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이중 첩자?”
아버지가 흥미롭다는 듯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아르닌과 베르너는 여전히 못 미더운 듯했다.
“득보다 실이 커, 카티. 믿을 수 없는 자는 없애 버리는 게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좋아. 뒤통수 맞지 않으려면 말이야.”
“방계도 완벽히 신임하지 못하는 마당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카티.”
나는 언니 오빠에게 빙긋 웃어 준 뒤, 아버지와 눈을 맞췄다.
손등에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날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정말 ‘대화’만 할 건 아니지, 막내?”
“그럼요. 내 이름에 걸맞은 성의는 보여 줘야죠.”
어깨를 자랑스럽게 쫙 폈다. 카티샤 아브릴 블라스코. 내 이름 뒤에도 엄연히 블라스코가 붙는다.
‘둘이 말만 주고받으면 대화지, 뭘.’
어떤 말을 어떻게 주고받는지가 중요하겠지만.
내가 음흉하게 입꼬리를 씰룩대자, 아버지가 실소를 흘리며 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지지든 볶든 썰든.”
“썰지는…… 않을 건데…….”
“뒤처리 힘들면 언제든 말하고.”
뒤처리라니. 그렇게 다정하게 무서운 말씀 하시지 말라고요…….
핏물이 배어 나오는 스테이크를 더 먹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거려야 했다.
* * *
저녁을 다 먹은 뒤, 나는 아버지의 집무실까지 따라 올라가 뒹굴거렸다.
평소 일과의 마지막 순서였다. 서재에서 읽고 싶은 책을 꺼내다 읽기도 하고, 그날그날의 잔업을 마무리하는 아버지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일하시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방에 니엘라가 있을 테니 얼른 올라가야 하지만…….’
지난 며칠 아빠에게 잔뜩 투정만 부린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오늘은 황성에도 다녀오셨으니까. 겉으로 티는 안 나지만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창틀에 앉아 바깥으로 다리를 대롱거리자, 뒤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날아왔다.
“금방 끝나.”
“응!”
“다리 흔들지 말고. 떨어진다.”
“으응.”
내 무릎 위에 얌전히 웅크려 있던 눈표범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창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희미한 눈가루가 저 멀리 보이는 수도의 야경 위를 점점이 수놓았다가 차츰 사라졌다.
나는 별을 부수어 뿌린 듯한 야경을 잠시 감상하다가, 다시 서재 바닥으로 폴짝 뛰어들어 왔다.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하나였다. 사막.
“예전에 블라스코에도 꼬마 숙녀님 같은 사람이 있었지요. 지금은 죽었지만.”
곧이곧대로 전해도 되는 이야기가 맞을까? 아직도 블라스코에서 16년 전의 비극은 금기시되는 화제였다.
‘하지만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니야.’
사막. 사막의 냄새.
영령의 탑의 영령들께서도 늘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내게는 설원의 냉기, 유황 섞인 수증기, 그리고 사막의 냄새가 섞여 있다고.
앞의 두 개는 힐라이야와 귀어스트라고 쳐도 마지막 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정작 “사막의 냄새는 뭔데요?” 하고 물었을 때, 시원스러운 대답을 내놓으신 분은 없었다. 헤르젠 할아버지마저도 그 질문에는 답을 피했다.
대륙에서 가장 큰 사막이라 하면 대륙 서부에 자리한 황금 사막뿐이다. 끝없는 모래로 뒤덮인 열사의 땅. 달이 가장 가까이 뜬다는 곳.
‘황금 사막에서 온 여자…….’
내가 알기로, 16년 전에 루티어드 님과 함께 돌아가신 그분의 아내, 즉 내 백모님께선 이웃 나라인 페트로 왕국의 귀족 출신이셨다. 사막과는 관련이 없다.
그럼 그 여자는 누구지?
나는 스툴을 끌고 와 아버지 옆에 붙어 앉았다. 본능적으로, 이 오랜 의문을 해결해 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는 확신이 왔다.
“있잖아요, 아빠.”
“응.”
“블라스코에, 사막에서 오신 분이 있었어요?”
사각사각, 서류 하단에 유려한 서명을 그려 넣던 펜이 우뚝 멈추었다.
“……아빠?”
나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침묵이 길다. 나는 살짝 고개를 빼고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 * *
새끼 눈표범은 소리 없이 발코니에 착지했다. 까만 젤리가 박힌 발바닥이 난간에 닿자마자, 작은 짐승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훌쩍 키가 큰 백발의 소년이 대신 땅을 디뎠다. 목덜미를 스칠 만큼 짧게 자른 백색 머리카락이 훈풍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최근 들어 아이칼은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근 몇 년간 카티샤의 곁에 딱 붙어 있으며 ‘기분이 더럽다’는 감정 자체를 느껴 보지 못한 지 꽤 되었는데, 올해부터는 무언가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
누군가 자꾸만 머릿속에 대고 속살거린다.
‘442년…….’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거야.’
‘마주치자마자 죽여 버려. 뒤탈 없이.’
아이칼은 정체를 구별할 수 없는 그 음성을 언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15년 전, 교단을 처음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깨어나자마자 그 답답한 곳을 나가.’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아이칼.’
예언처럼 그를 끌어당기는 강렬한 충동.
‘잘 찾았네.’
카티샤를 만난 이후로, 10년간 그를 콕콕 쑤시던 그 음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렇게 5년 동안은 잠잠했는데…….
요즘 들어 다시 그를 건드린다.
‘442년. 기억해.’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한 해야.’
“꺼져, 좀.”
아이칼은 신경질적으로 귓가를 매만졌다.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을 쾅쾅 울려 대는 그놈의 음성 때문에 신경 줄이 닳을 대로 닳은 상태였다.
아무리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군림한다 해도, 신수는 근본적으로는 짐승이다. 짐승에게 육감이란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타는 목마름과도 같아서, 이성으로 아무리 억눌러도 해갈되지 않는 영역이다.
게다가 점차 성체화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체화 직전의 신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장 흉악한 살상 무기다. 오러를 뜻대로 조절하기가 힘들어진다.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는 오러를 카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갈무리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그 애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힘을 얼마나 빼고 있는데.
‘그냥 뒀다간 단단히 어긋날 거야. 단단히…….’
이 와중에, 기묘한 음성은 정작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틀어진 게 대체 뭔데?
‘카티샤에게 무슨 일이 생기나.’
아니면 웬 놈이 접근하나?
아이칼은 카티샤에게 손을 잡힌 채 이도 저도 못 하고 얼굴만 붉히던 금발 머리 놈을 떠올렸다. 그러자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카티샤가 그놈의 수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인 것 같기도, 아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랑 조금 놀아도, 나는 금세 네게 다시 돌아갈 거야.”
오래전 겨울에 속삭였던 그 약속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 애는 언제나 늘 그에게로 돌아왔다. 자신을 잊어버리거나, 홀로 내버려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럭저럭 용인하며 지냈다. 사실 카티샤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이들이 한둘도 아니었다. 당장 이 집 인간들부터 카티만 보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티를 낸다.
‘그러면 그놈은 뭐가 다르지?’
뭐가 달라서 이렇게 열이 뻗치지.
아이칼은 카티샤가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황태자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던 진한 아쉬움을 똑똑히 보았다. 카티샤에게 잡혔던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연신 꿈지럭대는 것도 눈치챘다.
‘계속 잡고 싶겠지. 카티 손은 작고 따듯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나락까지 뚝 떨어졌다. 제가 5년 동안이나 맘껏 독차지했던 손을 생판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카티샤의 바로 옆자리는 언제나 아이칼의 것이었다. 불순물이 끼어들 거라는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상정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함이 훼손되는 순간. 호흡처럼 당연하던 것들이 순식간에 낯설어지는 경험. 아이칼은 저가 예비하지 않은 순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쉼 없이 그를 괴롭히는 이 망할 음성처럼.
‘반드시 기분 나쁠 일이 생길 거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걸.’
잠시 잠잠하던 음성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나직하게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였다.
지금 짜증 나는 게 누군데 네가 내 머릿속에 대고 지랄이야.
아이칼은 사나운 기백을 숨기지 못한 채 카티샤의 침실로 통하는 발코니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두꺼운 걸쇠가 삶은 호박처럼 으깨졌다.
그의 심기를 반영하듯,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삭풍이 침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이칼이 창틀을 딛고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
카티샤의 침실은 비어 있지 않았다.
“아…….”
밝은 금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묶은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공간을 휩쓸고 지나가는 사이,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칼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었다.
‘거 봐, 뭐랬어.’
얼어붙은 시선이 낯선 소녀의 눈, 코, 입을 따라 미끄러졌다. 손이 뒤로 묶인 소녀가 때 아닌 찬기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눈은 아이칼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와…….”
소녀가 나직이 경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정말이지.’
동시에 머릿속의 누군가,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길게 탄식했다. 그러나 아주 사납고 불손한, 그리고…….
‘보자마자 죽여 버리고 싶다니까…….’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듯, 들끓는 고양감을 누르지 못한 음성으로.
‘저거구나.’
신수의 직감이 확신했다. 바로 저거였다. 이 거슬리는 목소리가 내내 중얼거리던 ‘기분 나쁜’, ‘어긋난’ 것들의 원흉.
그가 기필코 찾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그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칼의 은푸른빛 눈동자에 탁, 비이성의 불씨가 떨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