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전운이 감돌았다.
하늘이 지상에 드리운 암운을 읽은 것인지,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떨어져 내리던 빗줄기의 수가 순식간에 셀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또다시 소낙비였다.
물은 5원소 중에서도 특히나 아이칼과 밀접했다. 조금의 물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그의 영역이고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무대였다.
아이칼에게 물을 얼리는 것은 눈 한 번 깜빡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탑의 외벽을 이루는 돌 틈새로 스며들어 간 빗물이 쩌적 소리를 내며 얼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아이칼의 입꼬리가 미묘한 즐거움을 담고 치켜 올라갔다.
물은 얼면 부피가 팽창한다. 그렇게 틈새로 스며들어 얼어붙은 물은 돌도 깨부순다.
진작 흔들리고 있었던 탑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빠지직, 어디선가 불길한 파열음이 일었다.
탑의 중앙부 위쪽의 어딘가에서 돌 하나가 깨졌다. 쿵 소리와 함께 파편 하나가 떨어지고 나자, 그 뒤로는 우후죽순이었다.
[탑이…… 무너진다.]누군가 참담한 신음을 흘렸다.
영령의 탑은 귀어스트의 봉인진을 안전하게 에워싼 껍데기지만, 그 자체로도 결계의 역할을 수행했다.
영령이란 성스러운 영혼.
본질은 영혼이다.
육신이 없는 혼은 외부에서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쉽게 소멸하거나 타락한다. 탑은 영령들이 존속할 수 있도록 하는 둥지인 동시에,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묶어 두는 우리이기도 했다.
그런 탑이 무너지고 있었다.
32인의 영령들을 한데 묶어 놓고 있던 탑의 힘이 빠르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휑하니 뚫려 버린 외벽으로 손바닥만 한 영령들 몇이 맥없이 튕겨 나왔다.
[어이쿠!] [이게 웬 눈……. 아니, 눈이라고? 지금 밖으로 나온 건가!]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이 훌쩍 넘을 동안 바깥을 구경하지 못했던 영령들이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두두둑.
떨어지던 빗줄기는 지상에 가까이 닿기도 전에 얼었다. 한창 무더운 7월의 날씨를 생각하면 괴이하기까지 한 현상이다.
[요즘 세상엔 여름에도 눈이 오나?] [멍청아, 이클라스의 아들이 저기 있잖아! 파수꾼이 탑의 족쇄를 끊었다!]탑의 외벽이 허물어질수록 점점 더 밖으로 튕겨 나오는 영령의 수가 늘었다.
2대 가주 가이우스를 비롯해 안에 남은 영령들은 절망한 눈으로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그들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하늘……. 하늘을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영령은 냄새를 맡거나 촉감을 느낄 수 없어, 그들에게 닿는 세상의 공기는 아무런 향도 무게도 없었다. 그러나 저 까마득한 하늘은, 탑을 둘러싼 세월의 정원은, 그 너머에 버티고 선 블라스코 대저택은.
솨아아 쏟아지는 빗소리와, 얼음 조각들이 토도독 쏟아지는 소리, 스산한 바람 소리, 수목이 흐느끼듯 사각이는 소리…….
살아 움직이는 세상이 너무도 선명히 눈과 귀로 와 박혔다.
2대 가주, 가이우스가 침음을 삼켰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로…….]초대 가주를 제외한 32인의 영령들은 누구보다 강한 사명감으로 가주위를 이어받은 자들이었다.
단명할 운명을 받아들이고, 가족과 친지를 등진 채 육신을 벗어나 탑에서 순리를 역행해 영령으로 새로이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은 좁은 탑에 갇혀 기약 없는 사명을 이행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심지어는 작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이 무의 공간에서.
그렇기에 영령의 대부분은 지쳐 있었다. 그나마 아직 100년을 채우지 않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들은 사정이 나았지만, 탑에서 보낸 세월이 긴 영령들은 조금씩 마모되어 갔다.
정신력도, 사명감도, 의무감조차도 세월에 풍화하고 나니 남은 것이라곤 그저 타성뿐이었다.
그리고 타성조차도 희미해질 즈음이 되면 그들은 오로지 안식만을 바랐다. 시조에 속하는 영령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때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영령은 정말로 ‘잠’을 잘 수도 없으니 의식을 비우고 길고 긴 명상에 잠기는 것에 불과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며.
그것이 블라스코의 최고의 자부심이라 추켜세워지는 영령의 탑의 실체다. 그러니 사명이고 맹약이고 나발이고, 탑이 무너진 이 순간은 영령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인 것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이율배반적인 감정 사이에서 가이우스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찰나.
탑이 가장 오래 붙들어 매고 있었던 시조들의 영령체가 일시에 밖으로 떠밀렸다. 마침내 모든 가주들이 탑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밖으로 튕겨 나간 가이우스의 눈에, 반파되어 내부 구조를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는 탑이 비쳤다.
엎어 놓은 둥지 형태로 떠 있던 귀어스트의 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이미 돔은 스푼으로 크게 두 입 파먹은 것처럼 패여 있었다.
뻥 뚫린 구멍으로 곧게 꽂힌 마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봉인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퍼뜩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가이우스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전원 집합! 봉인이 깨지지 않도록 막아라!]그 불호령에 멍한 눈으로 세상을 돌아보던 영령들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지금 한가하게 격세지감이나 느끼고 때가 아니었다. 귀어스트와 힐라이야가 충돌하기라도 하면 세계 하나가 가뿐히 사멸한다는 게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다.
공중에서 허우적대던 31명의 영령들이 겨우 몰려와 귀어스트의 봉인진 주위를 빙 둘러쌌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의 동시에, 아이칼의 은푸른빛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찾았다, 마검.”
귀어스트의 방의 표면에는 이미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탑과 같은 방식으로 봉인진을 깨뜨릴 셈이다.
아이칼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 탑의 꼭대기까지 도약한 그가 발길질 한 번으로 돔의 뚜껑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한 번 더 발 디딘 곳을 박찼다.
탓, 가볍고 경쾌하기까지 한 몸놀림으로, 아이칼은 봉인진 안에 착지했다.
“자아, 여기까지는 왔는데-.”
여기까지 온 수고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이제 무언가 떠오를 차례였다.
아이칼은 무심하게 검을 까딱거리며 귀어스트의 봉인진을 훑었다.
여기서 이 봉인을 깨뜨리면 손쓸 수 없이 재앙이 닥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인세에 마귀가 창궐하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마 카티샤는 엄청나게 신경 쓸 것이다.
‘지금쯤이면 눈치채고 따라오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자신도 수습 가능한 선까지만 일을 벌이는 게 좋다.
아이칼은 마검을 건드리는 대신 그 주변에 흐르는 봉인진의 흐름을 검 끝으로 가볍게 후벼 팠다.
어그러진 봉인에서 검은 마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아이칼의 발치에 고였다.
그 마기에 노출된 찰나, 척추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들불처럼 번졌다. 은푸른빛 눈이 커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새카맣게 지워져 있던 기억의 어느 순간에 불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바로 같은 시간 막 아르템의 본가 정문 앞에 도착한 카티샤의 로켓 속 아공간에도 변화가 일었다.
텅 빈 창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기록’이 들썩거렸다. 누군가에게는 타자기와 스크린으로,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고서로, 또 누군가에게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일 그 기록에 새로운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확히 같은 순간 아이칼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
글자 따위가 아니라 오감에 생생하게 새겨진 ‘기억’이었다. 누군가 뭉개 놓은 것처럼 지워진 기억의 공백의 첫 장면은 바로 이곳, 영령의 탑에서 시작했다.
지금보다 시야가 훨씬 높았다. 자신은 헤르젠 블라스코의 영령과 마주 보고 있었다.
아이칼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카티샤의 로켓 속에 잠자고 있던 이야기의 다음 회 차 내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파수꾼이여,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말해.”
[내 손녀를 만난 적이 있는가?]“…….”
[그 아이는 사막으로 건너간 뒤에 2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했지. 그런데 너는 설원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고 했고. 그렇다면 시기도 장소도 안 맞는 셈이 아닌가?]“……확실해. 적어도 죽은 그 애가 블라스코이고, 귀어스트의 주인 될 자격을 타고난 운명이었다는 것쯤은.”
[하지만 너는 그 아이의 얼굴도, 심지어는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었지. 저 서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야.]“내가 본 건…… 됐어.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기엔 기니까. 그래서 결국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신수가 가엾은 영혼 하나 구하고자 자비를 베푸는 족속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해서 그 아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혹시라도 그 아이를 해치고자 함이라면 나는……]“해쳐?”
기억 속의 자신이 코웃음 쳤다.
“내가 그 애를? 어떻게?”
아이칼은 기억 속에서 또다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드넓은 설원에 희미하게 일렁거리던 아주 미약한 오러 한 줄기.
삭풍에 맥없이 날아갔다가 비틀비틀 돌아오곤 하던 그 오러는 맑은 노을색이었다.
기억 속에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당시 느꼈던 감정이 오감을 통해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