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어느 정도는.]알 수 없는 눈으로 아들을 지켜보던 헤르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헛된 망상일까 봐 그 아이에게도, 네게도 말하지는 못했지만.]“무엇을 짐작하셨다는……?”
[카티샤가 세레이나를 닮은 것 같아 보인다고 했지, 루테. 그래. 나도 영령의 눈으로 보니 알겠더구나. 그 아이의 특이한 오러에 틀림없이 섞여 있는 사막의 기운을. 그 무거운 태양 볕과 뜨거운 모래의 열기. 그 냄새.]인간의 육신을 벗고 영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 전까지는 몰랐던 것들이 보인다. 존재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게 되는 덕이다.
[하나 내 눈에는 그뿐만이 아니다. 카티는 너를 많이 닮았어.]“…….”
[그 아이의 재능이 누구에게서 이어졌을 것 같으냐? 오러 유저뿐 아니라 오러를 각성조차 하지 못한 일반인에게서조차 오러를 감지하는 그 능력이. 나는 카티샤만큼 오러에 민감한 이를 생전 단 한 사람밖에는 보지 못했다. 비단 나뿐인가? 이 탑의 모든 영령께서도 그러하실 거다.]“…….”
[초대 다음으로는 네가 유일했어, 루테.]그런 체질을 가진 이는 블라스코 초대 가주 이후로 헤르젠 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500여 년 동안, 단 한 명도.
이번 대를 제외하면 말이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그리 생각했어. 블라스코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아이일 거라고. 당장 그 애가 가진 로켓만 보더라도…….]“로켓이라면?”
[⎕⎕ ⎕⎕, ⎕⎕⎕⎕이라는 제목의 ⎕이 있는……. 뭬야, 발설하는 게 안 되는 건가?]카티샤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헤르젠은 답답함에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대충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그 아이가 어쩌다 내 집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인지까지는 모른다는 거다. 누가 아이를 데려왔는지도. 왜 보란 듯 내게 그 ⎕을 보여 준 건지도…….]“……그렇습니까.”
루테의 낯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뜻이다.
사라진 아이가 카티가 맞는 걸까?
만에 하나 아니라면 그 아이는 어디로 갔으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나.
그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헤르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테, 이 또한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예?”
[이상하게도 요즈음, 퍼뜩퍼뜩 잡념이 끼어든단 말이지……. 누군가, 내 머릿속에 대고 말을 하는 것처럼.]루테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헤르젠은 깊어진 눈으로 올해 들어 그에게 일어난 기묘한 변화를 되짚기 시작했다.
문제의 시작은 올 초, 갑작스레 그에게만 들리기 시작한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종장이 얼마 남지 않았구먼……. 내가 깨어난 것을 보니. 그래, 헤르젠. 넌 언제쯤 기억을 되찾을 셈이냐?’
* * *
“…….”
나는 익숙한 알림 창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171 화를 전부 읽었지만, 4년 전처럼 ‘사라진 세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알림 창을 끄고 다시 페이지를 맨 처음으로 돌렸다. 스크린을 마구 긁는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맹세코, 이제껏 해금되지 않았던 [지.우.마>의 171 화가 이런 내용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정신없이,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건 아니야. 이럴 리가 없는데…….”
전생과 현생의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꼬이고 있었다. 세계의 리셋, 죽은 영혼, 설원의 신수, 치유와 재생의 검, 그리고 파괴의 마귀. 단번에 소화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물밀 듯 밀려들고 있었다.
‘다시, 다시.’
나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스크린을 건드렸다. 페이지들이 앞으로 넘어가고, 이윽고 맨 첫 페이지가 나타났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171 화는 니엘라의 회상에서 벗어나, 다시 영령의 탑에서 아이칼과 대치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했다.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 자도 빠짐없이 전부, 꼼꼼히.
* * *
[지금 우리, 마법처럼>171 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그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던가?
안간힘을 쓰며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던 니엘라의 몸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여기서 끝인 걸까?’
처음부터 거짓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으니, 이제 와 죗값을 치르는 걸지도 모른다.
떨구어진 니엘라의 시선이 그녀의 목을 조르지 않은 아이칼의 빈손으로 향했다.
그는 구겨진 서류 조각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느 노인의 분개한 호통이 탑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당장 그만 두시게, 백의 파수꾼! 탑에서 살생을 할 셈인가!]뒤이어 닥친 보이지 않는 충격파에 아이칼이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영령이었다.
[귀어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게 피와 시체란 말이다. 가뜩이나 네놈이 기습하듯 쳐들어오는 바람에 봉인진이 흔들리고 있는데, 마귀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책임질 게야?]“봉인을 지키는 건 그대들 사명이지, 내 알 바는 아니라 보는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굴 건가? 귀어스트와 힐라이야가 조우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시침 떼지 말게!]헤르젠 블라스코, 선대 블라스코 공작의 영령이 분노한 눈으로 아이칼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인 아이칼은 영령의 말을 잠시 곱씹어 보는 듯하더니, 이내 니엘라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래. 아직은 안 되지.”
[‘아직’이 아니라 ‘이미’다, 이 망나니 같은…….]영령이 이를 득득 갈았다.
니엘라는 감각이 없는 목을 간신히 주무르며 주위를 살폈다.
영령의 말대로, 영령의 탑 전체가 이미 한참 전부터 불온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참 전 아이칼이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탑의 균형은 어그러졌다. 이 탑은 원칙적으로는 마검 귀어스트를 봉인하기 위해 세워진 공간. 공간의 규제를 약화할 수 있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곳이었다.
탑에 가해지는 외부 자극의 강도가 높아지면 귀어스트의 봉인이 흔들린다. 블라스코의 봉인술이라는 마지막 방어막이 깨어지고 마귀의 제왕이 깨어나면, 그때부터는 일이 손쓸 수 없이 크게 번진다.
아이칼이 냉랭하게 조소했다.
“그렇게 가문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여태껏 손녀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말이 되나?”
이번만큼은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았는지, 영령은 침묵을 택했다.
그 때문에 경악은 모조리 니엘라의 몫이었다.
헤르젠 블라스코에게 손녀가 더 있었다니? 아르닌이나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은 아닐 테고. 숨겨진 핏줄이 더 있었다는 뜻인가?
아이칼이 쥐고 있던 서류를 내팽개쳤다. 니엘라의 앞까지 팔랑팔랑 떨어진 그것은 어느 연인의 약혼 증서였다.
아이칼은 단 한마디의 설명도 붙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니엘라는 알 것만 같았다.
서류의 상단에서 두 이름을 보았다.
루테 아르텐사 블라스코, 세레이나 아이옐나스.
니엘라가 알기로 전자는 현 공작의 쌍둥이 동생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그의 약혼녀의 이름일 테다.
그들의 약혼 서약서 밑에 적힌 카티샤 아인슬리라는 이름은?
‘혹시 그 이름이……?’
몇 달 전부터 아이칼이 묘하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건 니엘라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언질도 없이 며칠씩이나 훌쩍 자리를 비우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그는 그녀의 허락 따위가 필요한 존재도 아니었지만.
니엘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증거를 찾으러 다닌 거구나. 내가 진짜 귀어스트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다른 혈족을 찾으러.’
그리고 그가 찾은 증거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영령의 탑까지 올라온 것이다.
“야토르국의 상단이 이 증서와 함께 갓난애를 넘겨받았다더군. 세레이나 아이옐나스에게서.”
[……그래서, 아기는 어찌 되었다더냐? 사막으로 무사히 보내졌나?]“가긴 갔지. 두 해를 못 넘기고 죽었지만.”
[…….]“애초부터 개월 수를 다 못 채우고 태어나 기질이 약했다더군.”
무심한 선고에 영령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이칼은 그에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눈으로 허공의 한 지점을 더듬었다. 깊은 기억의 우물을 퍼내는 듯 보였다.
“그럼 내가 예전에 설원에서 만난 인간은 뭐지? 일단 저게 아니라는 건 확인했고.”
‘저거’는 니엘라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그럼 귀신같은 거였나?”
아이칼이 슥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과 은푸른빛 눈동자에 날카로운 초점이 돌아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블라스코의 종족 특성이 그거잖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검에 매여 영생을 사는 것.”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없네?”
아이칼은 웃고 있었지만 그게 정말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 아니란 건 바보라도 알 것이다.
니엘라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추위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그럼 그 애는 어디로 간 걸까?”
이윽고 웃음기를 지운 아이칼이 속삭이듯 물었다. 비단 헤르젠 뿐만 아니라 탑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32인의 영령들 전체를 향한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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