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 * *
그때 그 사고로 마차는 반파되다시피 했으며, 루티어드는 물론이고 곁에 앉아 있었던 이엘마저도 폭주에 휘말려 생을 마감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이는 루테 혼자였다.
그 모든 일이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날 형은 뭘 고민하고 있었던 거지? 왜 굳이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막고…….’
루테는 급히 몸을 돌려 서재를 벗어났다.
그는 3층의 갤러리로 올라가 높다란 벽면을 훑었다. 그리고 구석에 자리한 루티어드의 어린 시절 초상화 한 점을 발견했다.
“…….”
루테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각난 사실들을 이어 붙였다.
오르겐 후작은 블라스코 공작이 루티어드가 아니라 루테라는 걸 모르고 있다. 후작이 모른다면 황후도, 황제도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들은 루티어드를 루테라고 착각하고 죽인 것이다.
황제와 후작이 원래 죽이려 했던 쪽은 자신이다. 황후가 멍청하게도 남편을 멀리하면서까지 절절히 목을 매게 된 상대.
세레이나에게까지 시기 질투를 감추지 못하던 황후의 낯짝을 떠올리자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지만 어떻게 형과 나를 헷갈릴 수 있지?’
그들 쌍둥이는 틀림없이 똑 닮았고 취향도 얼추 비슷했지만, 그것들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달랐다. 차림새에서부터 눈빛과 말투, 성격까지.
대화를 나누어 보면 누가 형이고 아우인지 대번 구분할 수 있다. 한 쪽이 일부러 연기하지 않는 이상.
루테는 속절없는 신음을 터뜨렸다.
“아, 형…….”
그는 더듬거리며 초상화 속의 소년에게 물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나 대신 당한 건 아니지, 형?
하지만 루티어드의 생전의 성정을 떠올리면 결코 비약이 아니었다. 다정하고,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사람. 그 따듯함 탓에 번번이 검 끝이 흔들리던.
“걱정 마.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다 싶을 뿐이니까. 따로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돌아가면 말해 줄게.”
형이 그의 모습을 하고 들어가 알아내고 싶었던 게 뭐였을까?
황실이 루테 블라스코와 그 연인 세레이나 아이옐나스를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낌새를 형은 미리 눈치챘나?
그래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연기했던 걸까?
황제와 황후가 얽힌 그 지저분한 치정극에는 발도 들이지 않을 거라며 짜증을 냈는데, 당시에도 루테는 이미 그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던 셈이었다. 그 자리에 형제를 대신 밀어 넣은 것이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
어쩔 수 없는 신의 농간? 내 잘못이 아니야?
‘웃기고 있네.’
루테는 스스로를 매몰차게 비웃었다.
뒤이어 새카만 절망이 닥쳤다. 지난 세월 동안 버텨 내기 위해 수없이 되뇌었던 변명들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무너졌다.
루티어드의 죽음 역시도 너무나 명백한 그의 죄였다.
* * *
아버지가 사라졌다.
날이 밝자마자 다시 서재로 달려간 내가 발견한 것이라곤 바닥에 굴러떨어진 깃펜 하나뿐이었다.
“각하께서는 새벽에 출타하셨습니다. 행선지를 따로 알리지는 않으셨고요…….”
키스 경도 주인의 갑작스런 부재에 당혹스러운 듯했다. 내 표정이 흐려지자, 제미언이 나서서 나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금세 돌아오실 겁니다. 5년쯤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렇게 종종 따로 언질 없이 출타하시곤 하셨어요.”
“보통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짧으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회계 장부 분기 마감 일정 때문에라도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고요?”
“한 번도 행선지를 알리신 적이 없으셔서요…….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만.”
“어딘데요!”
“아마…….”
제미언과 키스 경, 마가렛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루테 도련님이나, 아니면 마님께 가신 게 아닐지…….”
그 말이 내게는 저절로 치환되어 들렸다. 루티어드 님과 세레이나 님의 묘지에 가신 걸까?
‘정말 그런 거면 차라리 좋겠는데.’
저택의 사용인들이 나를 안심시켰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혹시 황성에 가신 거 아니야?
아버지 성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나는 아버지가 내 영상석을 보고 느꼈을 분노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작년에 황후랑 복도 한복판에서 대판 싸우셨다고도 했는데…….’
황성에서 황족을 죽이면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그때부턴 핏빛이다. 전쟁이야, 전쟁.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황족 시해범이 되면 안 돼요, 아빠.’
방법이 없을까?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시기 전에 오르겐 후작가나 황실 측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
‘아악, 좀 늦게 보여 드릴 걸 그랬나. 영상석…….’
아빠는 결국 16년 전의 상황에 대해 시원스럽게 이야기해 주지도 않으셨다. 그 탓인지 [지.우.마>의 171 화도 도무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금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난 것을 기점으로 리셋된 세계니까, 그 전의 일은 [지.우.마>에서 ‘어긋난 것’에 포함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다시 니엘라를 공략해야 할 때인가?
‘니엘라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뭣도 어긋날 일이 없잖아. 아니면 뒷배인 오르겐 후작가를 탈탈 털어 버린다든가…….’
그도 아니면, 둘 다 한다거나.
후작이 블라스코의 장인들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니엘라에게 정보를 빼 오라고 시키던 것도.
“아.”
그 순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 * *
그길로, 나는 수련소로 내려가 니엘라를 가둔 감옥의 문을 활짝 열었다.
“자, 나와.”
“……또 어딜 끌고 가시려고요?”
“네가 증명해 보라면서? 블라스코의 재력 말이야. 오늘 똑똑히 느끼게 해 줄 테니 나와.”
며칠 동안 갇혀 있어서인지, 니엘라의 안색이 수척했다.
“뭘 시키실 건데요?”
며칠 전 새벽에 내게 시달린 탓에 그녀의 반응은 가시를 잔뜩 세운 예민한 고슴도치 같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키긴 뭘 시켜? 오늘은 얌전히 따라다니기만 해.”
내가 니엘라를 끌고 1층으로 내려오자, 각각 연무장과 대장간으로 가려던 언니와 오빠가 나를 발견했다.
“어디 가, 카티?”
“쇼핑하러요.”
“뭐?”
나는 경계와 의심의 빛을 마구 쏘아 대는 언니와 오빠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이 애를 포섭하려고 노력 중인데, 잘 안 넘어오더라고요. 오르겐 후작가의 권세가 블라스코보다 한 수 위라나.”
“뭐? 지랄.”
아르닌 언니가 거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베르너가 곧장 옆에서 손바닥으로 언니의 입을 찰싹 때렸다.
“막내 앞에서 말 예쁘게 하랬지, 아르닌.”
“아, 죄송. 별꼴이네.”
“……아무튼 그래서, 저더러 제가 가진 것들을 증명해 보라길래. 눈으로 보게 해 주면 좀 효과가 있을까 싶어서 데리고 나가려고요.”
“눈으로 보여 줄 효과가 뭔데? 뭐 어떻게 하려고?”
“일단은, 그간 못 했던 쇼핑을 할 거예요.”
나는 목에 걸고 나온 아스트로카 중앙은행 패스를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플렉스의 날이다. 한마디로, 보란 듯이 돈을 써 재끼는 날!
솔직히 이건 내 사심이 조금 담긴 계획이기도 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패스 마음껏 긁는 거, 한 번은 꼭 해 보고 싶었거든.’
이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아르닌 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언니도 같이 가요. 언니도 저랑 돌아봐야 할 곳이 있거든요.”
“오빠는 안 필요해, 카티?”
“뭐어, 오빠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내가 애매하게 대답하자, 베르너가 무척이나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3남매와 니엘라를 실은 마차는 금세 번화가 한가운데 도착했다. 블라스코의 나비 문양이 나타나자, 왁자지껄하던 거리 전체에 군기가 바짝 섰다.
첫 번째로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수도 귀족들의 패션을 선도한다는 페르낭 의상실이었다.
‘좋아. 오늘은 기필코 물 쓰듯 쓴다, 돈.’
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센 척하기는 했지만 패스를 움켜쥔 내 손은 벌써부터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안 돼, 오늘만큼은 소시민 근성을 죽여야 할 때였다. 오늘 사들여야 할 게 몇 개고, 써야 할 돈이 얼마고 또 도장 찍어야 할 서류가 몇 개인데. 시작부터 이러면 안 돼.
나는 굳게 다짐한 뒤, 칼라에 꽂아 두었던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내 동공지진을 감추기 위한 적당한 위장술이었다.
“우리 꼬마가 이제 다 커서 돈도 쓰겠다고 하고. 이제 여한이 없겠군.”
베르너가 흐뭇하게 웃으며 내게 챙이 큰 모자를 씌워 줬다. 그리고 먼저 마차에서 내려 정중한 동작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쇼핑하러 가 보실까요, 우리 꼬마 숙녀님.”
“그럴까요?”
나는 한껏 콧대를 세우고,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의상실로 들어갔다. 나름 위풍당당하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