말이 술술 이어졌다.
나는 무척 아쉬워졌다.
‘에잇, 책 안 읽은 사람에게 스포하면 안 되나 봐.’
되짚어 보니 ‘사라진 세계’도 내게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했다. ‘세계’도 그러할진대 나라고 할 수 있을 리가.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뭐, 어차피 중요한 건 [지.우.마>의 내용이 아니라 니엘라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혹시 따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데려온 거예요. 오르겐 후작의 측근이라면 알고 있는 것들도 많을 테고.”
“흠.”
아버지가 검지로 테이블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나는 아버지의 새파란 눈이 먹잇감을 찾은 들짐승처럼 빛을 내는 것을 발견했다. 테이블 위의 공기가 불온하게 일렁거렸다.
“수련소로 내려보……”
“아니요! 제가 데리고 있을래요.”
이럴 줄 알았어! 나는 가까스로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일회성으로만 쓰고 버리기엔 아까워요. 제가 대화해 볼래요.”
“세작의 입을 여는 데는 말보다 주먹이 더 빠른데.”
“주먹보다는 검이 더 빠르고요.”
아르닌이 나이프를 휘두르며 아버지를 거들었다.
나는 단호하게 포크를 치켜들어 언니의 나이프를 톡 쳐 떨어뜨렸다.
“안 돼요. 저는 그 애를 이중 첩자로 쓸 거란 말이에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