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 * *
《“일종의 마법이지. 아스트로카 황실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기라고 하더군. 물론 본래는 오러 유저들의 치료에 쓰는 비기지만.”
“아스트로카의 초대 황제가 블라스코의 초대 가주에게 종종 사용했던 비기라 한다.”》
루테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오르겐 후작이 블라스코의 장인들을 빼돌릴 계획까지 전부 읊어 대고, 영상석의 빛이 꺼진 다음이었다.
“……카티, 이게 어디서 났다고?”
“어제 새벽에, 니엘라를 앞세워서 후작가에 다녀왔어요.”
카티샤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루테는 어느 쪽에 더 기함해야 할지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그에게 말도 없이 저택을 나가 적진 한가운데 들어갔었다는 게 더 경악스러운지, 아니면 영상석에 담긴 내용이 더한지.
그의 당혹감이 설명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한 카티샤가 서둘러 덧붙였다.
“니엘라를 이중 첩자로 쓰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애가 순순히 이쪽으로 넘어올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애를 그냥 처리하는 것보다는, 반대로 이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르닌 언니가 스쾨티모르의 홍옥을 넣어서 만들어 준 검을 가지고 후작저로 갔어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절 발견할 수 없으니까.”
“……일어나 봐.”
루테는 더는 참지 못하고 막내딸을 일으켜 자리에서 두 바퀴 돌렸다.
아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끝 한 올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방금까지 제가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괜찮아요, 아빠.”
카티샤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음에는.”
잠깐 사이에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루테는 가까스로 길게 심호흡했다.
“다음에는…… 아버지 허락 맡고 가. 아니, 아니다. 이런 짓은 다시는 하지 마. 알겠어?”
“네에.”
카티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울먹거리지도 않고 차분한 모습을 보아하니, 수도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게 분명했다.
루테는 막내가 아직 아르닌이 선물한 그 검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까딱하다간 발각되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생각하자 정신이 다 아찔했다.
눈치를 보던 카티샤가 얼른 그에게 쏙 안겼다.
“마음대로 행동해서 죄송해요. 저도 급해서 그랬어요. 앞으로는 이렇게 위험한 짓 안 할게요…….”
힐라이야의 주인을 5년 동안이나 숨긴 것으로 야단을 쳤던 게 바로 몇 분 전인데, 지금은 이 아이가 멀쩡히 살아 온기를 나누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 하늘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루테는 아이의 등을 몇 번이나 쓸어내린 뒤에야 깊이 한숨을 흘렸다.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카티. 아빠 괴롭히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야.”
“헤헤…….”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 알겠어? 언니나 오빠에게 부탁해.”
“네에.”
복수를 하겠답시고 멀쩡한 아이를 잃으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루테는 카티샤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아 낸 뒤에야, 간신히 영상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형을 죽인 자. 아스트로카 황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기를 아는 자…….’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요, 아빠?”
카티샤가 물었다.
루테는 한동안 말을 아꼈다.
‘형에게 약이라도 먹였나 했더니, 약이 아니라 마법을 쓴 거라면.’
황실에 무슨 비기술이 전해져 내려오는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걸출한 마검사였던 루티어드를 단번에 제압할 만한 마법사는 흔하지 않다…….
아니, 실은 딱 한 명뿐이다. 그의 푸른 눈이 소슬하게 빛났다.
“페르테스.”
페르테스 루제타 잉게르트 베르누아.
“……이런 개새끼가…….”
카티샤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루테가 내뱉은 이름은 아스트로카의 현황제, 베르누아 2세의 것이었다.
그러나 카티샤는 놀라는 대신,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티어드 님께서 황제 폐하와 사이가 많이 안 좋았어요?”
“늘 안 좋았어. 블라스코와 황실은 섞일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 그런 이유 말고요. 뭔가…… 더 사적인 이유가 있다거나.”
당시 황궁 어디에서도 루티어드의 오러 폭주에 영향을 끼칠 만한 요인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로지 심증뿐이었다.
당시는 아스트로카와 우호 관계에 있던 이웃 왕국들이 앞다투어 블라스코에 환심을 표하는 바람에, 블라스코를 향한 황실의 견제가 날로 높아지던 시기다. 단지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다.
“제 생각에는요, 아빠. 황실이 정말 없애고 싶었던 사람이, 루티어드 님이 아니라…….”
“…….”
“아빠가 아니었을까 하는데…….”
그 순간 루테도 카티샤와 같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형이 아니라 자신을 처리하려고 한 거라면?’
그렇다면 이유는 완전히 뒤바뀐다.
10대 시절부터 정치판이 아니라 홀로 대륙 곳곳을 떠도는 걸 좋아했던 그는 황실과의 직접적인 인연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연이라고 부를 만한 게 딱 하나 있다면…….
‘아.’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 하나에, 갑작스럽게 모든 퍼즐이 명쾌하게 맞춰졌다.
루테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설마…….’
왜 형이 그날, 굳이 혼자 황성에 들어가겠다고 했는지. 함께 가자고 고집을 부리던 자신을 왜 극구 말렸는지. 그리고 왜, 황실과 후작가가 죄 없는 세레이나까지 기어코 찾아내 죽여 버렸는지도.
“아빠.”
카티샤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흔들었다.
“16년 전에 황실이랑 블라스코요, 정확히 어떤 관계였어요? 단순히 서로 견제하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루테는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게 할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점차 과열되어 가던 세력 다툼의 기폭제 역할을 할 만한 사건이라면, 황실이 굳이 자신을 지목해 죽이려 할 만한 이유라면.
루테의 기억으로는 딱 하나뿐이다.
되새길 가치가 없어 지금껏 잊고 지냈던 16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루테.”
* * *
루테는 그를 조심스럽게 보채는 막내딸을 억지로 침실에 들여보낸 뒤에야 서재로 돌아왔다. 흐트러짐 없이 곧던 그의 신형이 텅 빈 서재에 홀로 남자마자 크게 흔들렸다.
“…….”
루테는 이를 악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그날, 마지막에 형이 분명히…….’
그간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16년 전, 블라스코의 비극이 벌어졌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16년 전의 그날은, 황제가 황실과 함께 아스트로카를 이끄는 7귀족회를 위한 소규모 연회를 열던 날이었다.
7귀족회의 직계들은 대부분 반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그 연회에 참석하여 황실과의 친목을 다졌다.
블라스코의 마차가 황성 입구 앞에 멈추었을 때였다. 루티어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루테.”
“뭔 소리야, 여기까지 다 와 놓곤? 같이 가.”
“그냥 있어.”
마차를 타고 황성까지 오는 내내 고민을 거듭하던 루티어드가 결심을 굳힌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차에서 휙 뛰어내리려는 동생을 저지했다.
“오늘 연회에는 나 혼자 참석한다. 네가 가면 늘 시비를 거느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하고 오게 되잖아.”
“정신 나간 것들이, 말이 되는 소리를 처해야 가만히 들어 주지. 형이 지나치게 대인배인 거야.”
루테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람들에게는 세기의 로맨스라며 그렇게 사기를 쳐 놓고, 사실 본인은 처음부터 나를 좋아해 왔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그게 좋게 보이겠어?”
황후의 탄신 무도회에서 황후가 갑작스럽게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 게 바로 지난달이었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루테.”
“사실 조금 오래됐어요. 이미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고선 제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서…….”
귀족 영애들에게서 뜬금없이 고백을 받는 일이야 익숙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황후였다. 무려 남편이 황제인 여자 말이다.
처음에는 이 미친 여자가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평소 그녀가 황제에게 사랑에 푹 빠진 눈빛을 보내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중성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루티어드의 부인, 이엘이 웃음을 참으며 한마디 했다.
“도련님이 원체 죄 많은 남자여야 말이죠. 귀족 아가씨들이 홀딱 빠질 만한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으니. 원래 귀족 영애들은 야성적인 미남을 좋아하거든요.”
“제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이엘. 전 황후와 말도 몇 번 섞어 본 적 없습니다.”
루테가 부루퉁하게 투덜거렸다.
“나를 뭐 얼마나 안다고 사랑하네 마네…….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하는 부인이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황제가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군요.”
“으음, 저는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네요.”
이엘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현황제, 페르테스의 황후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리만큼 열정적이었다. 한시도 품에서 떼 놓고 싶지 않아 하는 바람에 정무에도 차질이 생길 정도라며 온 황도에 소문이 파다하다.
“남자 시종이 황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싫어한다죠. 그 정도면 의처증이 아닌가 싶은데, 하필 황후가 고백한 사람이 도련님이라니…….”
“전 지저분한 치정극에 휩쓸리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습니다.”
루테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세니가 알았다간 단단히 토라질 겁니다. 그래서 입 다물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곤란한 건 나인지, 참 나.”
묵묵히 듣고만 있던 루티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다정한 말씨로 잔뜩 열이 오른 동생을 달랬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괜히 들어가서 감정 소모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 있어, 루테. 당신도요, 부인.”
“이엘만 보내. 나는 형과 같이……”
“루테.”
“안 그래도 최근에 별 쓸데없는 트집을 잡으면서 블라스코의 의견안은 죄다 묵살하던데, 이참에 내가 가서 시비를 좀 털어 줘야……”
“루테?”
루티어드가 엄격하게 동생을 불렀다.
루테는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 둘도 없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그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이는 딱 둘뿐이었다. 쌍둥이 형, 그리고 세레이나.
결국 루테가 칫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재미없는 연회가 되겠네.”
“평화로운 연회겠지.”
루티어드가 동생의 말을 고쳐 주며 빙긋 웃었다.
“걱정 마.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다 싶을 뿐이니까. 따로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뭐길래?”
“돌아가서 말해 줄게.”
루테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은 그가 문을 닫았다.
루테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 너머로 장난스레 손을 흔드는 루티어드를 노려보았다.
“쯧, 매번 저렇게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한다니까. 이엘이 저 미련한 인간에게 힘이 좀 돼 주세요.”
“늘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까요?”
“그러죠.”
사실, 어쩌면 형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제가 굳이 연회에 참석해 황후의 얼굴을 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다 그 예민하신 황제 폐하께서 눈치라도 채신다면 당장 저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루테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정상인이 없지, 이번 대 황실에는.’
그런 부류를 다루는 데는 자신보다 형이 한 수 위였다.
제게 매번 져 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스트로카 제일검을 꼽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검사.
아버지가 매일같이 당신께서 당장 영면에 들어도 블라스코는 걱정이 없겠다며 농담조로 말씀하실 만큼 신뢰하는 가주 후계자.
‘괜찮겠지, 뭐.’
루테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형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느긋하게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를 받쳤다. 제 몫까지 두 명분으로 고생하고 올 게 뻔하니 저녁에는 술잔이나 기울일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그날 밤 형제가 잔을 맞부딪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루티어드의 오러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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