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바삭, 발치에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밟혔다.
니엘라가 움칠한 것과 소년이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카티는.”
여전히 음색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름 끼치게 낮은 것 같기도 하고, 무심하고 단조롭다가도 금세 어린 사내애의 속삭임처럼 간질거렸다.
“내 말은 전혀 안 듣지. 예전부터.”
니엘라는 제 주위를 동그랗게 포위한 뾰족한 얼음 줄기들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짧은 사이 적개심이 깃든 음성이 송곳처럼 날아들었다.
“저걸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억지…… 부리지 마세요. 이번에도 원인은 내가 아니니까.”
저 신수는 대체 왜 모든 일의 원인을 제게서 찾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물론 불순한 마음을 먹었던 건 사실이지만, 결국 블라스코와 공녀에게는 손끝 하나 못 댔잖아?
뭔가를 하기도 전에 야무지게 다 차단해 버린 게 누군데?
바닥을 뚫고 자라난 얼음벽이 막 니엘라를 가두려던 찰나였다. 죽은 듯 누워 있던 공녀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카티샤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실내의 냉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떠나기 싫어…….”
“…….”
“나도 여기에 있을래. 여기 있게 해 주…….”
공녀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보였다. 늘 통통 튀는 발랄한 모습만 보아 왔던 니엘라는 공녀가 저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소년이 골이 난 듯 낮게 목을 울렸다.
“또 우네…….”
네 꿈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고. 한숨 섞어 중얼거린 소년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침대에 올랐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 소녀를 가볍게 추어 올려 제 위로 올리고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폼이 능숙하다.
공녀의 훌쩍거림이 금세 잦아들었다.
니엘라는 물끄러미 그들을 지켜보다, 충동적으로 물었다.
“좋아해요?”
소년은 니엘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흘끗 눈만 돌려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시선에 무게와 질감이 있다면 아마 지금 자신은 두 눈이 꿰뚫렸을 것이다.
니엘라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답을 이끌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냈다.
“공녀님, 좋아해요?”
주어가 들어가자 아이칼의 반응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러나 니엘라에게 유리한 변화는 결코 아니었다.
콰드득, 바닥을 뚫고 솟아난 얼음 기둥이 유연하게 휘어져 니엘라의 발목을 낚아챘다.
아이칼이 험악하게 일갈했다.
“카티 부르지 마.”
“그쪽한테 묻는 거예요. 그냥 집착인가요? 아니면…….”
집착?
아이칼은 그대로 니엘라의 발목을 부러뜨리려던 것을 잠시 멈추었다.
집착.
흥미로운 단어였다.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으나 자신에 대입하여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일방적인 집착이 아니라면, 무슨 사이인데요?”
겁 없는 물음이 또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 아이칼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한 단어로 답했다.
“친구.”
“친구?”
니엘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세상 어느 친구가 그래요?”
“알아듣게 말해.”
“저, 적어도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는 하지 않아요.”
“그러면 달리 무엇이어야 하는데?”
되묻는 걸 보아하니 앞선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니엘라는 삽시간에 어이가 없어졌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손을, 잡거나.”
이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해?
니엘라는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포옹을 하면, 설렌다거나…….”
“설렌다?”
“그러니까 가슴이 막 뛴다거나. 눈을 못 마주치겠다거나……. 얼굴에 열이 오른다거나, 그런…….”
저 무심한 낯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도 제가 하는 말을 명확히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공녀는 대체 저 신수에게 이런 기본적인 감정 표현들도 가르치지 않고 뭘 한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곧 사그라졌다. 하긴, 공녀부터가 이런 것을 알았다면 저 신수와 저런 식으로 가깝게 지낼 리가 없었겠지.
어쨌거나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맺어야 했다.
아이칼이 그녀를 빤히 주시하며 뒷말을 종용하고 있었다.
“헤어짐이 아쉽다거나……. 아, 아니면.”
“……아니면?”
“다른 사람이 공녀님께 접근하는 게 보기 싫다거나?”
“…….”
“그러니까, 남자, 가요. 여자 말고 남자. 이성…….”
괜히 말을 꺼낸 제가 얼굴이 붉어졌다.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소년은 이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니엘라가 던진 말의 의미들을 곱씹는 듯했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읽어 낼 수가 없다.
니엘라가 보기에는 이랬다.
우정이라기엔 한쪽이 지나치게 절박하고, 그렇다고 사랑이라기에는 여물지 않은. 맹목적인 애정.
그것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라, 수평이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불균형한 관계.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눈을 내리깐 순간이었다. 섬뜩한 음성이 그녀의 정수리로 날아들었다.
“멋대로 재단하지 마.”
“…….”
“네깟 게 뭔데.”
아직 니엘라의 발치에 머물러 있던 얼음 줄기가 기어이 그녀의 종아리를 휘감고 올라갔다.
니엘라는 이어질 고통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으, 추워…….”
그러나 이번에는 공녀의 조그만 신음이 니엘라의 발목을 구했다.
니엘라에게 쏟아지던 아이칼의 시선이 뚝 끊겼다.
“나가.”
“네?”
니엘라가 채 되묻기도 전에, 강풍이 그녀를 문밖으로 떠밀었다. 뒤이어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침실에는 방해꾼 하나 없이 둘만 남았다.
이런 시간도 꽤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칼은 카티샤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잠결에 흘리는 목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기 위함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어…….”
카티샤가 품속에서 바르작거렸다.
몇 년이 지나도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는 잠버릇을 막으려, 그녀를 안은 아이칼의 팔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나도 있었는데…… 이름…….”
“…….”
“어떻게 읽는지 몰라…….”
“…….”
“죽기 싫어.”
이 애는 벌써 5년째 똑같은 악몽을 꾸고, 엇비슷한 잠꼬대를 했다. 평소였다면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을 테지만, 아이칼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머릿속에 다시금 낯선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쯤이면 슬슬 알아챌 때도 됐는데.’
“……내가 뭘 알아야 하지?”
‘공백.’
공백이라는 그 한 단어를 시작으로, 머릿속에 산재해 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아이칼은 바동거리기 시작하는 카티샤를 제 품으로 꾹 누른 채 생각을 이어 붙였다.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 그러나 이미 성체화를 거쳤고, 자신이 모르는 시간대를 지나온…….
그리고 자꾸만 악몽 속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며 눈물을 보이는 카티. 카티샤가 꾸는 건 단순한 꿈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 혹은, 되감긴 과거? 어느 쪽이든.
‘내가 잊어버린 세계.’
그 순간, 굉장한 거부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아이칼의 무표정한 낯에 쩍 균열이 일었다.
잊어버린?
내가?
내가 무언가를 ‘잊을’ 수 있다고?
머릿속 자신이 그를 놀리듯 빙글거렸다.
‘알고 싶으면, 그 탑으로 가.’
‘마검이 잠든 탑.’
‘아니면 영감이 남긴 그걸 열든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칼은 둘 중 더 빠른 방법을 택했다.
그는 카티샤의 목을 덮은 주황색 머리칼을 손으로 가볍게 치워 냈다.
여린 목에 걸린 두 개의 줄이 드러났다. 하나는 중앙은행의 패스가 달린 검은 가죽끈이고, 다른 하나는 가는 금속 줄이었다.
아이칼의 손끝에 반짝이는 금빛 줄이 걸렸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줄 끝에 걸린 것이 천천히 카티샤의 옷깃 속에서 끌려 올라왔다.
이윽고 낡은 로켓이 아이칼의 손안에 떨어졌다.
카티샤가 늘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종종 이것을 열 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칼이 카티샤에 대해 모르고 있는 부분이라곤 오직 이 로켓에 관한 비밀 하나뿐이다.
아이칼은 손톱 끝으로 로켓의 틈을 벌렸다.
딸깍. 조개 모양의 로켓이 활짝 벌어졌다. 눈을 감았다 뜬 극히 짧은 찰나에,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카티샤 역시 간데없었다.
“…….”
대신 낡은 창고의 적막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마법.’
아이칼은 숨 쉬듯 간단하게 공간을 어우르는 마법의 실체를 뜯어보았다. 그의 눈에 이곳은 촘촘한 격자로 얼기설기 엮인 거대한 그물망 속이었다.
씨실에는 힐라이야의 숨결이, 날실에는 귀어스트의 마기가 흘렀다. 그 위를 정제되지 않은 자연의 마나가 수도 없이 뒤덮었다.
허락된 이들 외에는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 출입자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로 보이는 아공간.
아이칼은 이다음에 해야 할 일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둘둘 말린 두루마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백의 교단에서 지령을 내릴 때 주로 사용하는 종이였다.
교단의 규율이 적힌 종이 묶음처럼 생겼다. 아이칼에게 무척 익숙한 형태였다.
아이칼은 망설임 없이 손에 닿는 두루마리 하나를 풀었다.
교단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가득 적혀 있었다. 역시 그에게 익숙한 글자다.
아이칼은 최상단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발음했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
그것은 그가 얽힌 긴 이야기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