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
12화
* * *
블라스코 삼인방이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게 단순 서술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하루 만에 간파했다.
일단 셋이 공유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공작은 본관, 공자는 저택의 오른쪽 날개, 공녀는 별채를 각각 독식하고 있었는데, 동선이 겹칠 일이 전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반년 만에 돌아온 공자도, 1년에 360일은 광산과 제련소가 있는 남부 하와인에서 보낸다는 공녀도 먼저 본관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다.
게다가 공작 역시 자식들에게 소환 명령을 내린 뒤론 격무에 시달리느라 그들을 챙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오죽하면 각각의 공간을 담당하는 시녀장도 따로 있을까?
그리고 블라스코 직계들 간에 오가는 정보는 몹시 간략한 요약본뿐이었다. 베르너가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데면데면할 수가 있나!’
물론 그럴 수 있다. 전생에서의 내 가족들도 소원하다 못해 거의 남남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참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법. 편견은 금물.’
사실 내겐 블라스코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게 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 침실은 우연찮게도 저택 중앙부와 오른쪽 날개가 갈라지는 계단 앞에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동쪽으로는 별채로 통하는 오솔길이 보이고, 북쪽으론 까마득하게 솟은 영령의 탑이 보였다. 이 정도면 거의 전략적 요충지다.
나는 새로운 임시 둥지에서 공략 대상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모색했다.
‘일단은 눈에 익는 게 중요해. 습관은 무시할 수 없는 법.’
끈질기게 눈도장을 찍어 보자!
그렇게 새로 정립한 내 하루 일과는 이렇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옷 입고 머리 묶고, 주방을 들렀다가 바로 공작의 서재로 올라간다.
그럼 서재 앞을 지키고 있는 흑갈색 머리칼의 기사, 키스 경이 나를 제일 먼저 맞아 준다.
“좋은 아침이에요, 키스 경!”
“일찍 일어났네요, 아기씨. 아침부터 이 험하고 위험스런 곳까지는 웬일로?”
“공작님께 아침 인사하러 왔어요.”
그러자 키스 경이 무척 감격해서 외쳤다.
“세상에, 드디어 누군가 공작님께 아침 인사를 하러 오는 날이 오는군요!”
나는 민망해져서 코를 긁었다. 아침 인사가 뭐 대수라고……. 난 전생에 같이 살았던 새아버지에게도 늘 아침저녁 인사는 했다.
“각하, 아인슬리 양이 아침……”
탄복한 키스 경이 막 공작에게 허락을 구하려던 찰나였다. 문틈으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키스, 걔 조찬실로 치워 버려.”
공작은 귀가 정말 밝았다.
나는 문틈에다 대고 얼른 외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작님!”
인사성이 밝은 애를 싫어할 어른은 없지 않을까? 하는 영악하고 계략적인 술수였다……기보다는, 사실 헤르젠 할아버지가 생전에 지나가듯 해 주셨던 이야기가 자꾸 맴돈 탓이 컸다.
“죽은 놈 말고, 산 놈은 일에 미친 놈이다. 차라리 젊은 혈기에 여기저기 칼질하고 돌아다닐 때가 좋았지. 맞지도 않는 옷을 어거지로 껴입은 꼴이라니……. 보기만 해도 내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밥이라도 잘 처먹고 다니면 또 몰라.”
나는 슬쩍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재 안에는 책상이며 바닥이며 소파며 할 것 없이 서류가 눈 덮인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젊을 때 힘깨나 썼다기에 산적이나 용병인 줄 알았지, 저렇게 부장님 포스를 뿜어내는 사무직 타입일 줄은 전혀 몰랐다.
몰래 제미언에게 물어본 바로, 공작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해 새벽 1시에 끝난다고 했다. 아침은 서재에서 대충 때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하기야, 블라스코가 전담하는 사업이 한두 개도 아니고. 철강과 광물 같은 원재료 채굴에서부터 제련까지 생산 과정은 물론이고, 완성한 무기들의 유통과 판매까지 독식하고 있으니. 잠잘 틈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끼니는 챙겨야 한다. 사람의 몸이 하루 세끼를 먹어야만 정상 가동하도록 설계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저리 가라니까…….”
머리만 쑥 들이민 나를 발견한 공작이 이마에 갈매기를 띄웠다.
나는 그가 대놓고 면박을 주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아침 같이 먹어 주시면 안 돼요?”
우리 조찬실로 같이 꺼지자!
곧바로 싸늘한 거절의 말이 날아왔다.
“난 안 먹어. 너나 먹어.”
좋아, 한 번은 튕겨 주시고. 나는 서럽게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혼자 먹으려니까 외롭고 심심하고 슬퍼요. 원래는 할아버지랑 항상 같이 먹었는데…….”
서류 위에서 춤을 추던 공작의 펜이 움찔 떨렸다.
나는 소맷자락으로 있지도 않은 눈물을 찍어 냈다.
“할아버지가 삼시 세끼는 꼭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
“저 혼자는 쓸쓸한데…….”
키스 경이 내 위로 슬그머니 함께 머리를 들이밀었다.
“각하, 어제 저녁 식사도 서재에서 드셨지 않습니까?”
마침 서재로 온 제미언이 또 그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맞습니다. 지금 사흘 내내 밤샘이신데, 식사할 틈 정도는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나는 슬쩍 고개를 위로 꺾어 보았다. 공작을 보필하는 오른팔과 왼팔이 동시에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서재 안으로 스윽 몸을 밀어 넣었다.
“헤헤…… 아침…….”
공작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오른손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아침 먹으러 내려갈 시간이 없어, 오렌지. 혼자 먹어.”
“그러며언…….”
여기서 같이 먹지 않으실래요?
때맞춰 주방장 호미 아저씨가 음식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아저씨의 얼굴에 비장미가 흐르고 있었다.
“이 집의 영양사이자 조리사이자 주방 총괄로서, 더 이상 각하의 불규칙한 식습관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제 직무 유기입니다!”
“……이 집엔 내 편이 없군.”
공작이 마침내 펜을 내려놓는 것으로 패배를 선언했다. 결국 서재에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마지못해 소파로 자리를 옮긴 공작이 내게 면박을 주었다.
“넌 혼자 밥도 못 먹냐.”
“넵. 전 어린이니까요.”
역시 나이가 무기지. 하지만 소파에 앉아서까지 서류를 놓지 않는 그를 더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얌전히 샌드위치와 콩소메 수프를 먹었다.
내 그릇이 모두 비어 갈 때 즈음, 공작이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베르너와 아르닌의 호감을 사 보라고 했지, 나를 신경 쓰라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은데. 순조로운가 보지?”
“으음…… 나름대로……?”
나는 애매한 대답만 흘리고 입을 꼭꼭 다물었다. 공자님이 나를 하녀로 착각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쩐지 비웃음을 살 것 같았다.
‘추궁해도 말하지 말아야지.’
그러나 공작은 더 깊이 파고드는 대신,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오렌지, 내일 아침에도 올 거야?”
“마가렛이 공작님이 아침 안 드셨다고 하면 올 거예요.”
“매일 오겠다는 얘기군.”
피실 웃음을 흘린 공작이 검지로 소파의 팔걸이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습관인 듯했다.
“그럼 올 때마다 그날의 진척 상황도 같이 보고해.”
나는 입가심으로 오렌지 주스를 마시려다 움찔했다.
“보, 보고라면 어떤……?”
“어제 하루는 애들과 뭘 했는지, 어때 보이던지, 오늘은 뭘 할 건지, 그런 것들. 뭐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양심이 따끔거렸다. 이중 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공작이 평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들을 만나러 갈 때는 꼭 어른과 함께 가고. 분위기가 안 좋다 싶으면 곧장 이리로 도망 와.”
“여기로요?”
“그래. 괜히 덤볐다가 다쳐 오지 말고.”
공작은 생각보다 자식들에 대한 객관화를 잘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나를 망아지들 사이에 떨어뜨려 놓은 게 조금은 마음에 걸렸거나.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아버지인 공작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남매의 성격이 장난 아니라는 소리도 된다.
‘어제 도련님에게 자수하지 않길 잘했어.’
그래도 뜻밖에 방공호까지 얻으니 마음이 한결 든든해졌다. 나는 함박웃음과 함께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무서우면 피신 올게요!”
“그래.”
공작은 내 보슬보슬한 앞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흐트러뜨리듯 쓰다듬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접시는 내가 식사를 끝내기 한참 전부터 이미 다 비어 있었다.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신 걸까?’
이렇게 종종, 있는 줄도 몰랐던 공작의 다정함이 슬쩍슬쩍 드러날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인 탓이었다.
‘아빠가 있으면 이런 기분일지도 몰라.’
공자님과 공녀님은 좋겠다. 저렇게 마음을 써 주시는 잘생긴 아버지가 계셔서.
나는 다시 피로한 낯으로 서류 산에 파묻힌 공작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소리에 주의하며 서재를 나섰다.
그렇게 아침 루틴이 끝났다.
나는 점심시간을 노려 베르너에게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공자님이요? 수련장에 계신답니다.”
“앗, 그럼 수련장이 어디예요, 마가렛?”
“오솔길에서 동쪽으로 꺾으면 바로 입구가 나와요, 아기씨. 하지만 지금은 가시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마가렛이 말을 흐렸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자,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도련님께선 훈련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더…… 으음, 거칠고 과격해지는 경향이 있으셔서요. 아기씨 혼자 가시면 혹시라도 다칠 수 있으니, 제가 함께 가 드릴게요.”
마가렛은 블라스코에서 잔뼈가 굵은 시녀장이었다. 요 며칠 나와 부쩍 친해진 언니이기도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곧바로 안심했다.
‘역시 검술 명가라 그런가, 이 집은 시녀님들도 다 실력자들인가 봐.’
마가렛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손목에는 보호대를 찼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시녀용 드레스가 팔락거리며 발목까지 감싸는 검고 타이트한 훈련복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정도면 시녀로 위장한 스파이 아니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