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카티샤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어, 그러면, 저희 아빠를 아세요?”
“그럼, 루테가 꼬맹이일 때 만난 적이 있지. 열대여섯 살이었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내가 부리는 눈 요정을 따라서 내 동굴 앞까지 기어들어 왔거든. 인간이 내게 뭘 바라고 왔다 싶어서 떠봤더니 그냥 궁금해서 왔다잖아.”
“아아…….”
“내 집을 구경하고, 영상석으로 나랑 기념사진 한 방 찍고 훌쩍 돌아가 버렸지. 훌륭한 오지 탐험가의 기질이 보이던 놈이라 기억에 남았는데, 설마 오렌지 양 아버지일 줄은! 아니, 그 전에 그 무식할 정도로 용감무쌍하던 소년이 아버지가 됐을 줄은! ……어휴, 뜨거워라.”
이스마는 상당한 수다쟁이인 것이 틀림없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마디마디 너털웃음을 섞어 가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그가 돌연 인상을 썼다.
그가 여즉 잡고 있는 아이칼의 어깨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쯧쯔, 조금만 늦었으면 나조차도 감당 못 할 뻔했군.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이스마의 투덜거림은 보는 이에겐 엄살로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아이칼을 붙잡은 순간부터 발치에 커다란 육각형 모양의 얼음 조각들이 쩌적쩌적 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칼의 발에서부터 시작해 종아리, 허벅지, 허리를 감싸고 팔까지 타고 올라간 얼음은 훌륭한 족쇄 역할을 했다.
동시에 탑에 가 있던 균열 위로 얇지만 단단한 살얼음이 얼었다. 탑의 진동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마구 흔들리던 귀어스트의 봉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이거…….”
멍하니 내부를 둘러본 카티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재생…….”
무너지는 탑을 임시로 고정해 놓은 투명한 얼음 밑으로, 새하얀 증기 같은 것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속성이 혹독한 겨울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힐라이야께 받은 힘은 틀림없이 재생과 치유의 권능이란 말이지.”
이스마는 등장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여유로웠다. 그가 손을 까딱거릴 때마다 균열 틈새가 하얗게 메꿔졌다.
이스마가 아이칼을 흘끗 돌아보았다.
꼼짝없이 속박된 소년이 이쪽을 시퍼렇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반항적이고 불안정한 눈빛에 이스마가 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권능을 파괴하는 데 쓰면 몸에 무리가 간다-, 이 말씀이야. 새겨들어라, 아우야. 신수가 타락하면 아주 처치 곤란한 마물이 된다고. 특히 지금 너처럼 성체화 기간에는 암만 하프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그러다가 골로 가는 거야, 인마. 날 찾아낸 루테와 시기적절하게 와 준 이 이스마 님께 감사해라. 그리고 오렌지 양?”
멀거니 신수들의 공방을 지켜보던 카티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스마가 카티샤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아빠한테 돌아가야지. 네 아버지 저렇게 밑에 혼자 두다간 울겠다.”
“……! 맞다, 아빠……!”
“미끄럼틀 만들어 놓았으니 타고 내려가시지요, 레이디. 이놈은 내가 잘 달래서 진정시켜 놓을 테니 걱정 마시고.”
카티샤가 불안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이칼이 잠긴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지 마, 카티.”
“…….”
“나 여기 두고 가지 마…….”
소년의 낯빛은 머리카락 색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창백했다.
하얗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동공이 미묘하게 확장된 은푸른빛 눈동자에 밑에 투명한 물기가 고였다.
“잘못했어.”
“……아키.”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
“혼자 두고 안 갈게. 이제 만질 수도 있는데…….”
앞뒤 맥락 없이 간절한 애원이었다. 카티샤의 얼굴이 덩달아 흐려졌다. 그녀가 몹시도 애달프게 중얼거렸다.
“얘가 이젠 헛소리도 하고…….”
“……헛소리라니.”
말이 심하잖아…….
난데없이 심각해진 카티샤를 보자 아이칼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말주변도 없고, 말을 길게 늘이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카티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릴 것 같아서, 아이칼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카티, 나는……”
“말하지 마. 생각하지 마. 너 지금 약간 제정신 아니어 보이니까.”
그리고 곧바로 가로막혔다.
그를 당장이라도 뻥 터질 시한폭탄 보듯 한 카티샤가 이스마에게 물었다.
“아키는 제가 있어야 착하게 굴 텐데, 가도 괜찮을까요?”
“안 돼 안 돼. 그러다 이놈 손에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스마는 이제 조금 귀찮아진 표정이었다. 카티샤가 성가시다기보다는, 카티샤가 이곳에 남아 있음으로써 닥칠 상황들을 예상하고 지레 질린 듯했다.
“아가씨는 털끝 하나 다치면 안 돼. 난 이 망나니 아우와 500년 만에 풀려난 마귀를 동시에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단 말이지…….”
이스마가 설레설레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카티샤의 발밑에 순식간에 판판한 얼음덩어리가 생겨나더니, 위로 붕 솟아올랐다.
“어어……!”
“자아, 안전 운행으로 모시겠습니다.”
카티샤를 태운 얼음판이 허공을 매끄럽게 날았다.
“으악!”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오렌지색 머리칼이 점차 멀어졌다. 미처 손쓸 틈도 없었다.
우아아아……. 카티샤의 탄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마저 메아리가 되어 사라진 뒤.
마침내 탑에는 아슬아슬하게 봉인진에 갇힌 마귀와 두 명의 이클라스 하프들만이 남았다.
칼날 같은 침묵이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이칼은 카티샤가 떠난 직후부터 고개를 밑으로 떨군 채 미동도 없이 멈추어 있었다.
이스마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어린 동족의 면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무언가 바뀐 점을 찾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참, 그 경매장에서 네놈을 내가 낙찰받았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러면 이렇게 귀찮은 짓까진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을 다 맺기 전에, 이스마는 소년의 반쯤 내리깐 눈꺼풀 속에서 찾던 것을 발견했다.
또렷한 초점. 제가 누구고, 이곳이 어디이며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인지 명확히 이해한 눈이다.
그는 가죽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소년을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실없어 보일 만큼 헤프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자. 내숭은 그만 떨고, 아이칼. 눈을 떴으면 이 형님께 제대로 인사나 해라.”
“……적응할 시간은 주지 그래.”
한참 만에 소년이 느릿느릿 대꾸했다.
나머지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니 그 뒤로는 거침없다. 카티샤의 로켓 속에서 글자로만 보았던 이야기가 그가 몸으로 겪었던 실제 과거가 되어 머릿속에서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렸을 게 분명할 만큼 방대한 기억이었다.
그 와중에 여전히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온몸은 낯선 열기로 들들 끓었다. 고통스러운 성체화 과정의 일부였다.
그러나 아이칼이 이미 한 번 겪었었던 증상이다. 지금은 ‘사라진 세계’에서, 즉 시간이 돌아가기 전에.
한동안 묵묵히 눈을 감고 있던 아이칼이 낮게 뇌까렸다.
“……성체화를 두 번 겪는 신수는 세상천지 나뿐이겠어.”
세계와 함께 사멸했던 기억의 조각이 돌아왔다. 공백은 깨끗하게 메꾸어졌다. 그는 마침내 바라던 대로 다시금 완전해졌다.
그러나 성체화는 두 번째라고 해서 익숙해지는 과정이 아니었다. 호흡이 뚝뚝 끊기는 아이칼을 보는 이스마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그건 좀 불쌍하긴 하군. 그 뭣 같은 과정을 살면서 두 번이나 겪어야 한다니.”
성체화를 겪는 동안, 이지를 잃는 신수는 한낱 짐승과 다름없어진다.
온몸의 혈관 안팎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오러의 급격한 변화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온몸의 핏줄이 꼬이고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주체하지 못해 포악하게 날뛰는 괴수. 그 기간을 지나는 동안에는 제정신으로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그만큼 빌어먹게 아팠다.
“첫 번째엔 몇 년 걸렸냐?”
“……3년. 그리고 완벽히 적응하는 데 1년이었나.”
“나보단 낫네. 난 꼬박 10년이었다.”
“빌어먹을, 왜 하필 지금이야.”
성체화 시기의 신수는 인간뿐 아니라 그 어떤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은 공간을 공유할 수 없었다. 카티샤의 언니라는 인간이 입에 달고 사는 욕설이 고스란히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스마가 대번 인상을 구겼다.
“성스러운 짐승 체면을 생각해라, 짜식아.”
“꺼져.”
“어쭈, 기껏 도와주러 온 형님께 건방지다?”
그들은 틀림없이 구면이었다. 정확히는 ‘사라진 세계’에서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초조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온 정신력을 박박 끌어모은 아이칼이 고개를 들었다.
“……네 기억에는 공백이 없었나, 이스마?”
“나? 내가 왜?”
“시간이 돌아갔잖아.”
이스마가 코웃음을 쳤다.
“너야 ‘사멸의 마지막 순간에 섰던 자’였으니 마귀에게 기억을 훼손당했겠지만, 아무 상관없는 내가 왜? 뭐, 쿼터들은 휘말렸을 수 있겠지만, 나와 이클라스는 논외지. 물론 다른 종족들도.”
“…….”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네가 아버지껜 일언반구도 없이 그 성검을 통해 힐라이야께 청탁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셨다. 오죽하셨으면 내게 ‘그 망나니를 네가 잡아다 교육해라’라고 명령하셨겠어?”
물론 중간에 오렌지 아가씨에게 선수를 가로채이는 바람에 기쁘게도 수고를 던 셈이다.
애초에 이클라스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그도 굳이 아이칼을 떠맡진 않았을 것이다. 신수는 독립적인 생활을 즐기는 짐승이고, 이스마 역시 귀찮게 누군가와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아이칼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자는 나나 너에게 관심이 없잖아.”
“하지만 이클라스는 힐라이야께 충성을 다하지. 너도 기억이 돌아왔으니 알 거 아냐? 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 너 이제 큰일났어. 제대로 찍혔다고.”
머리가 쑤셨다.
아이칼은 꾹 눌린 신음을 내며 펄펄 끓는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마귀가 오랜 봉인에서 풀려나자, 그 기운에 자극을 받아 성검 속에 잠들어 있던 여신 힐라이야의 조각이 눈을 떴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여신 힐라이야가 늘 마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신수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그 조각을 통해 신들이 머무는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겼다. 그 통로로 여신의 음성이 흘러내려 왔었다.
“선택하라, 이클라스의 아들이여. 지금이라도 멈추고 신수로서의 권위를 지킬 것인지. 혹은 세계를 파괴하고 시간 선을 어지럽히는 대가로 너에게 깃든 나의 권능을 회수당할지.”
이어진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신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묵인했다. 의미심장한 예언을 하나 남긴 채.
“하나를 구하고자 억천만의 피조물을 버리는구나.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그 순간부터 세계의 시공이 파멸로 접어들기까지 정확히 172일이었다.
그리고 173일째 되는 날부터는, 무너진 세계의 일부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그 긴 파괴와 재생의 시간 동안 헤르젠 블라스코와 아이칼의 기억 역시 온전하지 못하게 부서졌다. 시간이 돌아간 채 세계의 재생이 끝난 순간, 그 직후의 하루 정도는 기억이 남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이 깨끗이 사라졌다. ‘낯선 목소리’만 무의식에 남긴 채로, 아이칼은 백의 교단에서 눈을 떴다.
그렇게 15년이 흘러 지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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