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 * *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롭게 지나가던 오후, 펠라임 중앙 번화가의 고급 상점들은 때아닌 대목을 맞이했다.
주황색 곱슬머리를 하나로 얼기설기 땋아 늘어뜨리고, 챙 넓은 모자와 까만 선글라스를 쓴 블라스코 막내 공녀가 상점이란 상점은 죄 휩쓸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일시불.”
릴리번트 약초 상회 수도 본점이 시작이었다. 삑, 삑, 삑, 삑. 아스트로카 중앙은행 직통 패스 긁는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근육 이완 효과가 있는 진정 물약, 그리고 근육 기능을 강화하면서 관절의 부담을 줄여 주는 촉진 물약 세트. 배합법은 여기 다 적어 두었으니까, 이대로 100개 만들어 주시면 돼요.”
“예, 공녀님!”
“선물용이니까 전부 개별 포장하도록 하고요. 리본은 푸른색으로, 예쁘게 부탁해요.”
어쩐지 포장을 부탁하는 막내 공녀의 목소리가 달달달 떨리는 듯했다.
의상실의 점원은 어리둥절했지만 냉큼 은행 패스를 긁었다.
삑. 처음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활짝 펼치고 있던 공녀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돈 나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이렇게 슬프냐…….”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점차 그 경쾌한 소리에 익숙해졌는지, 공녀의 어깨는 그다음으로 도착한 윌리밀리 아저씨의 장난감 가게에서부터 점차 본래 위치를 회복했다.
“됐어, 됐어. 죽을 때 금화 끌어안고 묻힐 거야? 다 써 재껴 버려. 팡팡 써 버려……!”
삑삑삑삑. 패스가 사정없이 긁혔다.
막내 공녀의 뒤를 따라온 공자와 둘째 공녀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면 막내 공녀는 퍼렇게 질린 채 그들을 응시했다.
“왜…… 웃어……?”
블라스코 직계들의 쇼핑을 지켜보고 있던 점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막내 공녀의 저 선글라스를 한번만 벗겨 보고 싶다. 울먹울먹하고 있지 않을까?
“지금 제가 웃겨요……? 돈, 막 써서……?”
베르너와 아르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색했다.
“안 웃었어. 오빠 지금 울고 있다. 이 눈물 좀 봐.”
“우린 그냥, 카티가 드디어 용돈을 쓰고 있는 걸 보니까 감격스러워서 그만…….”
“……그래?”
“그럼 그럼. 카티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 사, 괜찮아!”
“언니 돈 아니라고 그러는 거지……?”
“아니야. 막말로, 이 거리 전체를 사들여도 우리에겐 손해가 아닐걸. 세만 받아도 그게 얼만데. 걱정 마.”
남매의 격려에 막내 공녀에게 혈색이 돌아왔다. 그 뒤로는 거침없었다.
카티샤가 페르낭 의상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번에는 니엘라를 앞세운 채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가져와요. 이 친구에게 어울릴 법한 걸로 부탁해요. 예쁜 금발 머리니까 뭐든 다 잘 받겠지만.”
“예, 알겠습니다!”
“아, 니엘라. 혹시 선호하는 취향 있어? 좋아하는 색이라든가.”
“……그런 건 딱히 없습니다.”
“그래? 그럼 전부 다 입어 보자!”
행어를 뒤적거리던 카티샤가 아예 행어 채로 니엘라에게 밀었다.
“마음에 드는 거 골라. 사 줄게.”
“필요 없습니다.”
니엘라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카티샤가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액세서리 함에서 나비 모양 머리핀을 집으며 니엘라에게 손짓했다.
“고개 숙여 봐.”
니엘라는 얼결에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녀의 머리에 머리핀을 꽂아 준 카티샤가 싱긋 웃었다. 눈매가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혔다.
“뇌물 줄 때 그냥 받아. 명령이야.”
“…….”
“이거 예쁘네. 역시 얼굴에는 죄가 없다고…….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여주인공으로 남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카티샤가 이번에는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와 해바라기처럼 샛노란 드레스를 꺼내 니엘라에게 이리저리 대보았다.
“역시 옷은 원색. 예쁘다.”
“저는, 이런 옷을 입고 갈 곳도 없고…….”
“그럼 평생 하녀복만 입을래? 네 말마따나, 이 나라 최고 귀족 가문의 핏줄인데?”
“……사생아는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공녀님.”
오르겐 후작가처럼 황후를 배출한 고위 귀족일수록 사생아의 존재를 은폐한다. 그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오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거야 네가 하기 나름이지. 억울하지도 않아? 태어나고 싶어서 사생아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
“너 똑똑하잖아. 그런데 왜 오르겐에게 꼼짝도 못 해? 그 재수 없는 후작가 머리 꼭대기에 앉을 수 있는 방법이 뻔히 있는데.”
“그런 방법이 어디 있…….”
“여기 있잖아? 네 앞에, 나.”
카티샤가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켜 보였다.
“저번엔 내가 좀 급해서 ‘협박과 강제’ 작전을 썼는데, 내가 항상 그런 건 아니거든.”
“…….”
“그래서 오늘부터는 너를 좀 꼬셔볼까 해.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비밀스럽게 눈을 찡끗한 카티샤가 다시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닿는 옷들마다 범상치 않은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니엘라가 당혹감에 휩싸인 사이, 카티샤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드레스를 한 벌씩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드레스 룸 쪽으로 니엘라를 떠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그냥 주는 선물 아니고, 엄연히 인적 재원 확보를 위한 투자금이야. 물론 줬다 뺏는 양아치 같은 짓은 안 할 거고.”
“…….”
“에잇, 정말. 그럼 나중에 현금화해도 암말 안할게. 됐지?”
제 딴에는 큰맘 먹고 선언한 카티샤가 드레스룸의 문을 쿵 닫아버렸다.
형형색색의 옷가지들을 끌어안고 덩그러니 남게 된 니엘라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공녀는 단순히 니엘라의 새 옷을 사 주기 위해 외출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니엘라의 드레스를 열 벌이나 맞춘 뒤, 공녀는 몇 블록 떨어진 예술의 거리 근방의 건축 자재상들과 조각 공방, 회화 공방, 보석 공방 등을 돌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일시불.”
“대리석, 부자재 모두 전부 최고급으로 부탁해요. 저택에 아주 우아한 아틀리에를 하나 만들 거거든요. 인건비까지 한 방에 결제할게요.”
“보석 세공한 거 말고, 전부 원석으로 부탁해요. 연금술에 쓸 거라서. ……와, 30캐럿 다이아 원석? 알이 엄청 굵네. 이게 얼마라고요? 700골드? 뭐야, 아키보다 싸네. 결제할게요. 이런 거 다 주세요.”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번화가를 쓸고 다닌 공녀는 보석상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긴 쇼핑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디 볼까……?”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친 카티샤가 검은 은행 패스를 톡톡 두드렸다. 패스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리며 잔고가 나타났다.
“뭐야, 별로 안 썼네?”
귀족들이 애용한다는 럭셔리 숍들을 털어 놓고도 여전히 잔액은 백만 골드였다.
휴, 하고 안심한 카티샤가 빙그르르 돌아 니엘라를 마주 보았다.
언제 바짝 긴장했냐는 듯, 카티샤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자, 이만하면 증명이 됐지?”
“…….”
“나 돈 많아. 너나 오르겐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리고 네게 잘해 줄 용의도 충분히 있고.”
그렇게 물 쓰듯 패스를 긁고도 잔액이 백만 골드라는 걸 눈으로 봤으니, 달리 부정할 길이 없었다. 니엘라의 머릿속에 자산보다 부채가 더 큰 후작가의 재정 상태가 스쳤다.
카티샤가 검은 패스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너만 선택하면 돼.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입고, 편하게 지내면서 후작의 머리 꼭대기에 설지, 아니면 갖은 개고생은 다 해 가면서 떨어질 콩고물도 없는 각박한 후작가에 계속 매여 살지.”
“…….”
“생각할 시간, 더 필요해?”
니엘라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티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마음대로 해. 어차피 후작가로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당분간은 내 전담 시녀로 일해 주면 되겠다.”
그 수련소라는 곳으로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공녀의 전담 시녀라니.
카티샤가 고개를 돌려 호위 기사에게 명령했다.
“루시스 경, 니엘라를 저택까지 데려다주세요. 카렌에게 머무를 방을 내주라고 전해 주고.”
“예, 아가씨.”
“그럼 나중에 봐, 니엘라.”
카티샤가 마지막으로 니엘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빙그르르 뒤돌아서는 모습이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처럼 가볍다.
“그럼 우린 가요, 아르닌 언니. 따로 찾아갈 곳이 있어요.”
“어디로 갈 건데?”
“재야에 묻힌 천재 무기 장인을 데뷔시키러 갈 거예요.”
“음? 어, 그래…….”
니엘라는 점차 멀어지는 블라스코 3남매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공녀의 호위 기사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니엘라를 채근했다.
“뭐 하고 있나? 가지.”
그녀는 천천히 공녀에게 인사한 뒤,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은 예쁘게 포장한 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이렇게 많고 값비싼 선물을 받아 본 건 처음이다. 심지어 하나하나 그녀에게 입혀 본 뒤, 특별히 잘 어울리는 것들로만 신중하게 선별한 것들이다.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이제껏 니엘라에게 그녀의 취향 따위를 물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좋은 걸 입고 먹어야 한다고 말해 준 사람도 없었다.
권력자에게 굴종하지 말고 그의 머리 꼭대기에 서라는 말을 해준 사람도, 역시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꼭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