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 * *
아스트로카의 황후, 로사리아 베르누아. 처녀 적 이름은 로사리아 오르겐.
그녀는 오르겐 후작가의 차녀로, 국혼 당시부터 황제와의 열띤 로맨스로 온 아스트로카 국민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황제와 황후의 첫 만남에서부터 국혼까지, 그 일련의 과정이 책으로 쓰여 세간에 널리 퍼질 정도였다.
그 로맨스 소설은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덕분에 아스트로카에서는 그들의 아름다운 연애 스토리를 모르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눈부시게 빛이 나는 연인에게도 그림자는 있는 법.
아스트로카의 그 누구도, 심지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인 황태자 프리츠마저도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 로맨스가 실은 철저한 일방향이었다는 것을.
황제가 황후를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로사리아가 실은 남편인 황제, 페르테스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찻잔에 따듯한 차가 부어졌다. 편안한 허브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그러나 황후궁의 응접실에 마주 앉은 이들 중 누구도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적막 끝에,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를 보자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공.”
로사리아는 바로 오늘, 뜬금없이 독대를 청해 온 블라스코 공작을 차분히 뜯어보았다.
여전히 저 혼자 세월을 비껴가는 듯한 사내였다.
소문으로 오러 유저들은 신체의 생명 에너지인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보통 사람보다 더 긴 젊음을 누린다 했다. 루티어드 블라스코는 바로 그 낭설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산 증거였다.
무심한 눈매, 오만하리만큼 높은 콧날과 매끈한 뺨, 묵묵히 다문 입술 선, 예민한 냉기를 풍기는 분위기까지 전부 10여 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다 큰 자식이 둘이나 있는 아버지라고 누가 믿을 것인가?
공작의 낯빛은 오늘따라 더욱 창백했다.
“나야말로, 갑작스러운 요청을 받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받아 주지 않으면 황후궁으로 들이닥치는 결례도 무릅쓰실 것 같기에.”
“정확히 보셨군요.”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제 와서 내게 사과할 마음이라도 들었나 보죠? 작년에 알현실 앞에서 나를 상대로 검을 뽑을 뻔했던 일에 대해서 말이에요.”
공작은 여전히 황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 툭 던지듯 물었다.
“다음 달에 동생의 기일이 있다는 걸 압니까?”
로사리아의 긴 속눈썹이 움칠 떨렸다.
루테.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오늘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시네요. 작년에 제가 똑같은 걸 물었을 때는 과격하게 반응하시더니.”
작년 이맘때 즈음, 로사리아는 지나가는 말로 공작에게 루테 블라스코의 기일을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공작은 감히 너 따위가 내 동생의 기일을 입에 올리느냐는 식으로 반응했고, 심기가 상한 그녀 역시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하지만 그쪽 얼굴을 보면 자꾸만 그 남자 생각이 나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로사리아는 싸늘한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녀가 처음 루티어드 블라스코와 그의 쌍둥이 동생을 만난 것은 열일곱 살의 사교계 데뷔 무대에서였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고위 귀족의 정석과도 같은 형과 달리, 루테는 타고나길 자유롭고 호방한 탕아였다. 가주 따위는 하기 싫다며 블라스코의 가주 결정전에서도 기권표를 던졌다고 했다. 그러곤 홀로 대륙 이곳저곳을 탐험하러 다니는가 하면, 검으로 이름깨나 떨친다는 이들을 발아래 무릎 꿇리는 재미로 살았다.
엄격한 귀족 사회의 어린 영애들 중에는 자유로움 그 자체인 그를 선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로사리아도 그중 하나였었다.
아직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불같은 첫사랑. 차라리 황제와 약혼하지 말 걸 그랬다며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던지.
공작이 나직이 말했다.
“그게 16년 전 여름이었지요.”
“……그런가요?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군요.”
16년 동안, 그들이 지금 이 순간처럼 두 마디 이상 평연하게 나눈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웬일로 공작이 침착하다.
“기일이 다가오니 생각이 많아지더군. 그쪽 남편이 죽인 내 아내, 동생. ……그리고 그 애 연인까지.”
그러나 말을 맺는 순간, 테이블 아래서 공작의 손이 의자의 팔걸이를 부서뜨릴 듯 움켜쥐었다.
황후는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대번 표정을 굳힌 그녀가 쌀쌀맞게 일갈했다.
“말을 가려 하셔야 할 듯해요, 공. 이곳은 블라스코령이 아니라 황성입니다.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 주세요.”
“나는 원래 예의라는 걸 잘 몰라서.”
말끝이 짧다.
로사리아는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루티어드 블라스코. 공작위에 오르기 직전까지는 과묵하고 진중하며 사려 깊은 사내였는데, 아내와 동생이 죽고 난 뒤로는 그도 많이 변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보이면서도 속은 무례하고 난폭하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날, 루테가 죽기 직전에 참석했던 연회에서 그 애를 봤습니까?”
“……식사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그날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바람에, 다음 날이나 되어 부고를 받았지요.”
“식사하며 본 자가, 틀림없이 루테였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그럼 그분이 다른 사람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로사리아가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공작이 아주 기막힌 소릴 들었다는 양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우스울 만큼 얄팍하십니다. 황후께서 품었다는 그 연정이란.”
“…….”
“루테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기억 안 납니까?”
로사리아는 입술 안쪽을 티 나지 않게 깨물었다.
기억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몇 년이나 남몰래 지켜 오던 순수한 첫사랑이 산산조각 나던 그날을. 그때 남자의 눈에 맺힌 경멸과, 냉랭하게 굳은 입매를.
“나의 무엇을 보고 사랑한단 겁니까? 이해가 안 가는군.”
비수처럼 날아오던 거절을.
“못 들은 걸로 하죠. 황후께서 부군이 아닌 남자에게 사랑 고백이나 하고 있다는 게 퍼지면 황실의 꼴이 아주 보기 좋겠습니다.”
“루테…….”
“허락한 적 없는 이름은 부르지 마시고. 이 손은 그만 놓으십시오. 세니가 기다립니다.”
받아 달라고 한 고백도 아니었다. 단지 알아주기만 바랐을 뿐인데. 싸늘하게 일갈하자마자 제 연인에게 가 버리는 뒷모습을 얼마나 허망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을 아버지와 남편에게 고스란히 들켰을 때, 그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자리에서 로사리아는 아버지인 오르겐 후작에게 뺨을 맞았고, 남편의 손에 황후궁으로 끌려갔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로사! 황후 된 여인으로서, 내 아내로서……. 그간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건 다 거짓말이었나!”
“아니지, 로사? 그놈이 먼저 너를 유혹한 거지. 그렇지?”
눈이 돌아간 황제는 당장 루테를 죽여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평소에도 의처증이 심하던 그였다.
로사리아는 분노하는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그 남자를 가질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 역시도 그의 연인의 것이다. 그들의 생이 겹칠 일은 없다.
그때 로사리아는 충동적으로 결심했다.
“맞아요. 그냥 죽여 버려요, 페르테스.”
내가 평생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도.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걸 이 화려한 감옥 같은 성에서 지켜보며 살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황제는 정말로 루테 블라스코를 처리한 뒤, 득의양양해서 그녀에게 돌아왔다. 도망친 세레이나 아이옐나스까지 뒤쫓고 있다는 소식을 들고서.
그것으로 로사리아의 첫사랑은 영원히 끝이 났다.
‘아.’
로사리아는 발치에 스치는 스산한 기운에 퍼뜩 회상에서 깨어났다. 힐끗 아래를 곁눈질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인가……?’
그녀는 그렇게 여겼지만, 착각은 아니었다.
황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새파란 오러가 공작의 발치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테이블 아래로 흘러간 오러는 황후가 앉은 의자 다리를 감고 서서히 위로 기어올라 갔다.
“……아무튼.”
로사리아는 혼란을 잠재우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기일이 다가온다니 공작께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습니다. 언제나 유감이에요.”
“…….”
“세레이나라는 그분의 약혼녀도요.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타지에서 홑몸도 아닌 채로.”
그 순간이었다. 막 황후의 손목과 허리를 감으며 목을 겨누고 올라가던 오러의 흐름이 우뚝 정지했다.
“……방금.”
손끝을 모으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던 공작의 눈이 커져 있었다.
“방금 뭐라고……?”
그의 음성이 크게 흔들렸다.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공작의 반응에 놀란 것은 로사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당혹스럽게 되물었다.
“왜, 새삼스럽게……. 설마, 모르셨나요?”
그럴 리가 없다.
황실 기사들과 오르겐 후작가의 사병들이 세레이나라는 사막 국가 야토르 출신 여인의 흔적을 뒤쫓으며 보내 왔던 보고에서는 분명히…… 아이를 가진 상태이니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로사리아는 말을 더듬었다.
“시신을, 블라스코에서 수습한 것으로 아는데.”
아, 설마?
퍼뜩 유력한 가정을 떠올린 로사리아의 눈에 경악이 스쳤다. 기사들이 추격 끝에 그 여자를 찾아냈을 때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발견되기 전에 아이를 낳았던 건가?
혹은, 블라스코에서 여자의 임신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로사리아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공작이 루테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거라면, 나 지금 말실수를…….’
로사리아가 유지하고 있었던 고상하고 우아한 황후의 가면이 산산이 깨어졌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눈 깜짝할 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목덜미가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혔다.
“……!”
사나운 열기가 들들 끓는 새파란 눈이, 지척에서 로사리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지옥에서 억지로 끌려 올라온 것만 같은 참혹한 음성이 겁에 질린 황후를 짓눌렀다.
“다시 말해 봐. 세니가 그때, 어떤 상태였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