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 * *
니엘라는 제게 닥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윽, 끄, 흐윽…….”
눈이 멀도록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소년을 맞닥뜨린 바로 다음 순간, 그에게 무자비하게 공격당하고 목을 졸리는 이 상황을.
‘저런, 게……. 붙어 있다곤, 안 했…….’
분명 사전에 블라스코가의 세 직계들에 관해 조사할 때 이런 내용은 없었다. 기껏해야 막내 공녀가 늘 신수 이클라스족의 쿼터를 끼고 다닌다는 게 전부였다.
‘쿼터? 이게……?’
이미 공녀의 침실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부 저 소년이 손조차 쓰지 않고 불러낸 것들이다.
니엘라와 눈이 마주치고, 단 3초 만에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낚아챈 신수가 발버둥 치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력이 어마어마했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가 몸부림칠 때마다 목의 여린 살가죽에 상처를 냈다.
“왜, 허윽, 왜, 이러는……!”
“왜?”
소년의 목소리는 그의 생김새만큼이나 오묘한 구석이 있었다.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고, 음색이 순간순간 변한다.
“이유가 어디 있어? 거슬리는 걸 치우겠다는데.”
새파란 얼음장 위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독액 같은 음성이었다.
생글 휘어진 은푸른빛 눈동자의 동공이 확연히 좁아져 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얼핏 드러나 보였다.
벽을 타고 덩굴처럼 기어오른 얼음 창이 니엘라의 사지를 속박했다. 아이칼의 손등을 긁으며 그를 노려보는 니엘라의 눈에 마찬가지로 독기가 번졌다.
‘이렇게 쉽게 죽어 주려고 이날 이때까지 온 줄 알아?’
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극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신수는 개미를 밟아 죽이듯 자신을 손쉽게 터뜨릴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뜸을 들이는 이유는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죽일 구체적인 방법을.
니엘라의 발버둥이 심해지자, 그녀를 묶은 얼음 줄기들이 벽을 까드득 파고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진동이 저택의 벽면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갔다.
소년이 높낮이 없는 음조로 혼잣말을 했다.
“뽑아 버릴까. 지저분하려나?”
“허억, 흐윽……. 나를, 보고. 기분이 나빠진 이유라도…… 말해.”
니엘라는 헐떡거리며 짜내듯이 말을 이었다.
“이딴 식으로는 못 죽…….”
“하찮은 최후는 싫은가 보지?”
그녀에게 바짝 몸을 붙인 아이칼이 매끈한 입술을 말아 올렸다.
니엘라의 목을 조르던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대신 그녀의 턱을 거세게 움켜쥔 소년이 그녀의 시선을 억지로 제게 맞췄다.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고막에 쑤셔 박듯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좋아. 나도 너를 그저 그렇게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왕이면 지저분한 흔적이 남지 않게 확실히 처리하는 쪽이 낫겠지.”
“이유가, 뭐냐고, 이 미친놈아!”
아이칼의 손에서 해방된 니엘라가 새된 음성으로 빽 외쳤다.
미친놈. 미친 새끼. 공녀는 저가 곁에 끼고 사는 것의 정체가 뭔지는 알고 있는 건가?
소년이 안광을 빛내며 씩 웃었다.
“말했잖아. 이유 같은 건 없다고. 단지 내 기분상의 문제일 뿐이야.”
“개새끼……! 네 주인도 네가 이러는 걸 알아?”
“당연히, 카티는 평생 몰라야지.”
옆으로 뻗은 아이칼의 손에 새하얀 눈과 얼음 결정들이 소용돌이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누군가 아래위로 죽 잡아 늘인 듯이 기다란 봉의 형태로 변했다. 겉면의 유리 같은 얼음이 파삭 깨어지며, 새하얀 자태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검 힐라이야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오러의 폭풍이 침실을 덮쳤다.
한겨울의 삭풍이 따스한 봄의 공기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침실의 모든 것들이 세차게 흔들렸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는 가구들이 들썩거리며 밀려나는 소음에 묻혔다.
초여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도, 실내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산한 음성이 장막처럼 그 위를 덮었다.
“눈이 온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인간.”
“……!”
“피도, 시체도, 비명도.”
백의 교단을 둘러싼 드넓은 설원은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저분한 일들을 두껍게 쌓인 눈 아래로 감춘다.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마물들의 지저분한 사체도, 허락 없이 교단의 영역에 발 들인 인간들의 시신도.
아이칼은 51년간 그런 일을 맡아 온 파수꾼이었다.
거슬리는 것은 치운다. 그리고 눈과 얼음 아래 묻는다.
지겹고 무의미하며 반복되는 일상이었으나, 즐거운 적이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그래, 이것은 ‘사냥’이다.
은푸른빛 눈동자가 새파란 희열로 불타올랐다.
검을 바투 쥔 소년이 그대로 니엘라를 꿰뚫으려는 찰나였다.
“아이칼! 멈춰!”
누군가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정확히 왼쪽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가던 검 끝이 우뚝 멈추었다.
“으아앗.”
이쪽으로 달려오던 누군가가 그새 빙판으로 변해 버린 바닥에서 휘청거렸다. 카티샤였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소녀가 그대로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몸집이 작은 카티샤는 곧 아이칼과 니엘라 사이로 쏙 파고들었다.
니엘라의 백지장 같은 낯을 확인한 그녀가 쯧 혀를 찼다. 그러곤 아이칼을 향해 뒤 돌았다.
“그만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비켜, 카티. 다쳐.”
아직 거두지 않은 검의 날이 그녀의 머리칼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러나 아이칼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사방을 휩쓰는 눈안개 같은 오러의 폭동 역시 그대로였다. 그들이 선 자리만이 태풍의 눈처럼 불길한 적막에 가두어져 있었다.
“너부터 물러나. 나 다치게 할 거야?”
카티샤는 비켜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점차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이칼은 성마르게 지껄였다.
“죽여야 해.”
“아이칼.”
“저거, 죽여야 해, 카티. 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리 와. 괜찮아.”
카티샤가 차분하게 말하며 양팔을 벌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카티샤가 한 발 두 발 그에게로 다가왔다. 주위를 할퀴다 못해 자신에게까지 날을 세우는 오러 따윈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렇게 다가온 소녀가 아이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키 차이 탓에 안은 것보다는 그에게 안긴 것에 가까웠다.
아이칼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따끈하고 보드라운 몸이 품 안에 가득 차며,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로 조곤조곤 흘러들어 왔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쟨 내 친구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
“나는 네가 제일 좋아. 제일 소중해. 알지?”
잘못 짚었어.
그렇게 말하려 아이칼은 입술을 열었다. 이번엔 그 이유 때문이 아니…….
그때, 지긋지긋한 음성이 다시 뇌를 파고들었다.
‘그냥 두면 그 애가 다칠 거야. 저 여자가 그 애의 모든 걸 빼앗아 갈 거라고.’
‘싹을 남겨 두지 마.’
‘지금이 기회야!’
아이칼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몇 달 내내 시달린 탓인지, 극심한 두통이 일었다.
카티샤의 목소리가 그 이를 가는 음성에 묻혀 희미해졌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난 네 앞에 있고. 알겠지?”
“알겠…… 알겠, 어. 카티, 떨어져 봐.”
그의 품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던 카티샤가 흘끔 눈만 굴려 아이칼의 기색을 살폈다. 안심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슬슬, 위험…….’
아이칼이 제 등을 손으로 더듬어 카티샤의 깍지 낀 손을 막 풀어낸 찰나였다.
‘두 번째에서도 함정에 빠질 텐가? 멍청한 새끼!’
‘두 번째’.
그 순간, 섬광 같은 깨달음이 정수리를 꿰뚫었다. 늘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이 목소리. 지독히도 낮고 거칠다는 것 외에는 정확히 어떤 음색인지도 구별하기 어렵던 목소리가, 막힌 벽을 깨뜨린 듯 갑작스럽게 선명해졌다.
‘또 놓치고 후회할 거야?’
이건 자신의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더 굵고 낮은 음성이기는 했으나 틀림없었다.
“뭐야, 이건……?”
뜻밖의 사실에 아이칼이 넋을 놓은 사이, 그가 마지막까지 갈무리하고 있던 오러가 미친 듯 역류하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아이칼에게서 떨어지던 카티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카티샤의 오른뺨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겼다. 미세한 상처를 타고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살기등등하던 아이칼의 눈에 아차 하고 낭패한 빛이 스쳤다.
‘아, 제기랄.’
검자루를 움켜쥔 아이칼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내던지듯 검을 놓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손에서 추락한 검은 바닥에 닿기 직전 수없이 많은 얼음 알갱이로 부서졌다.
통제가 안 된다. 성체화 직전의 신수는 까딱하면 이성을 잃고 광포해지기 십상이었다. 설원을 관장하는 이클라스족의 분노는 주위 모든 것의 온도를 극점으로 낮춘다. 그리고 지나치게 차가운 얼음은 인간을 다치게 한다.
“아, 아야…….”
얼어붙은 소맷자락이 손등에 달라붙자, 카티샤가 작은 신음을 냈다. 소녀의 뺨에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기와 빨개진 손등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카티에게 상처가 났다.
그 사실을 인식한 아이칼의 동공에서 막 초점이 날아가던 순간이었다.
“멈춰.”
문가에서 쏟아지듯 밀고 들어온 푸른 오러가 내부를 뒤덮었다. 분노를 꽉 눌러 참는 듯한 음성이 무섭도록 추워진 내부를 압도했다.
“이 밤에,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야?”
매섭게 팽창한 오러가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카티샤를 둘러쌌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얼어붙어 가던 카티샤의 치맛자락이 사르륵 내려앉았다.
바짝 긴장한 카티샤가 새로운 난입객을 불렀다.
“아, 아빠.”
공작이 엉망이 된 침실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의 손은 푸른 오러를 휘감은 검을 들고 있었다.
공작이 검을 꽝꽝 언 바닥에 내던지듯 박아 넣었다. 즉시 푸른 오러가 산불처럼 번졌다. 거칠게 용틀임하던 아이칼의 오러가 잠깐의 겨루기 끝에 푸른 오러에 칭칭 묶였다.
“웬 놈이 이 야심한 시각에, 감히 내 저택을 침범해서.”
공작의 오러가 사정없이 소년을 주저앉혔다. 아이칼을 내려다보는 시선의 온도가 이번에는 지나치게 높다. 타오르다 못해 새파랗게 변한 불길처럼.
오밤중에 뛰쳐나간 막내딸을 뒤쫓아 와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진창인 침실의 상황을 목격하게 된 공작의 머리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왜 내 딸 방을 이따위로 부수어 놓지? 누구 허락을 받고?”
“아, 아빠, 잠깐만요.”
“이쪽 저택은 간만이라 신경 써서 꾸며 놨더니, 여길 이렇게 다 갈아엎어 놔? 이런 경우 없이 미친놈을 다 봤…….”
“아아아아! 아빠아!”
안절부절못하던 카티샤가 결국 아이칼을 놓고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내 친구란 말이에요. 아빠도 맨날 귀여워했잖아요……!”
얼음 줄기에 속박되어 있던 니엘라가 스르륵 바닥으로 무너졌다. 니엘라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멍든 목을 문질렀으나, 이제는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