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결국 니엘라는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각하, 굳이 기존의 계획을 계속 유지해야 할까요?”
“무슨 뜻이냐?”
“당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블라스코에 새로운 직계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소문으로는 막내 공녀가 입적할 당시에 마검 귀어스트와의 공명에 성공했다고 하던데요.”
“소문일 뿐이지.”
“단지 소문에 불과한 사실이 아닌 듯했습니다. 만에 하나 그녀가 먼저 마검을 차지한 것이라면…… 굳이 마검과 공명하는 척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이제 와서 두려운 건 아니고, 니엘라?”
후작이 이채 섞인 눈으로 니엘라를 지그시 응시했다.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녀의 표정과 음성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제 사사로운 감정 따위를 감히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일의 효율에 대해 제안을 드리는 거예요.”
“그럼 말해 보거라. 네가 떠올린 방법은 무엇인지.”
“공녀가 지닌 마검을 노릴 것이 아니라, 공녀 자체를 없애면 됩니다. 그편이 블라스코를 흔들어 놓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후작은 잠깐의 고민 끝에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어쨌건 궁극적인 목적은 블라스코를 내부에서부터 뒤흔들고, 그들이 주춤할 때 허리를 기습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공작이며, 그 자식 놈들이 그렇게 징그럽게 싸고도는데 무슨 수로?”
“얼핏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니, 공녀는 오러 순환계가 무척 약하다고 합니다.”
오러 순환계라는 말을 듣자마자 후작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라. 걸려들어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니엘라의 목덜미를 겨눈 검을 살짝 틀었다. 그녀의 목에 소름이 돋는 게 보였다.
지금 내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시끄럽게 걸어 다녀도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도, 내 모습을 보지도 못한다. 내가 들고 있는 검의 위력 덕분이다.
이것은 아르닌 언니의 작품이었다. 내가 5년 전에 넘겼던 검의 도면과 제련 메뉴얼을 바탕으로 언니가 수없이 많은 연구를 거쳐 개량한 무기다.
스쾨티모르의 홍옥이 지닌 힘을 검 자체로 확장해, 검을 쥐고 오러를 불어넣기만 하면 사용자의 존재감을 무에 가깝게 지울 수 있었다.
물론 이것 역시 홍옥 원석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걸린 제약도 많다. 이를테면 육성을 내면 안 된다든가, 존재감을 지우는 대신 검이 아닌 손으로 무언가를 만질 수는 없게 된다거나.
나도 아직 검술 실력이 부족해 이 무기에 완벽히 익숙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누군가의 대담을 엿보는 데는 더없이 유용하다.
지금처럼 니엘라의 바로 뒤, 후작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유유자적 감상할 수도 있고 말이지.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마 저 늙은 너구리 같은 할아버지는 지금 이곳에 블라스코의 그 철없는 막내 공녀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니엘라의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심술궂게 검을 살짝 옮겼다. 칼끝이 정확히 목의 동맥이 지나는 부분을 겨눴다.
‘이 정도의 강제와 협박이면 언니와 오빠도 칭찬해 주겠는걸.’
그녀의 목에 겨눈 검날이 푸르스름한 광채를 뿜었다. 니엘라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촉감만은 생생히 느껴질 것이다. 원래 형체 없는 공포가 더 무서운 법.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너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처음부터 온건하게 니엘라를 포섭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정성 들일 시간도 없고.
니엘라를 데리고 후작저까지 오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내가 미리 써 둔 대본을 외우게 시켰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걸 외워서, 후작에게 고스란히 말하는 거야. 내일부터는 공작저에서 일하게 됐다, 공녀의 측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공녀의 오러 순환계가 무척 약하다’.
일부러 그 말을 후작에게 흘리도록 유도했다. 오르겐 후작이 그 사실을 들으면 필시 어떤 반응이든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공녀의 오러 순환계가 불안정하다고? 그렇다면 예전과 비슷한 방법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래, 이런 혼잣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거든. 16년 전 블라스코의 비극과 관련한 실마리!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걸 들으려고 직접 여기까지 오는 위험을 감수했다.
나는 검날로 니엘라의 어깨를 툭 쳤다.
‘더 물어봐. 더!’
순간 니엘라가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가 다시 칼끝을 바짝 들이대자,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예전의 방법이라고 하시면, 무슨 뜻인지요?”
“16년 전에, 루테 놈을 없앴을 때 썼던 방법. 생체의 오러 흐름을 단시간 내에 역류하게 만드는 술법이다.”
“마법……인가요?”
“일종의 마법이지. 아스트로카 황실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기라고 하더군. 물론 본래는 오러 유저들의 치료에 쓰는 비기지만.”
“황실에 어떻게 그런……? 오러 연구학은 아직 밝혀진 부분이 많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스트로카의 초대 황제가 블라스코의 초대 가주에게 종종 사용했던 비기라 한다. 건국 역사서에 그 사실이 스치듯 언급되어 있다더군.”
아, 건국 역사는 나도 안다.
아스트로카의 초대 황제는 당대 최강의 마법사였다. 초대 블라스코 가주님과는 막역한 친우지간이었다고 한다.
최강의 마법사와 검사의 조합으로 페어를 이룬 그 둘은 암흑기에 휩싸인 대륙에서 마귀들을 몰아내고 아스트로카 제국을 건국한다.
그리고 마법사는 황제가 되어 나라를 이끄는 일을, 검사는 마귀의 봉인을 지키며 외압에 맞서는 사명을 맡기로 약속한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아스트로카와 블라스코 사이의 맹약이다.
‘조상님들은 후대들이 이렇게 잡아먹을 듯 싸우는 걸 보면 뒷골 잡고 넘어가시지 않을까?’
초대 가주, 라몬 님이 영원한 안식에 드셔서 다행이다.
친우가 종종 해 주었던 치료술이 후손의 목숨을 앗아 간 악독한 술법으로 탈바꿈했다니…….
생각을 깊숙이 더듬던 오르겐 후작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기울었다.
“약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 그리 아끼는 막내딸이 동생과 똑같이 원인 불명의 폭주로 떠나면 그놈 표정도 참 볼만하겠어.”
“그럼 계획 변경인가요?”
“그래. 너는 공녀의 옆에 붙어 있다가, 적당한 틈을 보아 공녀를 미리 정한 장소로 유인해 와라. 단둘이. 장소는 추후 통보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 ‘비기’라는 걸 직접 니엘라에게 쥐여 주지 않는 걸 보니,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황실 직속의 고위 마법사들만이 다룰 수 있는 걸까?
‘지금 시대에 최고의 마법사라고 일컬어지는 자는 현황제인데.’
설마, 황제가 직접 나섰을 리는…….
‘없겠지, 아마도……?’
그런데 그렇게 넘기기에는 뭔가가 자꾸 찜찜했다.
‘아귀가 안 맞는데.’
황제가 나섰든, 그의 명령을 받은 다른 마법사가 나섰든. 황실이 루티어드 님과 세레이나 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게 맞는다고 치자.
루티어드 님은 그렇다고 치지만, 세레이나 님은 왜?
세레이나 님은 블라스코의 비극 이후 1년 뒤에나 돌아가셨는데, 왜 황실은 굳이 그분을 그렇게 끝까지 뒤쫓은 거지?
‘공작 부인도 아니고, 둘째 공자의 연인일 뿐인데…….’
게다가 분명히 조금 전에 후작이, ‘루테 놈을 처리할 때 썼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건 애초에 표적이 루티어드 님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설마, 원래 황제가 죽이려고 의도했던 쪽은 루테 블라스코였다든가?’
그래야 명쾌하게 설명이 된다.
‘루테’와 ‘세레이나’가 황실에 무언가 원한을 사서, 황실이 그 둘을 처리했다. 그러나 정작 죽은 건 ‘루티어드’.
쌍둥이 형제는 헤르젠 할아버지조차 헷갈릴 때가 많았다고 하니 혼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테지.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황제는 왜 가주 후계자인 루티어드가 아니라 루테를 죽이려고 든 건데?
차기 공작보다는 둘째가 더 만만할 것 같아서?
하지만 우리 아빤 당시에 검술로 루티어드 님보다 한 수 위의 실력자였다고 했다.
‘그럼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가 또 있었나. 개인적인 원한?’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다음 순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퍼뜩 프리츠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무척 시기하면서도 끈질기게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시선을 상기하자,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아빠를 질투해서 그랬다든가?’
이건 너무 감정적인 이유인가?
내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실마리들을 조합하는 사이. 후작이 화제를 바꾸었다.
“아, 그리고 니엘라. 마침 블라스코에서 일하게 된 김에, 네가 내 눈과 귀가 되어 주어야겠다.”
“말씀하세요. 무슨 정보가 필요하신지요?”
“블라스코의 무기 제작자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잠깐.
나는 눈썹을 팔자로 모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가문 고오급 인력들을 왜?
오르겐 후작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그러모아 정리했다.
“제국의 병력 대부분이 블라스코가 찍어 내는 무기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애초에 어느 한 가문이 한 사업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똥 씹은 표정으로 후작을 쏘아보았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꼬우면 직접 해 보든가!
그런데 후작은 정말 그럴 작정인 모양이었다.
“언제까지고 내부에 적을 두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하도 안으로만 꽁꽁 싸매는 놈들이라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어 애를 먹었다만. 이번 기회에 슬슬 실전에 나서 볼 생각이다.”
“…….”
“그 시작으로 블라스코가 그토록 자부심을 느낀다는 가업부터 빼앗아 와야지. 블라스코에 전해 내려온다는 무기 제련법이나, 장인 명단, 그들이 거주하는 대장간의 위치 등, 쓸 만한 건 다 빼 와.”
아스트로카 황실이 대대로 마법에 능하고 초대 황제의 비기술까지 가지고 있다면, 블라스코는 500년 역사의 검술 명가다. 이쪽에는 블라스코 특유의 검법과 함께 무기 제련법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지금 그거에 눈독 들이는 거야, 저 할아버지?’
기가 막혔다. 제련법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뚝딱 질 좋은 검을 생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무기의 질을 좌우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숙련된 솜씨, 즉 장인들이다.
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후작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인들 몇 놈만 빼돌리면, 그 견고한 블라스코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지.”
그래, 장인. 그들을 매수하려는 거구나.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후작이 푸스스 웃음소리를 흘렸다.
“너무 노다지를 쥐고 있단 말이야, 그것들이. 제련 매뉴얼과 숙달된 장인 한 명만 포섭하면 얼마든지 이쪽도 무기를 찍어 낼 수 있거늘. 자만에 빠져서는…….”
“…….”
“알아들었으면 이제 물러가 봐라, 니엘라.”
“예, 각하.”
니엘라가 허리를 구부려 후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는 그녀의 등을 끝까지 검으로 겨누며, 다른 손으로 목에 건 영상석을 톡 건드렸다.
후작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모조리 담은 영상석이 쓰임을 다하고 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