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멍하니 사흘 밤낮을 지새웠던 자그마한 묘비가 눈에 선했다. 다음에는 그곳에 카티샤를 데리고 가야겠다. 세레이나도 제 딸을 무척 궁금해할 것이다.
“우리를 반씩 섞으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요?”
‘네가 어떤 상상을 했든 그 이상일 거야.’
카티샤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하긴,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 심지어는 말투까지도 그렇게나 엄마를 닮았는데, 그렇지 않을 리가 없지.
집무실 책상 위에 지난 한 달 동안 카티샤가 올려놓고 간 메모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꼬마 시절보다 제법 정갈해진 필체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내용들이 메모지를 가득 채웠다.
루테는 그것들을 소중하게 그러모아 작은 상자에 담았다.
이건 아껴 봐야겠다. 또다시 감당키 힘든 죄책감이 그를 덮치려 들 때, 언제나 그랬듯 아이가 그를 구원해 줄 것이다.
밝은 생각을 하려 노력하니 마음의 풍랑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지난 한 달을 뒤로하고 루테는 몸을 바르게 폈다. 아직도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아르닌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루테의 옆으로 고개를 쏙 내민 둘째가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아버지, 자리를 비우신 사이 카티가 만들어 놓은 놀이판을 보셔야 할 때네요.”
“……놀이판?”
“막내가 꽤 즐거운 판을 깔아 주었습니다.”
뒤이어 다가온 베르너는 루테의 눈에 희미하게 돋은 핏발과 조금 잠긴 목소리를 점잖게 무시하기로 했다.
“오르겐 후작가를 자근자근 밟아 버릴 초석이 완성되었거든요. 이 방법, 가능성 있어요, 아버지.”
루테는 아르닌이 건넨 서류철을 훑어보았다. 푸른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가,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한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확실히 블라스코의 방식은 아니지만요.”
블라스코는 무조건 전면전을 선호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적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은 뒤,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남김없이 짓밟는 것.
그것이 블라스코 직계들이 지난 십수 년간 오르겐과 황가를 향해 준비해 왔던 계획이었다.
아르닌이 검지를 치켜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직 카티가 어리기도 하고, 그 애는 워낙 이곳저곳에서 많이 타깃이 될 테니까. 앞으로 몇 년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지반부터 무너뜨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흠…….”
“자꾸 저렇게 아픈 건 둘째 치고, 아스트로카 황태자가 카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요.”
며칠 전, 블라스코 저택으로 황태자의 비공식적인 편지가 날아왔다. 카티샤를 황궁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편지는 카티샤의 방으로 배달되지도 못하고 아르닌과 베르너의 검에 의해 가루로 찢겨 나갔다.
루테는 카티샤가 가져왔던 영상석의 내용을 상기했다.
《“너는 공녀의 옆에 붙어 있다가, 적당한 틈을 보아 공녀를 미리 정한 장소로 유인해 와라. 단둘이. 장소는 추후 통보하겠다.”》
카티샤가 황태자를 제치고 아카데미 수석 자리를 꿰찼을 때부터 후작에게는 아이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카티샤가 루테와 세레이나의 친딸이라는 게 밝혀지면 황실과 후작가의 화살은 자연히 카티샤에게 쏠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감히 아이를 건드릴 수조차 없도록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해 놓는 동시에, 후작가의 지반을 망가뜨린 뒤…….
직접 나선다.
루테는 오랜 시간 쌓아 왔던 계획을 일순간에 변경했다.
‘4년.’
카티샤가 성인이 될 때까지 4년이 남았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날도 딱 그만큼이 남았다.
아르닌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후작의 목은 제게 주세요, 아버지.”
“그 늙은이 머리는 내 거다, 아르닌.”
베르너가 못마땅하게 끼어들었다.
아르닌이 쯧 혀를 차며 말을 바꾸었다.
“그럼 황제의 목은 제가 벨게요.”
“아니다, 생각해 보니 황제의 목숨이 더 귀한 것 같아. 네가 후작을 맡아라, 아르닌.”
“뭐야? 한 입으로 두말하기?”
“……그만.”
루테의 나직한 음성에 남매의 공방이 멈췄다.
베르너는 살갗을 찌르는 날카로운 살기에 흠칫했다. 살기를 갈무리하고 있지 않은 것인지, 아버지의 몸 위로 푸르스름한 오러가 스파크처럼 튀고 있었다.
“오르겐 후작, 그리고 황제와 황후. 셋 다 내 차지다.”
유황처럼 뜨거운 열기가 주위를 압도했다.
아르닌이 흠칫하여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공작은 남매가 지난 16여 년 동안 보아 왔던 모습이 아니었다.
‘……루테 블라스코.’
베르너는 섬광처럼 깨달았다. 그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16년 전 루테 블라스코라는 이름이 대륙 전역에서 어떤 위용을 떨쳤는지, 아버지께서 늘 자랑삼아 이야기해 주셨기 때문이다.
“겉으로야 귀족의 의무는 전부 저버리고 방탕하게 나도는 문제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지. 그늘에 숨어서 블라스코의 격을 떨어뜨리려는 잡초들을 쳐내고 있거든. 대륙 어느 나라를 가든, 뒷세계에서 루테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을 거다…….”
패도의 블라스코. 그 상징 같은 남자.
‘정체를 드러내실 셈이구나.’
베르너의 심장이 뻐근한 기대감으로 쿵쿵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무덤 아래, 루티어드 블라스코의 시신과 함께 묻혔던 이름이 세차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시절처럼 다시금 아스트로카를 넘어 이 대륙 전역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서.
* * *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아부지에게 안겨서 훌쩍거리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곁이 허전한 느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움직여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습관 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온기 없는 이불의 촉감만 느껴질 뿐, 복슬복슬한 눈표범의 등이나 보드라운 백색 머리칼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칼…….”
소리 내어 부르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조차 없다.
아이칼이 내 부름에 응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목소리를 어떻게 듣는 건지, 부르기만 하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내 곁으로 왔다.
“어디 갔어……?”
잠결에 투정을 부리며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얘가 어딜 갔……
“어?”
눈이 번쩍 뜨였다. 불길한 위화감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나는 손을 들어 쇄골 밑과 가슴께를 마구 더듬었다. 항상 목에 걸고 있는 납작하고 둥근 중앙은행 패스가 잡혔다. 그것과 함께 당연히 자리해야 할 것이 없었다.
로켓.
내 조개 모양 로켓.
“……!”
잠기운이 한순간에 확 달아났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 높여 외쳤다.
“아키! 어디 있어, 당장 이리 와!”
내가 기다린 대답 대신, 방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표정의 마가렛이 단숨에 침대맡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어디 안 좋으세요?”
“마기, 아이칼 어디 있어?”
“아키는 계속 아가씨 침실에 함께 있었는데…….”
마가렛이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각하께서 돌아오신 직후부터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아요.”
“……미치겠다.”
그제야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 하나둘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를 붙잡고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느라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들이었다.
‘아키를 까먹고 있으면 어떡해!’
급하게 침대 아래로 내려오다 맨발로 무언가를 밟고 말았다.
“악…….”
눈물이 핑 돌 만큼 강렬한 통증이 닥쳤다. 신음하며 아래를 확인한 순간 눈물이 쏙 들어갔다.
활짝 펼쳐진 조개 로켓이 카펫에 뒹굴고 있었다. 나는 방금 저것의 모서리를 밟은 것이다.
‘저게, 왜, 열려 있…….’
나는 황급히 로켓을 주워 들고 닫았다. 굳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지 않아도, 이 상황을 설명할 가능성은 딱 하나뿐이었다. 잠든 사이 나를 건드릴 이가 아이칼 외에 또 있는가?
하지만 아키는 내 목걸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이 낡은 로켓에 별 관심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설마 지난번처럼, 또다시 그 ‘목소리’가 아키를 이끌었나?
세계 멸망 엔딩의 주범이자, 헤르젠 할아버지와 함께 회귀의 열쇠를 나눠 가진 인물.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지금의 아이칼에게 무의식 속 작은 조각으로 남은 ‘그’ 위험천만한 아이칼.
그가 내 조개 로켓을 열었다. 그 안에 봉인된 [지.우.마>를 읽었다.
그렇다면 지금 아키는 내가 아는 쪽과 모르는 쪽 중, 어느 쪽이지?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우.마>의 마지막 장면의 배경을 상기했다.
영령의 탑.
아이칼이 나를 떠나 향했을 곳은 그곳뿐이었다.
마가렛의 손목을 움켜잡은 내 손아귀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도…… 돌아가야 해.”
“아가씨.”
“지금 당장, 아르템으로. 텔레포트석을 써야…….”
수도 펠라임 내에는 특수 마나가 흐르고 있어 텔레포트 마법이 금지되어 있다. 규율을 어기고 텔레포트석을 쓴다 한들 장거리용 이동국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단숨에 아르템으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판단이 서자마자 나는 침실을 뛰쳐나왔다. 내 이상 반응에 저택의 복도와 창문에 연쇄적으로 불이 들어오며 소란이 일었다.
“당장 마차 준비해 줘요. 아르템으로 돌아갈 거니까!”
제발, 사고 치지 말고 내가 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 아키!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저택의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