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 * *
늦은 오후, 블라스코 타운 하우스.
“흐음~.”
나는 오르겐 후작가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를 쫙 펼쳐 들고 콧노래를 불렀다. 오후에 플로비아 씨와 아르닌 언니가 가지고 온 전리품이었다.
적당히 변장한 아르닌 언니와 내 대타로 건물주 역할을 해 준 플로비아 씨의 합작. 공방의 명의 양도 계약서에는 나와 아르닌 언니의 가명이 적혀 있었다.
케브릴 아이엘산은 내 이름과 미들네임, 이전에 쓰던 성의 변형이고, 에이슬라 콜바스는 아르닌 이슬라 블라스코의 변형이다.
우리의 가명 옆에 찍힌 것은 정보 길드에서 새로 파 준 신분증에 딸린 새로운 인장이었다. 결론적으로 공방의 진짜 주인이 아르닌 언니로 바뀐 셈이다.
“어디 보자…….”
나는 목에 건 패스를 톡톡 두드렸다.
플로비아 씨에게 후작에게서 넘겨받은 돈을 ‘케브릴’이라는 가상의 인물의 금고에서 내 명의의 금고로 넘겼다고 보고받았다.
“오, 예!”
잔액이 다시 백만 골드를 훌쩍 넘었다.
약 5만 7200골드로 공방을 짓고 그걸 10만 5000골드에 팔아 아르닌 언니의 명의로 돌렸으니, 나는 약 4만 7800골드의 차익을 남긴 셈이다.
나는 패스를 놓고 냅다 양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만세다!”
바로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아이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는 소파에 기대앉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이칼이 내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이게 얼마짜리 계약서인데.”
나와 아르닌 언니의 공방을 사들일 줄은 알았지만, 언니 명의로 돌려주기까지 하다니. 후작이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흐뭇하게 계약서를 읽으며 옆으로 데굴 몸을 굴렸다. 내가 제 허벅지 위에서 냅다 한 바퀴 구르는데도 아이칼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 기분 좋다.
마음이 한껏 푼푼해졌다.
나는 플로비아 씨가 보내온 서신까지 쭉 읽어 내렸다.
“갈테아스 영지까지 담보로 잡았다니. 여기 경치가 참 예쁘대, 아키. 대륙 중부로 나가기도 좋고.”
“그래?”
“응! 나중에 놀러 가자.”
어차피 이곳도 내 땅이 될 거거든.
나는 음흉하게 히죽거렸다.
뭐든 담보로 내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영지를 걸 줄은 몰랐다. 하기야, 20만 골드나 빌리려면 영지와 성 정도는 담보로 잡혀야 가능했겠지.
“역시, 현금이 없으면 서러워지는 법이지.”
“인간들은 그 작고 동그란 금 조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다.”
“뭐어, 돈이 있다고 모두가 다 행복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큰 부분을 차지하기는 하니까.”
“희한하네.”
“너는……. 음, 네게는 돈이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칼을 슥 올려다보았다. 그는 오늘도 역시 목에 무거운 금제구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사이 적응했는지 처음처럼 불편한 기색을 비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 흉악스런 것도 조금 거슬린다 뿐이지, 그를 완벽히 구속하지는 못한다.
‘잡아 뜯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
그러지 않는 건 내 곁에 있으려고 그러는 거고.
아이칼이 습관처럼 내 오러를 꺼내다 손안에 휘감았다. 내 노을색 오러가 더 투명하고 영롱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한기는 덤이다.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키, 세 시간 다 됐어. 이제…….”
가.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안 가면 안 돼?”
“안 돼. 그러다 아빠한테 들키면…….”
“어차피 없잖아, 네 아빠.”
아, 맞다. 아버지 아직 없지…….
아버지가 수도에서 간데없이 사라지신 지도 벌써 3주가 넘었다.
다행인 건, 며칠 전에 저택으로 서신 하나가 날아왔다는 점이었다. 급히 볼일이 생겨 서부에 다녀올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놀고 있으라는 전언이었다.
그걸로 일단 마음은 놓았지만, 걱정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당장 얘만 해도…….
‘아빠도 없는데, 아이칼이 다시 제멋대로 굴기라도 하면.’
그렇게 되면 정말 막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슬쩍 뒤로 더 물러나자, 아이칼이 내 손을 꽉 붙들었다. 당기는 힘에 나는 도로 제자리로 끌려왔다.
“얌전히 있을게.”
나를 힘으로 끌어당긴 주제에, 아이칼이 고분고분하게 속삭였다.
“아무도 안 물고, 할퀴지도 않고, 조용히 있을게.”
“그래도…….”
“난 네 앞에서는 착하게 굴어. 알잖아?”
내가 망설이는 걸 눈치챈 아이칼이 금세 손아귀에 힘을 풀고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필 오늘은 머리를 묶지 않고 있는 바람에 예쁘장한 미소년 분위기가 도드라졌다. 우울하고 어딘지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긴, 하루에 세 시간은 너무 짧긴 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 버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이칼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온다.”
“응? 누가?”
“방해꾼.”
그가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바꾸었다.
새끼 눈표범이 소파 아래로 폴짝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들이닥쳤다.
“카티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상기한 아르닌 언니가 문가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에 웃음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언니!”
나는 방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조금 전까지 아이칼이 차지했던 자리에 냉큼 앉은 언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카티. 이렇게라도 그 능구렁이에게 한 대 먹일 수 있게 해 줘서.”
언니의 하늘색 눈에 증오와 희열이 번갈아 어른거렸다.
아마 후작을 대면하는 내내 수없이 검자루로 손이 가려는 충동을 삭였을 것이다. 오르겐 후작은 아르닌과 베르너 남매에게는 부모를 죽인 원수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검지를 척 치켜들었다.
“아직 그런 말 하기는 일러요, 언니.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요.”
고작 5만 골드의 차익?
어림없다.
후작가의 빚을 고작 20만 골드에서 그치도록 한다고?
그것도 오르겐 후작가라는 명문 귀족 가문을 고꾸라뜨리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아르닌 언니의 공방은 몰락의 길을 향한 그들의 첫 발돋움일 뿐이다.
“계약 조건대로, 후작에게 달에 한두 개씩 무기와 설계도를 넘겨요. 후작이 설계도를 혼자만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걸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겠죠.”
“흐음.”
“그러려면 당연히,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필요할 테고요. 그들이 작업할 대장간도 또 지어야 할 테고, 인부들도 고용해야 할 테고…….”
나는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 더미들을 뒤적거렸다.
몇 주 전 내가 번화가를 쓸고 다니며 가문에 고용된 기술자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선물을 보낸 뒤로, 블라스코령의 영지 곳곳에서 장인들의 감동에 젖은 손편지들이 날아왔다.
루시스 경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본가에서 직접 편지와 선물을 보내 공을 치하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보내신 선물도 그들에게 무척 유용한 것이고요. 잘하셨습니다, 아가씨.”
내가 보낸 선물은 릴리번트 약초 상회에서 주문 제작한 근육 이완과 강화 촉진 효과가 있는 약초즙 세트였다. 헤르젠 할아버지가 알려 준 스페셜 레시피다.
‘시간만 있으면 내가 직접 배합했을 텐데.’
아쉽기는 하지만, 헤르젠 할아버지의 레시피가 장인들의 향수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보내온 편지에는 하나같이 내 제안에 따르겠다는 동의의 뜻이 표현되어 있었다.
‘분명히 우리 쪽 장인들에게도 접근하겠지.’
후작이 장인들에게 손을 뻗으면, 촘촘한 블라스코 네트워크를 통해 그 소식이 내게까지 올라올 것이다.
“그럼 미리 알고 막을 수 있겠네?”
“아뇨. 후작과의 거래를 받아들이라고 해야죠.”
“뭐?”
“그래야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낼 수 있고, 나아가선 언니에게 힘이 돼 줄 수 있잖아요.”
돈이 들어갈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근 300년 만에 처음 등장한 마도구 제작자라는 희대의 대천재를 이대로 썩힐 수는 없을 테니까.
최대한 많은 장인들을 확보해 그 설계도를 전수받도록 하겠지.
‘물론, 죄다 가짜 설계도겠지만.’
미쳤다고 내가 후작에게 그 진귀한 마도 무기들을 그냥 넘기겠는가?
아르닌 언니가 넘길 물건들은 모두 하자품들이다.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하자품.
무기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한 그런 정교한 실패작들 말이다.
‘그리고 후작은 그걸 골라낼 수 있는 눈이 없지.’
가짜 설계도, 하자품들, 그리고 블라스코에서 역으로 심어 놓을 장인들.
오르겐은 아주 커다란 허울을 위해 알맹이까지 빼다 투자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드는 돈은 죄다 중앙은행에서 나올 테고.
‘은행에서 돈을 꾸는 만큼 담보로 잡히는 가보나 영지의 규모는 점점 커지겠지.’
마도구 제작자와 마도 무기들을 앞세워 귀족들의 신뢰와 투자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빚에 빚을 지다가…… 한 방에 팡.”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제 후작이 얼마나 일을 키우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아르닌 언니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옛날부터 생각한 거지만, 카티는 가끔 화가 나면 좀…….”
“좀?”
“블라스코 같아. 물론 욕은 아니고, 칭찬이야.”
물론 아주 훌륭한 칭찬이다. 쿡쿡 웃음이 나왔다.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에 내 친아빠가 이런 식으로 망했기 때문이다.
‘가짜 정보에 홀려서 사채까지 끌어 사업했다가, 폭삭 주저앉았지.’
무지막지한 빚더미에 깔려서, 빚쟁이들에게 쫓기다가 암울한 미래에서 벗어날 아주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응, 사실 안 웃긴다.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다. 난 그분의 얼굴을 영정 사진으로 처음 보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전생의 부모님들에게 정이 없었다.
자연스레 요 근래 하루에도 백 번 넘게 하는 생각이 또다시 떠올랐다.
‘우리 아빠나 보고 싶다…….’
나는 습관적으로 목에 건 조개 로켓을 만지작거리며 문밖으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니엘라의 오러.’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는 아까부터 밖에서 계속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