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만난…… 적이 있냐니?”
“이 자식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이칼이 제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 노란 머리를 당장 없애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했어.”
“…….”
“그 인간이 네가 가져야 할 것을 전부 빼앗아 갔으니,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도 널 놓칠 거라고.”
“…….”
“그 말은 곧, 내 머릿속의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하지만 내겐 전혀 그런 기억이 없는데. 넌 있어?”
“아, 아니.”
나는 급하게 부정했다.
“우리는 5년 전에 처음 만났잖아…….”
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아이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때가 아니다. [지.우.마>를 읽으며 먼저 봤으니까.
“정말이야?”
“그럼. 당연하지…….”
아이칼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으나, 나는 어떤 말도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아이칼이 모르는 그 자신. 니엘라에게 극렬한 반발심을 가진…….’
그 ‘음성’의 정체로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169 화에서 니엘라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 ‘남주인공’. 즉 [지.우.마>에서의 아이칼이다.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지.우.마>의 아이칼은 이미 사라진 거 아니야? 세계가 리셋되었다면서? 그런데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어?’
아, 아니다.
나는 곧바로 생각을 정정했다.
분명 사라진 세계가 그랬다. ‘사라진 세계’ 와 ‘새롭게 이어지는 세계’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지.우.마>에서의 아이칼과 현재의 아이칼은 근본적으로는 같은 인물이다. 세계가 리셋되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과거로 회귀한 것에 가깝다.‘그럼, [지.우.마>에서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건가?’
공교롭게도 마침 올해가 딱 [지금 우리, 마법처럼>이 시작되는 해였다. 사멸했던 원작의 첫 페이지에 가까워져 오면서, 주요 인물들의 기억이 차츰 돌아오고 있는 거라면?
그러다 언젠가 아이칼이 완전히 [지.우.마>에서의 기억을 되찾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원작의 내용을 상기했다. 169 화였다.
그 회 차에서 아이칼은 니엘라에 대한 배신감으로 눈이 돌아 있었다. 그는 힐라이야의 주인이고, 마지막으로 그가 있었던 장소는 영령의 탑, 즉 마검 귀어스트가 잠든 곳이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신수, 그리고 마검과 성검의 시너지. 그 결과는 곧…….
세계 멸망 엔딩.
그 세 글자가 머릿속에 쾅쾅쾅 박혔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지.우.마>가 사멸하는 데 아이칼이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했을 거란 데 내 손목을 걸 수도 있겠다.‘미친, 그 아이칼이 돌아오면 절대 안 돼.’
그걸 누가 말려!
나는 당장 아이칼을 내게서 떼어 낸 뒤, 그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아키, 그 이상한 게 너한테 말 걸 때마다 나한테 이야기해! 뭐라고 말했는지, 내용까지 전부 다!”
“어떻게 하게?”
“내가, 어, 내가, 어어…… 혼내 줄게!”
“……네가 뭘 어떻게 혼내 줄 건데?”
당연히 내가 ‘그’ 위험스러운 아이칼에게 뭐라 으름장을 놓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
“그딴 거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내가 재밌게 해 줄게……!”
미심쩍은 눈으로 나는 보던 아이칼이 순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보다 더?”
“다, 당연하지!”
아, 그래도 웃는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쉽게 안 죽으니까. 다음에 또 그 음성이 그딴 헛소리를 하면, ‘× ×’라고 해 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카티?”
“언니랑 오빠한테서.”
아이칼은 잠시 미묘한 눈으로 날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도로 나를 안았다.
“알겠어. 꺼지라고 할게.”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나한테 꼭 공유해야 해. 그리고 절대, 절대 그 목소리에게 휘둘리면 안 돼. 오늘처럼 말이야. 알겠지?”
“그건…….”
아이칼이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은 해 볼게. 네가 오늘처럼 옆에 있어 주면 가능할지도 몰라.”
“어, 음……. 그래.”
어렵게 대답은 했지만, 나는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세계 멸망 엔딩의 주범.’
아까 이 애가 니엘라의 목을 조르던 장면을 생각하면. 그때 침실을 노도처럼 휩쓸던 성난 오러를 생각하면. 그게 아직 성체화도 하지 않은 어린 신수의 힘이었다고 생각하면.
‘비약이 아니야…….’
순간 등골이 섬뜩해졌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아이칼이 조금만 더 이성을 잃었더라면, 내가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어쩌면 죽을 수도 있었어.
그제야 나는 지금 나를 끌어안듯 안긴 이 소년이 평소에 얼마나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이칼이 성체화 직전이라고도 했다.
신수는 대략 50∼60년 정도의 유년기가 끝나면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에 달하는 각성 과정을 통해 성체로 거듭난다. 성체화 전후 힘의 차이는 감히 같은 비교 선상에 놓을 수조차 없다.
그런데 [지.우.마>에서의 아이칼의 기억과 인격까지 합해진다?
“…….”
오늘이야 아버지가 어렵지 않게 아이칼을 제압해 주셨지만, 성체화가 정말로 임박하고 나면?
그때는 누가 이 애를 말릴 수 있지?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힘의 차이 탓에, 신수는 인간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나는 그 격언에 담긴 근본적인 공포를 이제야 실감했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칼과 지금처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 꼬맹이 시절처럼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그때였다. 아이칼이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카티.”
“어, 으응.”
“혹시 내가 널 다치게 한대도…….”
“응?”
“그래도 버리면 안 돼.”
꼭 내 속마음을 읽은 것 같은 말이었다. 내가 얼른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하얀 오러가 시야에 희미하게 번졌다.
신수의 오러가 금제구에 백 퍼센트 갇힐 리가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아주 약하게 새어 나온 오러는 내 뺨을 간질이듯 건드렸다.
‘아…….’
나는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오른뺨을 문질렀다. 실금 같은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힐라이야에 깃들어 있는 회복과 재생의 권능이다.
아이칼이 고개를 들었다. 주먹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성마르고 맹목적인 눈빛. 불안하게 달싹거리는 입술과, 내 손을 속박하듯 점점 더 강해지는 악력.
“나 무서워하면 안 돼. 아파도 데리고 있어.”
숨길 수 없는 소유욕마저 깃든 목소리로, 아이칼이 절박하게 속삭였다.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 놔 줄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
“그러니까 겁먹고 도망가지 마.”
네가 나를 데려왔잖아.
먼저 나타난 건 너잖아.
네가 먼저 믿으라고 했잖아.
네가 내게 여름을 알려 줬잖아.
그러니까 놓고 가면 안 돼…….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어떤’ 아이칼이 하는 말일까? 어느 쪽이든…….
‘그거 알아, 아키?’
나는 차마 말로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방금 그 말이 제일 무서웠어…….’
다치게 해도 금방 다시 회복시켜 줄 테니까 가면 안 된다는 게 대체 뭐야?
평소였다면,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을 텐데.
방금의 그 말은 정말로 [지.우.마> 속 아이칼이 할 법한 대사였다.
나는 삐걱삐걱 간신히 대답했다.
“알겠어. 그런데 되도록이면 그럴 일을 만들지 말자, 우리…….”
그제야 아이칼이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 손을 부서뜨릴 것처럼 쥐던 악력도 느슨해졌다. 나 역시도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시한폭탄이냐고…….’
나는 그를 토닥거리며 아이칼의 오러가 완전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금제구를 찬 상태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려운지 아이칼은 다시 눈표범으로 돌아갔고, 몇 분 뒤에는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러고도 나는 한참을 더 생각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걱정 마. 나 진짜로 너 안 버릴 거야.”
네 말대로 내가 널 데려왔는걸. 이제 아이칼이 없으면 안 되는 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잠드는 밤은 너무 길고 외롭다. 그리고 이제는 내 곁에 있는 네가 당연해져 버렸으니까. 돌아보면 항상 네가 있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가능한 만큼 오래 같이 있자, 아키.”
나는 조심스럽게 눈표범 위에 담요를 덮어 준 다음, 몸을 일으켰다.
이제 수련소로 내려가 볼 시간이다.
* * *
한창 오러 수습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내 침실에 잠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챙긴 뒤, 나는 곧바로 수련소로 직행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해.’
니엘라를 잡아 와 그녀의 계획을 어그러뜨리기만 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나는 [지.우.마>의 다음 내용을 모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이칼이 영령의 탑에서 대체 무슨 일을 벌였던 건지, 원작은 대체 어쩌다가 사멸하고 다시 리셋된 건지.
원작에서 나와 아이칼은 대체 어떤 관계였는지까지.
‘정말 만난 적이 있었나?’
그러면 원작에서의 나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고, 어쩌다가 죽은 거지?
여전히 많은 것들이 오리무중이었다.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전부 내 로켓 속,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나머지 회 차들에 있었다.
[지.우.마>의 해금 조건은 엇나가버린 것들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 핵심 실마리가 바로 니엘라다.게다가 그녀는 블라스코의 영원한 숙적인 오르겐 후작과도 긴밀하다. 오르겐 후작은 16년 전 블라스코의 비극을 촉발한 장본인이고.
블라스코의 비극에는 아직도 석연찮은 점들이 많았다. 심증만 있을 뿐, 누가, 어떻게 루티어드 님과 세레이나 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그 일 역시도 ‘어긋난 것’들 중 하나일까? 어쩌면 16년 전에 일어난 일의 전말을 밝히는 게 [지.우.마>의 해금 조건일 수도 있겠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수련소는 회색빛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감옥이었다. 한가운데 커다란 연무장처럼 보이는 공터가 있고, 창살이 달린 여러 개의 감옥이 공터를 에워싸고 있었다.
루시스 경이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잘 묶어 놨지?”
“금제구에, 마법진까지 완비해 놨습니다. 아가씨께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루시스는 앞에서 대기해 줘.”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나는 루시스 경에게서 건네받은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넣었다.
철창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밖에서 안쪽으로 발을 들임과 동시에, 내부에 걸려 있던 암흑 마법이 깨끗이 해제되었다.
안에 수감되어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하고 무덤덤하던 몇 시간 전까지의 모습이 다 거짓말이었다는 듯, 살기등등하게 나를 노려보는 금발의 소녀가 벽 아래에 묶여 있었다.
“안녕, 니엘라.”
우리 정식으로 인사나 할까? 내 여주인공.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