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마침 아르닌 언니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다시 공방으로 가 볼게, 카티. 정리 좀 하면서 후작에게 더 뜯어낼 게 없나 살펴봐야겠어.”
“변장 들키지 않게 조심해요, 언니.”
“걱정 마.”
아르닌 언니가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손에 사용자의 모습을 일부 바꾸어 주는 위장 마법을 새긴 건틀릿을 끼고 있었다. 언니의 최신작이다.
‘일취월장. 기특해라, 우리 언니.’
루티어드 님이 언니를 보셨다면 지금 나처럼 엄청 기뻐하셨을 텐데. 물론 우리 아빠도.
언니가 떠난 뒤 나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이칼은 언니와 마주치기 싫었던지 밖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하기야 마주치기만 하면 목덜미를 콱 잡고 얼른 인간화하라며 들들 볶으니, 대면하기 싫을 만도 했다.
“자, 그럼……. 들어와, 니엘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니엘라는 밖에서 나와 아르닌 언니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일부러 그녀가 계속 엿듣도록 놔두었다. 그러니 이제 모 아니면 도였다.
나는 니엘라를 싸늘한 눈초리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방금의 대화를 모두 들은 이상, 내게도 두 가지 길밖에는 없어, 니엘라. 널 내 편으로서 완전히 신임하든지, 아니면 지금 죽여 입을 막든지.”
“…….”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길 바라?”
니엘라는 두 주먹을 꾹 쥔 채,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손아귀에서 힘이 탁 풀렸다.
그녀는 맥 빠진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던, 공녀님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군요. 어차피…… 저를 이용하실 셈이었으니까. 처음부터.”
그녀의 만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의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상처받았다고 말할 셈인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싫어질……
“저는 당신이 싫어요.”
내 예상은 틀렸다. 돌직구를 날린 니엘라가 나를 보며 실없이 웃었다.
“공녀님께서도 그렇겠죠. 기어이 등 돌린 배신자를 두 번 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제 감정은 고작 그만큼의 깊이가 아니에요.”
“……그럼?”
“나는 당신이 싫어……. 우리는 뭐가 다를까? 뭐가 달라서 나는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공녀님께선 너무도 쉽게 모든 걸 이뤄 내시는 거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원작이라는 치트 키를 쥔 사람으로서, 나는 도통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다.
니엘라가 한 발 한 발 내게 가까워졌다.
“꼭, 처음부터 다 당신 것이었다는 듯이 말이에요. 이건 불공평하잖아. 나는 사생아고, 당신은 평민인데. 뭐가 어떻게 다르길래……?”
니엘라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제 질투심과 열등감을 표출할 줄은 몰랐다.
울 것만 같은 그녀의 표정이 이제서야 보였다. 예쁜 적갈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등 뒤로 숨긴 단도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 사람은 때때로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과격한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내가 단도를 뽑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니엘라의 몸이 내 발치로 허물어졌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니엘라가 눈물로 반질반질한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에 심지가 단단히 서 있었다.
“제게 아직까지 선택권이 남아 있다면, 공녀님 곁에 있겠습니다.”
“……이유는, 오르겐 후작의 내리막길이 눈에 보여서?”
그렇다면 블라스코가 흔들리는 날이 온다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는 말이렷다. 께름칙한 이유였다.
그러나 니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제 것을 찾아보고 싶어서요.”
“……흠.”
“지금까지 이 세상에 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어요. 선택권조차 없었어요. 빈민가로 쫓겨나거나, 혹은 평생 하녀, 아니면 후작님의 체스판 위의 졸병 역할이나 할 테죠. 그런데 공녀님께서 평생 그렇게 살 셈이냐고 물어봐 주셨어요.”
“…….”
“꼭 제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처럼. 어딘가에는 제 것이 있다는 것처럼.”
사실 나는 니엘라에게 아주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후작가의 피가 반이나 섞여 있다. 무려 황태자의 사촌이고, 황제와 황후의 외조카다. 일단 적어도 황태자 프리츠는 니엘라를 적대시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내 예상대로 후작가의 가세가 성실히 기울어 준다면…… 니엘라가 제 몫을 정당히 챙길 수 있는 빈틈도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많은 것을 손에 쥔 그녀가 내게 충성한다면?
‘그때야말로 아주 훌륭한 이중 첩자 역할을 맡길 수 있을 테지.’
“제가 제 것들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니엘라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대가로 저를 이용하세요. 머리부터 몸, 마음까지 전부 다. 필요하다면 영혼까지도.”
나는 마침내 흡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등 뒤에 숨겼던 단도를 꺼냈다.
니엘라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가 머뭇거리면서도 내게 손등을 내주었다.
나는 나와 그녀의 손바닥에 차례로 가느다란 상처를 낸 뒤, 그녀와 손을 맞잡아 배어 나온 핏방울을 뒤섞었다.
“네 영혼까지 걸었으니, 맹세의 서약 정도는 해도 되겠지? 내가 너를 신임할 수 있도록.”
맞잡은 손 틈으로 작은 구슬을 끼워 넣으며 속삭이자, 니엘라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 사이에서 구슬이 파삭 부서졌다. 중앙은행의 고대 컬렉션 함에서 꺼내 온 서약의 구슬이었다.
[배신은 곧 죽음, 영혼의 소멸이어라.]이 약식 서약은 상호 간의 진실한 동의가 없으면 효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맞잡은 손 틈으로 짙은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라 우리의 몸을 옅게 휘감고 차차 스며들었다.
라일락 향이 공기 중에 짙게 퍼졌다. 나는 씩 웃으며 피투성이가 된 손을 흔들었다.
“내 거 뺏지 말고, 네 거 되찾으면서 살아.”
홀린 듯 나를 바라보던 니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서약이 완성되었다.
‘……됐어. 니엘라 포섭 성공.’
가슴이 뻐근한 고양감으로 조여 오기 시작했다. 힘든 퀘스트를 드디어 깼으니, 이제 보상이 주어질 시간이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얼른!’
내 기도가 닿은 걸까?
옷깃 밑에 감추어 놓았던 조개 로켓이 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해금!’
171 화!
영령의 탑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전말!
나는 니엘라의 손을 놓으며 문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마가렛, 루시스 경!”
큰 소리에 마가렛이 다급히 방으로 뛰어들었다. 루시스 경의 모습도 언뜻 보였다.
“아가씨, 무슨 일……!’
“내가 혹시 쓰러져도 놀라지 말고, 침대로 옮겨 줘!”
“예?”
“몇 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니까……!”
거기까지 말한 순간, 옷 속에서 로켓이 활짝 벌어졌다.
옷감 아래로 붉은 빛이 어른거리나 싶더니, 이내 시야가 새하얗게 뒤집혔다. 4년 만에 드디어 열린 것이다. 문제의 결말을 숨기고 있는 나의 로켓이.
콰앙.
나는 궤짝을 부술 듯이 박차고 나왔다.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타자기 위의 스크린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반짝이는 알림창이 나를 맞이했다.
몸이 바짝 긴장하며 목 뒤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 안에, 사멸한 세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담겨 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답답할 만큼 느린 로딩이 끝나고, 새로운 화면이 펼쳐졌다.
* * *
아르템의 본가는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평소의 여유를 완전히 잃은 이는 몇 주 만에 홀로 귀택한 공작뿐이었다.
“각하, 연통도 없이 어찌……?”
“세월의 정원으로 간다. 쫓지 마.”
공작이 내딛는 걸음마다 고운 황금빛 모래가 떨어졌다.
사용인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루테는 곧바로 정원으로 향했다. 16년간 얼씬도 하지 않았던 영령의 탑과 탑을 둘러싼 아름다운 정원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도 터질 듯이 뛰었다.
헤르젠 블라스코의 동상은 미로 정원의 중앙부에 세워져 있었다. 그의 관이 정원에 묻히고 그 위에 동상과 묘비가 놓이는 것을 아주 먼발치서 보았었다.
루테는 한 번 길을 엇나가지도 않고 곧바로 미로 정원으로 들어섰다.
양옆으로 늘어선 역대 가주들의 동상이 그를 발견하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루테.] [루테? 루테니?] [세상에, 루테가 세월의 정원에 들어왔어!]여럿의 음성이 어지럽게 귓전을 떠돌았다. 사방에서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이 또한 16년 만이었다.
영령들의 동상이 제각기 입을 벌리고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루테, 안색이 창백하구나. 너 괜찮니?] [아가, 무슨 일 있는 게야?] [우리 꼬마는 어디로 가고 너 혼자……. 너 꼴은 왜 그러느냐? 어디 모래 바닥에서 구르고 왔니?]“……아버지를.”
숨이 막혔다.
루테는 작게 헐떡이며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지를 불러 주십시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