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
14화
* * *
내가 하고 싶은 건 바로 쇼핑이었다.
그래, 명색이 블라스코의 상속녀라면 이쯤에서 쇼핑 한 번은 해 줘야지!
그간 살길을 고민하느라 쓰지 못했던 블랙 카드 찬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때였다.
“자, 아기씨!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내가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자, 왜인지 더 신이 난 마가렛이 기운차게 앞장섰다.
“윌리밀리 아저씨의 장난감 가게? 아르템의 명물 마샬 파티세리 본점? 마담 팡티르의 의상실? 어디든 말만 하셔요!”
마샬 파티세리가 미친 듯이 끌리기는 했다. 달콤한 디저트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걸!
‘아, 안 돼. 자중하자.’
내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내 시중엔 50골드의 현금이 있었고, 골드는 일반 시중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는 높은 가치의 화폐였지만. 게다가 이 블랙 카드의 한도는 그야말로 무제한이긴 하지만…….
‘원래 돈 쓸 줄 모르는 사람한테 카드를 쥐여 주면 더 못 쓰는 법.’
왜냐하면 엄청나게 신중해지기 때문이다.
고급 디저트 열 개 먹을 수 있는 돈이면 이왕이면 든든한 고기를 사 먹는 게 더 좋고, 고기를 한 번 사 먹을 돈이면 짜장면이 또 몇 그릇이고, 그러면 결국 그 돈이 며칠 끼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돈인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끝도 없다. 그러니 사치 부릴 돈은 일단 넣어 두고, 당장 필요한 것부터 장만하는 게 속 편했다.
“약재상을 가고 싶으시다고요?”
“네, 마가렛. 아르템에서 제일 큰 약재상이요!”
“그런 곳을 뭐 하러……. 어디가 안 좋으세요, 아기씨? 그런 거라면 저택에 주치의가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앗, 제가 아픈 건 아니고요……. 실은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을 때 소일거리로 약초 배합을 배웠거든요.”
나는 할아버지네 집에서 얹혀살며 꽤 많은 잡기를 익혔다. 청소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 말고 진짜 고급 기술 말이다.
“나중에 이 할애비 없이도 제 몫 챙기며 살 수 있을 만큼은 배워 놔야지. 그러니까 투덜거리지 마라, 카티. 숙제 다 안 하면 오늘 저녁은 드레싱 없는 샐러드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 틀림없다. 새삼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나는 할아버지의 블랙 카드를 쥐고, 비장한 마음으로 약초 가게의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릴리번트 약재상입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약재상 주인이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꼬마 아가씨. 심부름 왔나 보네요. 뭘 드릴까요?”
하, 어떡해! 너무 떨려.
나는 달달 떨리는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2층 높이로 쌓인 약재 칸의 오른쪽 상단부터 왼쪽 하단까지, 대각선으로 쭉 내리그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주세요!”
꺄악, 나 이 대사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어!
* * *
루티어드는 오늘도 여지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블라스코의 굵직한 사업 실적들을 분기 정산할 시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최근에는 속 터지는 상속 문제까지 겹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방계 쪽에 소집령은 다 내렸나?”
“예, 각하. 오늘부로 모두 참석하겠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아…….”
“정신 차려, 딸기.”
“딸기 아니라니까요. 머리카락 색 가지고 놀리는 거 아주 유치한 행동입니다…….”
시들시들 시들어 가는 건 직속 세무사인 제미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제미언의 직책은 엄밀히 따지자면 세무사지만, 거의 공작의 전담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연봉…… 연봉 올려 주세요, 각하. 이 정도면 두 배는 더 받아야만이…….”
“너 돈 많잖아. 선대께 뒷돈 받아먹은 거 다 안다.”
“헉.”
책상에 엎어져 있던 제미언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렌지한테 용돈 줬잖아.”
“헉.”
제미언이 재빠르게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전 무죄입니다! 선대께서 무려 반년 전에 직접 연락을 주셨는데 제가 무슨 수로 거절하겠어요! 그리고 엄청 조금 드렸어요. 겨우 50골드요!”
“그래서 내가 지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고 있지 않나? 바로 앉아.”
웬일이지? 제미언은 슬금슬금 공작의 눈치를 보며 팔을 내렸다.
최근 불거진 선대 공작의 상속 문제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예민하게 굴었던 공작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원흉인 꼬마 상속녀가 저택에 도착한 뒤로는 성질을 부리는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루티어드가 이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오십 골드는 대체 누구 코에 붙이라고 준 거지?”
“선대께서 그리 명령하셨는걸요.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간식값도 못 하겠군. 아버지께서 그리 통이 작은 분이 아니셨는데, 못 뵌 새 성정이 변하셨나.”
“간식값……보다는 좀 더 나가긴 할 겁니다, 각하.”
제미언은 서둘러 변명하면서도 힐끔힐끔 공작의 기색을 살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는 하는데 또 짜증스럽거나 환멸 어린 표정은 아니었다.
‘호오, 그래도 아주 꼴 보기 싫은 건 아니신가 보지?’
하기야, 제미언은 공작이 죽고 못 사는 그의 소중한 ‘아가’들을 떠올리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죽하면 그 반려동물…… 반려 짐승들을 위해 인공 사바나까지 꾸며 뒀겠는가? 블라스코 공작은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치대는 생명체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설마 애완동물처럼 여기시는 건 아니겠지……?’
마가렛 윈스티드의 손을 잡고 줄레줄레 따라다니는 카티샤는 사실 새끼 포메라니안을 좀 닮긴 했다.
시녀들은 물론이고 기사들과도 그새 친해진 모양인지, 엊저녁에는 키스 경이 목말을 태워 침실로 데려다주더라.
이미 저택 내에는 새로 들어온 꼬마 상속녀를 모르는 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아이를 보고는 하는 말도 하나같이 똑같았다.
“너무 귀여워! 어쩜!”
“정말 오렌지같이 생겼어……!”
“목소리도 너무 귀여워. 블라스코에 아이라니. 이게 얼마 만이야!”
그렇잖아도 귀엽게 생긴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와 나름대로 열심히 말을 붙이는데, 그 조잘거림에 넘어가지 않을 어른이 있겠는가?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는 시도가 기특해서라도 귀여워해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참된 어른의 미덕이다.
‘흑, 나도 아기씨 보러 가고 싶어.’
딴청을 부리는 제미언을 일별한 루티어드가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딴생각하지 말고 집중해, 젬. 1브론즈라도 계산이 틀리면 연봉 삭감한다.”
“예에, 지금 하고 있습니다아.”
제미언은 다시 업무에 찌든 표정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숫자, 숫자 지옥이다…….
반면 오늘의 마지막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은 루티어드는 잠깐의 휴식 시간을 얻었다.
뭉친 목을 주무르며 무심코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는 저택의 정문으로 두 대의 마차가 줄지어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저게 뭐야?”
저택에서 우르르 달려 나간 하인들이 마차에 실린 것들을 내렸다. 곧 노끈으로 질끈 묶은 흰 꾸러미들이 저택 입구에 가득 쌓였다.
‘약재……?’
약재를 저렇게나 많이 주문했던가? 며칠간 결재한 서류 목록을 더듬어 보았지만 저만큼 대량으로 약초를 들여온 기억이 없었다.
그의 의문은 곧 풀렸다. 마차에서 내린 꾸러미 위에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미언이 짝 손뼉을 쳤다.
“약초 배합을 하시려나 보네요, 아기씨! 그러고 보니 선대께서 약초학에도 해박하셨죠?”
헤르젠이 블라스코를 이끌던 시절, 그는 아르템 북서쪽에 거대한 약초밭을 가지고 있었다. 약초 재배는 선대의 유일하다시피 한 취미였다.
덕분에 블라스코의 의원들은 그때그때 필요한 약초들을 밭에서 뜯어다 적재적소에 빠르게 사용할 수 있었다. 기사들과 문하생들의 부상이 잦은 가문 특성상 헤르젠의 약초밭은 무척이나 유용하게 쓰였다.
의원들뿐 아니라 헤르젠 본인도 약초 배합에 능숙해, 어릴 적 루티어드의 서랍에는 헤르젠이 손수 만든 비상 약재들이 늘 빼곡히 차 있었다. 그리운 나날 중 하나다.
물론 지금 그 땅은 전혀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헤르젠이 떠나고, 더는 약초밭을 관리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그 땅에는 인공적인 열대 초원이 들어서 있다.
‘……그냥 둘 걸 그랬나?’
그 밭을 그냥 두었으면 아이가 가서 손장난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아버지가 그랬듯 생활 약재 정도는 뚝딱뚝딱 만들어 낼지도 몰랐다.
루티어드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다, 문득 흠칫했다.
“아니, 별.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예?”
“내가 미쳤나? 아무것도 아니야.”
작게 진저리까지 치는 그를 제미언이 의아하게 힐끔거렸다.
루티어드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그사이 마차에서는 마지막 꾸러미까지 전부 내렸다.
카티샤는 곧 꾸러미와 함께 하인들에게 안겨 달랑달랑 저택 안으로 옮겨졌다. 한 뼘만큼 열린 창문 사이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아기씨.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네에, 안녕히 가세요!”
슬쩍 내다보니 아이가 손을 배꼽에 얹고 허리를 꾸벅 구부리고 있었다.
‘인사성 하나는 정말이지 끝내주는군.’
그나저나 저 약재들은 대체 다 어디에 쓰려고……?
그 전에, 저 정도면 거의 약초방을 통째로 털어 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개중에는 아마 쉽게 구하기 힘든 고급 재료들도 다수 섞여 있을 터.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서?
공작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제미언을 돌아보았다.
“젬, 바른대로 말해. 너 대체 쟤한테 용돈을 얼마나 준 거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