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 * *
그 시각, 아르템. 영령의 탑.
[루테, 영령은 말이다. 꿈이라는 걸 꾸지 않는다.]한참을 상념에 잠겨 있던 헤르젠이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루테는 헤르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보고 듣기만 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감각이 없지. 당연히 생리적인 욕구도 없고. 잠을 잘 필요가 없으니 꿈을 꾸지도 않는다.]“……그런데요?”
[그리고 이 영령의 탑은 외부와는 완벽히 차단되어 있지. 시간의 흐름조차도 멈춘 아공간. 안에서 문을 열어 주기 전까지는 밖의 그 어떤 것도 침입할 수 없는 금지된 영역. 그러니 사특한 혼 따위가 침범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누구나 다 아는 사실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헤르젠이 끙 소리를 냈다. 팔짱을 낀 영령이 나선형으로 뱅글뱅글 날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만 누군가 내게 경고를 하는 듯하단 말이지.]“누가, 어떤 경고를 말입니까?”
[누군지는 나야 모르지. 목소리를 정확히 구별할 수가 없거든. 나와 같은 연배인 어느 노인의 음성인 것 같기는 한데…….]그 께름칙한 ‘목소리’는 잔소리가 무척 심했다. 꼭 헤르젠 본인처럼 말이다.
‘탑을 지켜라.’
‘웬 털 달린 미친놈이 하나 들이닥칠지도 모르니까.’
‘평범한 짐승도 아니고 신수니, 생각보다 빠르게 깨달을지도 몰라. 그 전에 내가, 아니, 네가 먼저 기억을 찾아야 하는데. 에잉, 쯧쯔. 신수를 어떻게 이겨?’
‘그놈 도움을 받기는 했다만 아무래도 안심은 안 된단 말이지. 신수의 관심을 독차지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좋은 징조가 아냐…….’
머릿속에 대고 중얼거리는 자의 정체를 알 길은 없으나, 헤르젠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신수, 특히나 설원의 이클라스족과 연을 맺어 평안한 삶을 살았던 인간이 없었다.
신수 이클라스가 잠깐이나마 깊은 정을 맺었던 인간 여인은 지금껏 세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각각 이클라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그의 분노에 휘말려 죽거나, 혹은 자결했다.
이클라스의 후손들인 하프와 쿼터들이야 피가 희석된 만큼 그토록 냉혹하지는 않겠지만, 본질이 같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에는 늘 ‘이유’가 있다. 인간을 미물로 여기는 그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 요인.
카티샤의 어떤 점이 아이칼이라는 신수를 자극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일단은 떼어 두는 것이 맞았다.
[카티가 탑으로 올 때마다 신수와 거리를 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누굴 닮아 말도 참 지지리도 안 듣더구나.]카티샤는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 걸 보면 그 신수만 카티샤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카티샤도 생각 이상으로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루테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헤르젠은 찰나의 위화감을 놓치지 않고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루테 너, 그 눈표범이 신수라는 걸 알고서도 계속 카티와 함께 지내도록 내버려 둔 거냐?]“몰랐습니다. 인간화할 수 있는 줄은.”
루테는 서둘러 그렇게 둘러대곤 속으로 신음했다. 성체화가 다가오면 당연히 떼어 놓을 셈이었지만,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안일했다. 아무리 작은 새끼라도 신수는 신수인데.
그의 곤혹스러움까지 읽어 낸 헤르젠이 냅다 불호령을 내렸다.
[이 생각 없는 것아! 너 또 귀염상으로 생겼다고 간도 쓸개도 다 빼 준 게지!]“그건 아닙니다. 그냥, 아이가 워낙 끌어안고 다니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요놈 새끼를 그냥!]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꿀밤이 날아왔다.
루테는 슬쩍 고개를 비틀어 꿀밤을 피한 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수도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최근에 그 아이가 하마터면 폭주할 뻔한 적이 있어서…….”
수도에 카티샤와 그 신수를 그대로 두고 왔다. 금제구를 채워 두었다고는 해도 성체화가 임박하면 하등 소용없었다.
카티샤도 걱정하고 있을 터다. 서신을 한 장 보내 놓기는 했지만 무려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아이더러는 아버지 혼자 두지 말라고 기어코 다짐을 받아 내 놓고는, 정작 그는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둔 셈이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빠르게 내려갈 준비를 하는 루테를 향해 헤르젠이 외쳤다.
[돌아오면, 아이칼이라는 그 신수를 정원으로 보내거라.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알겠습니다.”
[……카티샤에게는 뭐라고 말할 셈이고?]이미 이쪽에 등을 보인 루테의 뒷모습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중심을 회복하고 바로 섰다.
헤르젠은 고개만 돌려 이쪽을 일별하는 아들의 표정을 읽었다. 영령의 주름진 얼굴에 일순 놀란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헤르젠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놈 특유의 저런 표정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았다. 거짓말처럼 안도감이 산처럼 높이 쌓였다.
[그래. 알았다, 인석아.]네가 다 옳다, 그래. 결국 달라질 건 없다 이거지?
헤르젠은 루테가 탑을 나서고, 세월의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기척을 느끼며 유쾌하게 껄껄거렸다.
역시 그의 둘째는 풍랑에 흔들려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 저렇게 대책 없이 자신만만한 낯짝이 훨씬 잘 어울렸다.
* * *
“……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카티……. 이제 그만 일어……. 티…….”
“한동안은 괜찮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오러가 불규칙적으로 날뛰는…….”
베르너와 아르닌, 그리고 주치의와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주위가 너무 부산스러워 머리가 띵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직전까지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아, 그래. 로켓이 열렸지. [지.우.마> 171 화가 해금되었고…….
내용을 달달 외울 만큼 읽고 또 읽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만 계속해서 되뇌다가, 시간제한이 다해 로켓 밖으로 튕긴 게 분명했다.
‘……그래서 기절한 건가?’
이번에는 또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나를 걱정하고 있을 이들의 얼굴이 암경 속을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언니와 오빠는 말할 것도 없고, 제미언, 마가렛, 루시스 경, 키스 경, 호미 아저씨…….
그리고 아빠와 할아버지까지. 두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자, 자연스레 171 화의 어느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아이칼의 대사였다.
[“그렇게 가문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여태껏 손녀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말이 되나?”> [“야토르국의 상단이 이 증서와 함께 갓난애를 넘겨받았다더군. 세레이나 아이옐나스에게서.”>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새로이 시작할 셈이로구나.]>내게는 없는 기억들이 얼어붙은 수면 아래서 마구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이건 이상해. 내 전생은 한국에서의 삶이었고, 우연히 줄거리가 엉망으로 꼬인 책 속에서 환생했을 뿐인데.
단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면…….
내게 나는 모르는 또 다른 과거가 있었던 거였다면. 거기까지 조각조각 실마리들을 이어 붙인 순간, 방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두통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
“악…….”
통증이 어찌나 심했던지 안구마저 불타는 듯했다.
나는 숨을 급박하게 들이마시며 눈을 번쩍 떴다.
“하윽, 흐으…….”
“오, 신이시여. 카티샤!”
어디선가 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너인 것 같았다. 아르닌 언니가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왜 그래, 머리 아파? 응?”
하지만 역시 제일 또렷하게 들리는 건 아빠의 목소리였다.
“카티!”
폐부에 산소를 꾸역꾸역 쑤셔 넣자 머릿속 안개가 한 겹 걷혔다. 수십 개의 바늘이 사방에서 뇌를 파고드는 것만 같던 두통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나는 눈을 떠 나를 둘러싼 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
오랜만에 깨어나서인지 사정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심각한 얼굴의 아버지가 내 이마를 짚어 보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당장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출, 어른……!”
“뭐라고?”
아버지가 대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출 어른……. 그래,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카티.”
“흐으…….”
“쉬이, 다 괜찮다. 잠깐 심호흡하자.”
내가 박자에 맞추어 겨우겨우 숨을 마시고 뱉는 사이, 아버지의 손바닥이 내 이마를 덮었다. 내 눈까지 덮어 버릴 만큼 크고 따듯한 손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 온기를 느꼈다.
‘맞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입안이 절로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나는 잠시를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아빠. 나, 말할 게 있는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