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아버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잔잔하던 서재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게를 달리했다.
아버지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한 뺨이 하얗게 질려 있다. 멈춘 펜촉에서 잉크가 배어나 종이에 얼룩을 남기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아버지의 시간만 멈춘 듯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기다렸다. 무어라 말을 얹으면 안 되겠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렸을 때 봤던 모습과는 달라.’
헤르젠 할아버지나 돌아가신 루티어드 님을 떠올릴 때의 아버지는 늘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끝없이 파문을 그리며 퍼지는 수면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얕은 늪은 헤치고 나오면 그만이다. 곁이 비어 외롭다면 빈자리를 다른 누군가 채워 주면 된다. 완벽하게 대신하지는 못할지라도.
하지만 지금 아버지를 에워싼 감정의 노도는 그런 것과는 아예 궤를 달리했다. 저것은…….
고통.
선연한 고통이다.
대답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짧은 사이 푹 잠긴 목소리였다.
“있었지. 옛날에.”
“……어떤 분이었어요?”
“예뻤어, 엄청.”
아버지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서류에 유려한 서명이 적혔다. ‘루티어드 아셀 블라스코’.
마음이 아릿하게 아팠다.
“……엄청 미인이셨나 보다!”
“당연하지. 내가 반한 여자인데.”
내가 짐짓 밝게 말하자, 아버지의 눈 밑에 드리웠던 그늘이 살짝 걷히는 게 보였다.
펜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손등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댔다. 먼 기억을 더듬는 듯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일렁거렸다.
“너무 예쁜 사람이었어. 누구라도 마주 보면 웃어 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친절하고, 상냥하고. 나처럼 대륙 이곳저곳을 탐험하러 다니는 걸 좋아했고. 집안에서 반쯤 내놓은 자식이라는 점도 비슷했고.”
“우와아, 그렇구나…….”
“내가 스물너덧 살이었나, 그때 황금 사막에서 만났다. 서해와 인접한 사막 근처에서 스쾨티모르가 종종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고 가 봤던 적이 있었지. 결국 가오리는 못 봤지만.”
여전히 놀랄 만큼 젊고 잘생겨서인가, 과거를 회상하는 아버지는 꼭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가 좋았는데. 내 멋대로 설치고 다닐 수 있어서.”
착잡한 숨을 내쉰 아버지가 의자를 돌려 앉으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얼른 스툴을 끌고 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내 뺨을 꼬집었다.
“세레이나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서 들었어? 영령들께서 말씀해주시던?”
“으음, 네에. 저번 방학에 탑에 올라가서…….”
나는 어물쩍 대답을 넘겼다. 눈치껏 오르겐 후작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는 뺐다.
‘성함이 세레이나구나. 엄청 예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버지가 그 이름을 한 번 내게 언급했던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4년쯤 전이었던가?
“세니가 살아 있었다면 네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피실 웃었다. 농담조였지만, 나는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내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분이라면, 아버지가 무척 사랑했던 분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은 이상 그분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심장 언저리가 따끔했다.
‘어?’
나는 당황해서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 위를 짚었다.
어, 방금 여기가 좀 따끔거렸는데…….
내가 당황하자, 아버지가 즉각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어, 아니요. 아니에요. 착각인가 봐요.”
이상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기묘한 흉통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다시 생각을 세레이나 님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세레이나 님은 왜 돌아가신 거지?’
혹시 그분의 죽음도 16년 전 블라스코의 비극과 관련이 있나?
아버지는 내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런 의문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조금의 침묵 후에, 아버지가 천천히 말했다.
“세니는 나 때문에 죽었어.”
“아빠 때문에……?”
“응. 내 미련한 아집 때문에.”
“……16년 전에요?”
“아니, 15년 전이지. 내가 형 대신 공작위에 오른 직후에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더라고.”
나는 아버지의 나직한 설명을 들으며 상황을 맞추어 보았다.
16년 전, 블라스코의 비극이 닥쳤을 당시는 모종의 이유로 황실과의 불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일촉즉발의 시기였다.
그 상황에서 가주 승계식을 앞두고 있었던 루티어드 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대신 가주 자리에 오른다. 가문 사람들의 눈조차 속이면서.
아직도 블라스코의 사용인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듣기로는 쌍둥이 형제가 외모뿐 아니라 검술 실력이나 취미, 좋아하는 것들까지도 꽤 비슷했다고 했다.
다만 사소한 차이라면, 루티어드 님께서 조금 더 다정하고 진중한 성격이셨던 데 비해 루테, 우리 아빠는 호기롭고 다혈질이었다는 것 정도다.
고작 그 차이였으니 아빠가 루티어드 님을 대신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딱 하나, 세레이나 님의 존재만 빼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그분을 멀리 떠나보내야만 했겠구나. 최소한 가문이 안정될 때까지는.’
그렇게 떨어져 있던 중에 변을 당하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치만……. 그게 아부지 탓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작게 웅얼거리자, 아버지가 바람 같은 실소를 흘렸다.
“글쎄다. 말한다고 내 꼬맹이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내게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는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한참 만에야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좀 전보다 한층 더 음울하게 잠겨 있었다.
“형의 죽음은, 카티.”
“…….”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내가 뭘 했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거라고……. 인간의 힘으로 감히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은 숨이 쉬어져. 비겁하지만 스스로 합리화할 수는 있지. 내 잘못은 아니었다고.”
“아빠…….”
“그런데 내가 충분히 지킬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사람의 죽음은.”
아버지의 눈매가 조용히 일그러졌다. 푸른 눈이 나로서는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수렁 속으로 천천히 잠겨 들었다.
“그건 어떤 변명으로도 무마할 수 없는 내 죄야.”
아니야.
순간 그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치고 올라왔다.
아냐, 그거.
반박하고 싶다. 그건 아빠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향해 있었지만, 나는 아빠가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더듬는 듯, 눈동자의 초점이 일정치 않았다.
“내가 내 여자를 죽으라고 등 떠밀어 보낸 게 아닌가…….”
“…….”
“그게 살인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아직까지도 가끔 고민스럽다. 세니는 죽을 때까지 나를 원망했겠지.”
아닌데. 분명히 그건 아닐 건데.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레이나 님을 모르니까.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미 떠난 지 오래인 사람의 감정을 내가 무슨 수로 안다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입술만 잘근거리는 나를 아버지가 흘끗 일별했다. 그러곤 커다란 손을 내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티, 소중한 걸 지키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최악인 거야. 상흔이 오래 남지. 그러니까 너는…….”
아버지는 아마도 나는 그러지 말라고 말을 맺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의 침묵 끝에 아버지는 말을 바꾸었다.
“바라건대, 네 삶에는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는 순간 자체가 없었으면 한다. 비단 너뿐만이 아니라, 베르너도. 그리고 아르닌도.”
“…….”
“너희는 늘 명쾌한 최선의 길만 걸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빠의 그 말로 나는 이 화제가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더 이상 내게 세레이나 님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자, 시간이 늦었다. 대왕 오렌지 되려면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
아버지의 목소리에 급작스레 심지가 다시 섰다. 만면에 드리웠던 그늘을 싹 거두어들이고, 거짓말처럼 다시 현실의 공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의자에 파묻다시피 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의 나를 보곤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늘 그랬듯 날 침실까지 데려다주려는 거다.
“이만 올라가자, 카티.”
하지만 내 근본적인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면요, 아빠. 하나만 더.”
사람들이 자꾸 내게서 사막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아빠도 그래요?
“있잖아요, 저 혹시 세레이나라는 그분과 닮…….”
닮았어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 마지막 질문은 미처 끝맺어지지 못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피부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오러의 폭동을 고스란히 느꼈다.
“……!”
아빠의 것은 아니었다.
“카티?”
“아…….”
맹렬한 기세의 오러가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부터 들이닥치고 있었다. 나의 일부처럼 익숙한 누군가의 오러였다. 희고, 차다.
“아, 아키.”
“뭐라고?”
나는 그제야 창문 밖으로 뛰어나간 새끼 눈표범이 아직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칼이 이 저택에서 갈 만한 곳이라곤 딱 한 곳밖에 없었다.
‘내 침실!’
나는 판단이 서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로 넘어진 스툴에 발이 걸릴 뻔한 나를 아버지가 아슬아슬하게 붙들었다.
“카티샤, 왜 그래?”
“아, 아, 아…….”
폐부를 찌그러뜨릴 기세의 거센 압박감에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거의 목청을 쥐어짜듯 꽥 외쳤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뭐?”
아버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사악 날아갔다. 아빠도 느낀 것이다.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는 이 거대하고 흉포한 오러의 회오리를.
“내 집에서 지금 누가 감히…… 카티샤!”
아버지가 뒤늦게 나를 소리쳐 부를 즈음, 나는 이미 집무실을 달음박질쳐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이칼이 니엘라를 발견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