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 * *
공방의 공사를 시작한 날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도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어떤 연통도 날아오지 않았다. 하나 다행인 것이라면, 황성에서 칼부림이 났다는 소문이 퍼지지는 않은 것 정도……?
“걱정 마, 카티.”
아르닌 언니와 베르너가 돌아가며 나를 위로했다.
“아버지가 어디 가서 당하고 오실 분은 아니잖아. 그리고 너를 생각해서라도 무리하게 일을 벌이시진 않을 거야.”
“일단 아르템이나 다른 블라스코 영지에는 방문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어쩌면 오랜만에 취미 생활을 하신 걸지도 몰라.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시며 환상종들을 모아 오시는 취미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거면 굳이 내게 말을 안 하고 사라지실 이유가 없는걸…….
‘아빠 보고 싶다.’
혹시라도 저택에 잠깐 들르실까 봐,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 매일매일 쪽지를 하나씩 올려놓았다.
흑흑 우는 표정도 같이 그려 넣었다. 요즘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데다 밤에는 아이칼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머리는 복잡하고, 침대는 텅 비었고, 밤은 길다.
나는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아이칼을 부른 모양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헉.”
평소처럼 나를 깨우러 문을 노크한 마가렛이 꽥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저 애는 또 왜 여기에!”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옆을 돌아보니, 백색 꽁지머리의 소년이 내 옆에 있었다. 내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깊어진 눈을 하고.
잠결에도 반가움이 솟았다.
“뭐야……. 언제 왔어……?”
“새벽에. 네가 불렀잖아. 기억 안 나?”
“내가? 으음…….”
나는 한 바퀴 데구르르 굴러 아이칼의 옆구리에 머리를 꿍 박았다. 그랬을지도.
아이칼이 나를 이불 고치에서 쑥 꺼내 제게 기대게 했다.
“잠꼬대가 점점 심해지네, 카티.”
“또 그랬어? 이상하다. 꿈은 안 꿨는데…….”
“꿈꿨어. 둔해 가지고는.”
“내가 뭐라고 했는데……?”
“항상 똑같아. 혼자 있기 싫고, 죽기 싫고.”
“왜 자꾸 그런 잠꼬대를 하는지 모르겠네…….”
아이칼이 팅팅 부은 내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살살 문질러 주었다. 우리의 일종의 아침 루틴이었다.
이상하게 자고 일어나면 항상 눈이 붕어가 되어 있는 날이 잦았다. 꼭 한바탕 울고 일어난 것처럼. 그럴 때 아이칼의 냉기가 무척 도움이 됐다.
‘아이, 시원해.’
나는 반쯤 잠에 취해 아키의 시원한 손에 눈가를 비볐다.
그러다 마가렛의 경악 섞인 외침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가씨이이이! 제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서 빨리 설명해 주셔요!”
아, 맞다. 우리 지금 각자 격리당하는 중이었지!
* * *
시녀들의 손에 붙들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씻고, 잠옷 대신 멀쩡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에야 나는 아이칼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바깥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던 아이칼이 냉큼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제구 탓인지 평소보다 움직임이 확실히 굼뜨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는데, 그 동작에도 맥이 빠져 있었다.
아이칼이 내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을 맡곤 중얼거렸다.
“좋은 냄새 나, 카티.”
“방금 씻었으니까. ……그런데 평소에는 아니었다는 것처럼 말한다, 너? 맞을래?”
“네가 때려 봤자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친 아이칼이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금제구를 차고 난 이후부터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어쩐지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더 도망 다니는 것도, 검투장에서 탈출하는 것도 모두 체념해 버린 것만 같던 그 울적한 모습.
하긴, 이렇게 무겁고 갑갑한 족쇄로 목이며 손목을 조이고 있는데 기운찬 게 더 이상하겠지.
“아직도 이상한 목소리 들려?”
“이걸 차고 나서부터는 안 들려.”
“그래. 그나마 다행이다.”
에고, 내 친구. 힘들겠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옆에서 강렬하게 쏘아보는 눈빛을 감지하고 슬쩍 손을 내렸다.
마가렛과 카렌이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어쩐지, 아가씨께서 가끔 옷장에서 일어나셔서 대체 왜 저런 곳에 들어가 주무실까 걱정했는데…….”
“꿈자리가 사나우신 게 아닐까 했는데, 범인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니.”
마가렛과 카렌이 합심해서 아이칼을 노려보았다.
“내가 아키 밥도 매일 줬는데. 우리 손으로 대체 뭘 키운 거지?”
“짐승 새끼를 키운 거야. 세상에,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매일 같이 먹고 자고 놀고 하셨다는 거 아니야!”
나는 그 대화들의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다. 그건 아이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고개를 비틀어 내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러곤 마가렛과 카렌을 빤히 응시하며 느릿느릿 내뱉었다.
“언제는 짐승 새끼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말하네.”
“……!”
“새삼스럽게.”
언제 내 허리에 팔을 둘렀는지, 나는 아이칼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하얀 머리칼이 내 뺨을 간질였다. 서로에게 치대는 건 일상이라, 나는 별 감흥 없이 그가 내게 달라붙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랜만에 아이칼에게 안겨 있으니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마가렛과 카렌은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저, 저, 저놈 저거 눈빛 좀 보게!”
나는 아이칼의 발언에 “그러게.” 하고 동조하려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새끼 눈표범이니까, 뭐…….’
따지고 보면 결국에는 짐승 새끼라는 게 맞는 말이기는 한데. 지금 그렇게 말했다간 굉장히 눈치 없는 사람으로 몰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마가렛에게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
“아버지한테 이르지는 않을 거지, 마기?”
“아가씨…….”
마가렛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얼른 눈썹을 서러운 팔자로 만들었다.
“나는 믿어. 마기가 그렇게 매몰찬 사람이 아닐 거라고. 얘가 이렇게 아프고 우울해하는데……. 맨날 나랑 같이 지냈는데,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 놀랐을 거야.”
“나 아프진 않아, 카티.”
아이칼이 나직하게 지적했다.
나는 애써 꿋꿋이 말을 이었다.
“원래 동물들한테는 죄가 없는 거랬어. 얘 인간 아니야. 동물이야. 분리 불안증이 조금 있어…….”
“반은 인간이야.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카티. 나 머리 울려. 안아 줘…….”
이게, 진짜. 도와주려고 해도.
나는 울컥해서 아이칼의 입에 그가 질색하는 치즈 맛 쿠키를 쑤셔 넣어 버렸다.
그때였다. 기묘한 위화감이 옆통수를 똑바로 찔렀다.
‘어?’
나는 힐끗 문가로 시선을 던졌다. 하나로 모아 묶은 금발 끄트머리가 언뜻 보인 듯도 싶었다.
‘지켜보고 있었나, 니엘라?’
요즘 유독, 내가 아이칼과 붙어 있을 때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니엘라가 있었다.
‘이 며칠간 벌써 세 번이라면 단순한 의혹은 아닌데.’
쟨 누굴 훔쳐보고 있는 걸까? 나일까, 아니면 아이칼일까?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정보 길드 밤비의 플로비아 씨로부터 연통이 도착했다.
아르닌 언니의 첫 마도 도구인 내 ‘실드 스피어 베타-미니Ⅰ’ ― 어린이용 창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급한 대로 멋져 보이는 이름을 대충 붙였다 ― 가 경매에서 최고가인 3500골드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실드 스피어 베타-미니Ⅰ을 손에 넣은 낙찰자는, 하베르트 오르겐. 오르겐 후작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며칠 뒤. 오르겐 후작이 실드 스피어 베타-미니Ⅰ의 제작자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소식이 블라스코까지 흘러들어 왔다.
* * *
니엘라는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새벽에 잠시 이슬비가 내리더니, 오후에는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막내 공녀를 비롯한 블라스코 삼남매는 정원에서 오후의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문 밖에서 도란도란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면상 한 번만 보자니까 그러네. 이런 비겁한 놈 같으니. 카티만큼 귀엽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
“성검의 주인이라며? 나와 대련해서 이기면 내 동생을 주마.”
“아잇, 둘 다 내 친구 그만 괴롭혀요. 좀……!”
니엘라는 힐끔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도 눈에 확 튀는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보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 검은 장미 무늬가 난 새하얀 짐승이 몸을 말고 있었다.
‘신수 아이칼. 이클라스족의 하프. 성검 힐라이야의 주인이자 백의 교단의 이번 대 파수꾼.’
본래라면 저 소년의 정체를 후작에게 진작 보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니엘라는 고민 끝에 보고를 미루었다. 저 신수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를 노려보던 싸늘한 눈동자를 떠올리면 서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저 살인 미수범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니. 아무리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지만.
‘나 이런 취향이었나? 싫은데…….’
니엘라는 불편한 심정으로 커튼을 내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