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칼날같이 차고 서늘한 분노 아래에 조급함이 시커멓게 고여 있다.
“난 그 애가 형태도 없는 오러 뭉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도, 아무 인간의 껍데기나 주워다 뒤집어쓰고 왔을 때도 건드리지 못했어. 단 한 번도.”
[…….]“해치기는커녕 만져 볼 수라도 있었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짓을 하냐고? 그대가 이미 다 말했어. 내가 그 애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고.”
초조함이 역력히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과거의 자신이 짓씹듯 내뱉었다.
“겨우 이름 하나 알게 된 지금도 난 걔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그게 전부야.”
제가 하고자 하는 바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속에서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확률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 과정만 끝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카티샤 아인슬리라는 이름을 안 직후부터 죽 이 상태였다.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헤르젠 블라스코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그렇군……. 우리는 다를 게 없구나.]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극심한 두통이 의식과 무의식을 뒤덮었다.
눈앞이 점멸한다.
깜빡, 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과거와 현실이 번갈아 나타나더니, 곧 현실에 초점이 맞춰졌다.
헤르젠 블라스코의 영령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이칼은 다시 반파된 영령의 탑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불길하게 울부짖는 해방 직전의 마검을 앞에 둔 채로.
“……아.”
머리 아파…….
익숙하지 않은 두통에 아이칼이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성체화 때문인가……?’
때때로 스스로의 오러를 제어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성체화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지금처럼 온몸의 신경으로, 뼈마디로 직감한 건 처음이다.
‘아직은 안 되는데.’
기억 속에서 느꼈던 초조함이 현실에 고스란히 옮겨붙은 듯했다.
‘아직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남았는데…….’
카티샤와 처음 만났던 날들까지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이칼의 눈이 일렁거리는 봉인진을 빠르게 훑었다. 손으로 검은 마기를 잡아채듯 쥐자 다시 기억에 탁 하고 불이 들어온다.
[좋다. 나도 너와 뜻을 함께하마. 대신 너는 어느 순간에서건 내 손녀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우선시…….]마기에 노출될수록 무의식을 자극해 사라진 기억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봉인진을 좀 더 들쑤셔 놓아야 했다.
마귀가 풀려난다면 지상에는 재앙이나 다름없겠으나.
‘인간들의 일이야 알 바인가?’
그의 어버이나 다름없는 신수 이클라스를 비롯한 고대의 다섯 신수는 신들을 따라 이 세계로 내려온 성스러운 짐승들이었다. 그들의 혈족은 애초부터 이 땅의 존재들이 아니었다.
아이칼은 인간의 영역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러니 이번에도 알 바 없지. 한 번도 쉬웠다면 두 번은 더 쉬우리라.
단숨에 결정을 내린 아이칼이 막 손을 내어 봉인을 완전히 헤집으려는 찰나.
저 아래에서 쨍한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아이칼!”
어찌나 급박하게 달려왔던지, 겨우 이름만 부르곤 헐떡이며 숨을 고른다.
그러나 그 호명만으로도 아이칼은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카티……?”
세상 어디에도 없을 특이한 파장의 오러가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티샤가 왔다.
고로 그의 방종도 여기서 끝이 나야 했다.
무릎을 짚고 헥헥거린 카티샤가 기세 좋게 고개를 홱 꺾었다.
아이칼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제아무리 그라도 찔리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이다.
높이가 꽤 되었으나 아이칼이 그녀의 표정을 알아보기엔 무리가 없었다. 눈썹을 치켜 올리고,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고.
아-?
‘저건 화가 난 표정이 아닌데…….’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티샤가 입가에 동그랗게 손을 모으고서 있는 힘껏 외쳤다.
“너 괜찮은 거지!”
아이칼은 멍하니 카티샤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해야 한다는 본능이 그를 이끌어,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도 그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카티샤가 다시금 외쳤다.
“근데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거든! 이리 내려와!”
“…….”
“네가 안 내려오면 내가 올라간다!”
카티샤는 빈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몸소 증명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탑을 이루고 있었던 파편들을 딛고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발 늦게 카티샤를 뒤쫓아 온 블라스코 직계들이 경악해 외쳤다.
“악, 쟤 좀 봐! 카티, 그러다 떨어져!”
“오빠가 올려다 줄게, 이리…… 카티!”
그러나 근육이라곤 좁쌀만큼 있는 주제에 날래기는 어찌나 날랜지, 카티샤는 이미 제 키만 한 돌덩이들을 딛고 손 닿을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간 뒤였다.
그때, 정원 쪽에서 누군가 살벌하게 외쳤다.
“아이칼, 카티 붙잡아!”
공작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호령에 아이칼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어어엄마야…….”
빙판처럼 미끄럽게 얼어 버린 파편 위에서 카티샤가 오도 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일단 시끄럽게 말리며 뛰어들긴 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은 걸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
저기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기라도 하면 즉사다.
그제야 감각이 돌아온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카티!”
해일처럼 그를 덮치려던 기억이 들고일어난 그대로 얼어붙었다. 로켓 속 아공간에서 무아지경으로 두들겨지던 타자기도 덩달아 멈칫했다.
아이칼은 당장 탑에 서린 얼음을 모두 녹인 뒤, 얼음 줄기를 불러냈다.
카티샤가 반색하며 얼음 줄기로 뛰어들듯이 몸을 맡겼다. 소녀가 반쯤 허물어진 귀어스트의 방에 착지하는 데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잠에서 막 깨어나 달려온 듯, 카티샤는 하얀 잠옷 위에 얇은 카디건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목에 까맣고 둥근 패스와 조개 모양의 로켓 펜던트를 걸고 있다.
작은 어깨가 사방을 에워싼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렸다.
카티샤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겨우 달싹거렸다.
“이, 이 사고뭉치, 정말. 얌전히 있겠다고 나랑 약속했으면서…….”
그제야 아이칼은 주위의 온도가 한겨울처럼 싸늘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급히 제 기운을 거두어들였으나 낮아진 기온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오러를 완벽히 다스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티샤가 폐허 뺨치는 탑 안을 돌아보았다. 마검이 꽂힌 단상이 쩍쩍 갈라져 있는 것을 보곤 허어, 하고 경악했다.
“너, 너, 정말.”
눈앞의 이 광경이 믿어지지 않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카티샤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단상 위로 올라가 단숨에 검자루를 낚아챘다. 소녀의 어깨 위로 은은하게 피어오른 주황색 오러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카티샤는 아랑곳 않고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묵직한 검을 돌돌 말았다. 그리고 끙 소리를 내며 검을 들곤 아이칼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반듯이 눕혀 놓았다.
“얌전히 있어, 귀귀. 아직 일어나면 안 돼.”
검자루를 톡톡 쓰다듬은 카티샤가 다시 돌아섰다.
도로 가까워지는 그녀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세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아이칼은 낮게 신음했다.
‘이번에야말로 혼……나겠다.’
그러나 예상은 이번에도 비껴갔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카티샤가 손을 내어 그의 뺨을 감쌌다.
“나 좀 봐. 괜찮아?”
“…….”
“금제구 없잖아. 또 이상한 목소리 듣고 있는 거 아니지?”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다정한 걱정이 담뿍 배어 있었다.
작은 손이 그의 뺨을 섬세하게 매만졌다. 평소라면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따끈해야 할 그녀의 손바닥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카티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뜨거워?”
그제야 아이칼은 카티샤의 손이 찬 것이 아니라 제가 평소보다 훨씬 뜨겁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망연히 벌어졌다.
“더워…….”
주위의 온도를 족히 10도는 떨어뜨린 장본인인 주제에, 아이칼의 몸은 점차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몸뿐만이 아니라 눈알과 뇌수까지 불길에 휩싸인 것만 같다.
아이칼은 평생 몸에 열이 난다는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 익숙하지 않은 열감에 머리의 한 부분이 고장이 났는지, 이성을 짓밟고 비정상적인 살의가 몰려왔다.
손에 닿는 것, 피부에 느껴지는 것 전부를 얼려 버리고 나면 좀 가라앉을까.
초점이 사라진 은푸른색 눈동자의 동공이 가늘게 좁아진 순간이었다.
카티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와, 아키.”
“…….”
“주인님이 안아 줄게.”
깜빡, 깜빡.
바로 조금 전에 떠올렸던 기억이 눈앞의 소녀의 모습과 겹쳤다.
설원 위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던 노을색 오러,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서 팔을 벌리고 선 주황색 곱슬머리의 작은 소녀. 다시 또 설원, 그리고 또다시 카티샤.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영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르는 구석이 없는 익숙한 소녀. 알지 못했으나 동시에 너무도 잘 아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은푸른빛 눈에 점차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