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인간의 혼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는 그대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답해 봐.”
[……육신의 오러 흐름이 멈추면, 영혼은 육신을 떠난다.]침묵을 고수하며 사태를 관전하던 2대 가주, 가이우스 블라스코의 영령이 앞으로 나섰다.
[자연에 떠도는 마나를 양분 삼아 지상을 떠도는 영혼도 몇 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적으로 소멸하지. 우리처럼 강력한 봉인에 의해 어떠한 매개체에 귀속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그래서?”
[그러니 죽은 그 아이도, 이미 소멸했거나……. 혹은 세계의 섭리에 녹아들어, 이 시공간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새로이 삶을 얻었을 수도 있겠지.]영령들이 하나둘씩 침중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이칼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의 의중을 쉬이 파악하지 못했다.
한차례 숨을 끊어 쉰 아이칼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나는 필요해.”
니엘라의 발치까지 떨어졌던 서류가 다시금 허공을 날았다. 얇은 종잇조각을 낚아챈 그가 그것을 보란 듯 흔들었다.
“나는 그 애가 필요하다고.”
적막이 길어질수록 공간을 휘감은 오러가 섬뜩하게 날을 세웠다. 신수의 분노가 점차 임계점을 향해 차오르고 있었다.
가이우스의 영령이 서둘러 중재를 시도했다.
[떠난 생명을 다시 되돌리는 방법은 없네, 파수꾼.]“있어.”
있다고?
그 대담하고도 확고한 발언에 탑의 모두가 경직했다.
니엘라는 섬뜩함을 느끼고 몸을 말았다.
신수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그들은 불확실함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들의 소관을 떠난 일에는 미련이 없되, 자신들의 힘으로 가능한 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로지 확신과 실행뿐이다.
아이칼이 불길하기까지 한 웃음기를 흘렸다.
“없었다면 내가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지.”
등골에 소름이 죽 가로질렀다.
머리 위에서 불길한 균열이 일었다. 니엘라와 영령들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향했다. 탑의 꼭대기 바로 아래 고치처럼 매달린 귀어스트의 방을, 어느새 솟아난 얼음 줄기가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이칼의 의도를 알아차린 영령들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파수꾼, 봉인을 깨뜨릴 셈이냐!] [안 돼, 마귀가 깨어나면……!]마검에 봉인된 마귀들의 제왕, 귀어스트가 가진 힘의 본질은 파괴의 속성이다.
봉인진이 무력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귀어스트의 주위에서 결계를 강화하고 있던 영령들이 맥없이 추락했다.
돔 형상의 아공간이 무참히 부서져 내렸다. 봉인이 깨졌다.
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봉인되어 있던 검이 무서운 속도로 아래를 향해 쇄도했다.
콰득, 검이 돌바닥에 박히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도 높은 은빛이었던 검날은 어느새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마검 귀어스트 주위로 마기가 스멀스멀 증식하기 시작했다.
가이우스가 길게 신음했다.
[라몬이시여…….]봉인진에 수백 년 동안 갇혀 있던 마귀의 제왕이 풀려났다.
곧 마왕의 부활을 감지한 마물들이 북해를 시작으로 대륙을 둘러싼 사면의 바다에서 기어올라 오기 시작할 것이다.
태양이 사라지고 달은 핏빛으로 물들 것이며, 대륙은 500여 년 전과 같은 암흑기에 휩싸일 터다.
초대 황제와 블라스코 가주와 같은 마법사와 검사가 탄생하지 않는 한 대륙에 드리운 암운은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걷히지 않을 것이다.
신들이 떠나고, 그들의 파수꾼이던 신수마저도 인세에서 모습을 감춘 지금.
세계는 빠르게 사멸의 길로 접어들게 되리라.
바야흐로 재앙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영령들이 망연히 부르짖었다.
[신수여,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아이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서히 한데 뭉쳐 마귀의 형상을 그려 내는 마기 덩어리를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청소.”
[뭐라고?]“치우려는 거야. 깨끗하게.”
단조롭게 대꾸한 아이칼이 단숨에 허공에서 새하얀 자태의 검을 뽑아냈다.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탑 한가운데서 성검 힐라이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500년 전까지 이 땅을 보살피던 치유와 재생의 여신 힐라이야가 권능을 불어넣어 만들었으며, 그녀를 따르던 성스러운 짐승, 신수 이클라스에게 하사한 검.
백의 교단에서 이클라스의 핏줄들을 통해 대대로 명맥을 잇게 한 시대의 명검 중 하나.
헤르젠의 영령이 깨달았다는 듯 짧은 침음을 냈다.
[재생, 그렇군…….]귀어스트가 파괴의 축을 담당한다면 힐라이야는 치유와 재생의 권능을 지녔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새로이 시작할 셈이로구나.]저 신수는 파괴와 재생의 대상을 세계로 확대할 셈이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발상이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힐 만큼 무모하며 무엇보다 위험하다.
[그것이 정녕 가능하다고 믿는가?]“힐라이야께서는 이 세계를 떠나셨으되, 늘 지켜보고 계신다. 당신이 사랑한 마귀가 봉인당한 이 땅을.”
[…….]“그러니 빌어, 영감. 마귀를 400년이 넘게 지켜 온 공이 있으니, 간절히 바라면 신께서 이루어 주실지도 모르지.”
파수꾼의 음성에는 위기감이나 조급함 따위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아이칼이 영령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얼굴도 못 본 손녀잖아? 그대들의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 가여운 희생양.”
그의 무정함을 탓하는 듯한 일갈이었다.
헤르젠이 침중하게 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니엘라만은 대번에 위화감을 감지했다.
‘가엾다고……? 거짓말.”
지난 시간 동안 아이칼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니엘라는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클라스족의 신수는 원래 동정심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그들은 인간을 연민하지 않는다. 지금은 인세에서 모습을 감춘 최초이자 유일한 순혈, 이클라스의 성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독점과 소유에 근간을 두며, 신수의 눈에 인간은 그보다 하등한 숱한 짐승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고립된 설원과 교단에서 군림해 온 아이칼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심한 축에 속했다. 오죽하면 별칭이 빙제였겠는가?
그런 그가 인간에게, 그것도 오래전에 죽은 하찮은 영혼 따위에 연민을 품거나 미련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사이였길래?’
그 낯선 이름이 무슨 의미길래, 아이칼이 답지 않게 흥분하고 이런 무모한 짓거리까지 감수하려는 걸까?
이윽고 마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귀가 웅크렸던 몸을 폈다. 가고일의 두 날개가 활짝 벌어지며 농도 짙은 마기가 증식하기 시작했다.
니엘라는 본능적으로 마기를 피해 몸을 물리며 숨을 참았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아이칼을 바라보던 헤르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이 어그러졌지.] [헤르젠, 자네 지금 무슨 소릴!] [내 아들들도, 며느리들도. ……그리고 내 막내 손주도.]영령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나, 헤르젠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좋다. 다시 시작해 보자. 과연 우리의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으나, 무엇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그의 발언에 또 한 번, 탑에 소리 없는 파란이 불어 닥쳤다. 니엘라는 아찔한 심정으로 아이칼을 돌아보았다.
오직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 *
카티샤가 또다시 쓰러졌다.
정확히 4년 전과 똑같은 이상 반응이었다. 오감이 닫힌 듯 시체처럼 가만히 굳어 있다가, 그대로 눈을 감고 허물어진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니엘라가 경악한 건 당연지사였다.
그나마 한 번 상황을 겪어 본 마가렛과 루시스 경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곧바로 상황을 블라스코 남매에게 전달한 뒤, 카티샤를 침대로 옮겨 눕혔다.
카티샤가 마지막에 시녀와 기사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니엘라가 공녀 살인 미수범으로 몰렸을 것이다.
공녀는 제가 쓰러질 줄 알았던 걸까?
니엘라는 곁눈질로 침대가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블라스코 남매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카티샤의 곁에 웅크리고 있던 눈표범이 모습을 바꾼 참이었다.
흰 옷자락이 조용히 나부끼다 이내 서서히 내려앉았다.
니엘라는 정결한 백색으로 무장한 소년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저 소년은 마치 자석처럼 그녀의 오감을 끌어당겼다. 이 위험한 인력에 불나방처럼 휩쓸리는 이가 비단 자신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발을 딛는 곳이 어디건, 그곳이 곧 이 세상의 중심인 듯한 착각.
지금의 이 두근거림이 설렘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후자에 가까웠다.
‘아무리 하프라고 해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풍기는 게 말이 되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