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소녀가 다정하게 그를 재촉했다.
“아이칼.”
“…….”
“나 기다리고 있는데?”
카티샤는 그가 스스로 발을 떼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아이칼이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서 오러를 갈무리하는 동안, 맑고 영롱한 연녹색 눈을 깜빡이면서.
한참 만에 발이 움직였다. 고작 한 걸음 떼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아이칼은 조그만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있었다.
아.
잡았다.
“……시원해…….”
“나는 뜨거워, 이 말썽쟁이야.”
카티샤가 들릴 듯 말 듯 내쉰 한숨이 귓바퀴를 스쳤다. 소녀가 손을 내어 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탑 부수느라 이렇게 열을 올리는데 안 덥고 배겨?”
“……그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주인님 안 왔으면 또 다 때려 부술 뻔했으면서. 넌 대체, 여기가 내 집이라는 생각은 정말 한 톨도 안 하는…… 아니야, 됐어. 괜찮아. 울지 마.”
순간 욱한 것 같았으나, 카티샤는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아이칼의 어깨 너머로 휘휘 손짓했다.
“쉿, 쉿. 귀귀. 가까이 오지 마. 너는 이따가 내가 따로 놀아 줄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있자. 부탁할게.”
[-.]“저기, 아직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까진 잘 모르겠거든. 그래도 너는 내 말 알아듣잖아. 조용히, 쉬잇. 나중에…….”
카티샤의 잠옷 목깃과 맨살을 눈물로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칼은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이따가 누구랑 뭘? 저거랑 놀지 말라고 내가……”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귀귀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졸지에 양극단의 성질 한가운데 끼인 카티샤가 쩔쩔맸다.
점차 마귀의 형상을 그리는 마기 뭉치를 한 번, 물기에 젖어 섬뜩하게 번들거리는 아이칼의 눈동자를 한 번.
그렇게 양쪽을 번갈아 보고는 포옥 한숨을 내쉰다.
“농담이 아니라, 아이칼. 너 이대로는 못 두겠다. 눈이…….”
“내 눈이 뭐…….”
“눈이 정말 맛이 갔잖아……. 거울로 네 모습 좀 볼래? 완전 엉망인데. 나는 어떻게 알아보나 몰라.”
“너는 알아봐.”
아이칼은 본능적으로 시원한 맨살을 찾아 카티샤의 목에 뺨을 비볐다.
“너는, 이제 내가 알아봐.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무조건…….”
내가 잡았으니까.
……예전에는 못 잡았지만.
카티샤의 어깨 위로 드러난 아이칼의 눈이 어둑하게 잠겼다. 어느새 발치에 웅덩이처럼 고인 마기가 그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있잖아, 나 떠나기 전에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
“뭐?”
“아,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괜찮아…….”
다시 과거의 기억이 현실을 침범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오래된 과거다.
‘첫 만남.’
타닥, 탁…….
여전히 어디선가는 타자기가 마구 눌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카티샤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반신반의하는 얼굴이 되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아닌가……?”
아이칼이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닫혔다가 다시 열릴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깜빡거리며 바뀌었다. 반파된 탑에서, 새하얀 백지 같은 세상으로.
같은 시각, 로켓 속에서 ‘사라진 세계’가 중얼거렸다.
[어라, 이건 번외인데……. 시점이 다른데, 괜찮은가……?>그러나 이미 스크린에는 글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유독 눈발이 굵은 날이었다.>뜬금없이 이어지기 시작한 기억의 어느 한 장면은 백의 교단이 위치한 이렐 반도의 드넓은 설원에서 시작했다.
[절벽 위 그림처럼 솟은 육각기둥 모양의 새하얀 교단을 등지고, 아이칼은 눈 내리는 설원을 무감각하게 응시했다. 아무렇게나 내던졌던 시선은 곧 어느 한 곳에 못 박혔다.빈틈없이 백색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설원에 색을 띤 뭔가가 흔들흔들 일렁거리고 있었다. 노란색…… 아니, 붉은 기가 조금 섞인 주황색이다.
“뭐야, 저건?”
그가 성가신 것을 보듯 미간을 찌푸렸다.
명백한 불순물이었다. 정결한 백색 세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오점. 몸에 밴 습성대로, 그는 눈밭을 밟아 그것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손아귀로 잡아채 소멸시키는 데는 고작 몇 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뒤섞인 기억의 파도 속에서 아이칼은 잠시 갈피를 잃었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마귀가 단숨에 그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아이칼은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가 그 광경을 목도했다.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카티샤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 세게 안았다.
“아, 아키. 아프……”
카티샤가 작게 신음했으나, 그는 이미 오른손으로 새하얀 백사 같은 자태의 검을 횡으로 휘둘러 쥐고 있었다.
그러나 두 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마귀가 허공의 무언가에 쿵 부딪혀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허공에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투명한 얼음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건…….’
다음 순간, 낯선 목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이야-.”
아이칼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일부러 커다란 감탄사를 흘린 난입객이 기울어진 탑 외벽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체격이 좋고 수더분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사내가 빙글거리며 탑 내부를 내려다보았다.
“화려하게도 저질러 놓으셨구먼. 역시 어려졌다곤 해도 성질머리는 어디 안 가나 보지?”
아이칼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그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아, 어려진 게 아니라 그냥 어린 건가, 지금은. 이야, 너 꼬맹이 시절엔 꽤나 사랑스럽게 생겼구나, 아이칼.”
아이칼이 멈칫한 이유는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낯선 이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오러 탓이다.
몸에 익은 한기, 그가 잘 아는 겨울의 냄새, 눈보라 치는 설산의 아늑함.
사내가 여유롭게 한 손을 치켜들었다.
“어쨌든 오랜만…… 아, 이렇게 말하면 지금의 너는 못 알아듣겠군.”
“…….”
“간만이다, 아우야.”
아우야?
신수에게는 사실상 혈연이 가지는 의미가 거의 없다. 무리 지어 살지 않는 종족의 특성상 부모 자식 간의 정이나 형제간의 우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아이칼은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동생’의 의미를 한참 뒤에나 깨달았다.
동족이구나.
고대부터 대륙의 암흑기를 지나 지금까지 이 땅에 머무르는 순혈 신수는 다섯이다. 그중 북쪽의 설원을 관장하는 신수 이클라스는 다른 네 신수에 비해 씨를 많이 퍼뜨리지 않는 편이었다.
이클라스를 제외하고, 500여 년간 대륙에 알려진 하프, 즉 이클라스와 인간의 혼혈은 딱 셋이었다. 그중 첫째가 아이칼 이전 대의 백의 교단의 파수꾼이다 – 그는 50∼60여 년 전에 수명이 다해 생을 마감했다 – .
아이칼은 셋째다. 그러니 소거법에 의하면 갑자기 나타난 저 사내의 정체를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둘째다.
사내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린 동생이 내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여 친히 이름을 알려 주자면……”
“안 궁금해.”
아이칼이 딱 잘라 거절하는데, 그의 품 안에서 카티샤가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아키, 이것 좀 놔 봐. 나 숨 막혀.”
“어이쿠야. 그러고 보니 꼬마 숙녀님도 오랜만이군.”
카티샤가 손바닥으로 아이칼의 가슴팍을 열심히 밀어내는 사이, 사내는 봉인진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린 인간을 이렇게 부서져라 안고 있으면 쓰나, 동생. 아가씰 인간 셔벗으로 만들어 버릴 셈이 아니라면 놓지?”
“……!”
사내가 우악스러운 힘으로 아이칼의 팔뚝을 움켜쥐고, 그와 카티샤를 억지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의 손이 닿은 순간 아이칼이 낮게 그르렁대며 이를 드러냈지만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카티샤를 향해 시원스럽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백만골드오렌지 양, 우린 구면이지?”
“……아!”
카티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때 그, 경매장에서, 그 거부……!”
그 남자였다. 5년 전, 카티샤가 아이칼을 경매장에서 낙찰받을 때 마지막까지 그녀와 피 튀기는 경쟁을 벌였던 상대.
그때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다 했더니 바로 그자였던 것이다.
사내가 짓궂게 씩 웃었다.
“내가 전 재산 1200골드를 다 털어 저놈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꼬마 숙녀님이 통 크게 2000골드를 불렀지, 아마?”
“……?”
카티샤의 얼굴에 의문이 잠깐 스쳤으나,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하곤 표정이 어벙해졌다.
“……그럼 내 800골드는…….”
“이스마라고 하네. 저놈과 같은 이클라스족의 하프지. 다시 만나서 반가워, 오렌지 양.”
“1201골드만 했어도 됐을 것을…….”
“으음?”
“……카티샤 블라스코라고 합니다…….”
카티샤가 우울하게 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이스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껄껄 웃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아이칼의 어깻죽지를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 그래. 그간 이놈 건사하느라 고생 많았지?”
“아니요, 그렇게 고생이라고 할 정도는…….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가씨 아버지가 불러서 왔지, 뭐.”
“아, 아버지가요?”
“그래. 그때도 블미코인지 블리코인지, 어쩐지 입에 익은 발음이다 했더니만. 루테 놈 성이 블라스코였지 뭐야!”
이스마가 그렇게 말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제야 카티샤도 퍼뜩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이칼이 하마터면 니엘라를 죽이고 블라스코 타운 하우스를 통째로 냉동 캔으로 만들어 버릴 뻔했던 다음 날, 공작이 그를 맡길 만한 이클라스족의 하프 성체를 수소문하고 있다던 말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