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 * *
니엘라는 아이칼이 어디선가 주워 제 앞에 떨어뜨린 깃펜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아.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던 영혼들이 전부 이곳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쳐야 할 테니까.”
그러니 네가 보고 겪은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적을 시간은 충분하겠지, 그 뜻이었다.
헤르젠 블라스코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블라스코, 오르겐, 그리고 신수와 백의 교단까지. 그 모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건 너뿐이구나.]툭, 깃펜에 이어 니엘라의 앞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조개 모양의 로켓이었다. 다물린 조개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기록물의 제목은.”
아이칼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는 이쪽을 응시하고 있되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머나먼 과거를 되짚는 얼굴이다.
그는 무엇도 쉽게 잊지 않으니, 아마 저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을 테지.
이런 상황에서도 니엘라는 그가 잠겨 있을 순간이 궁금했다. 애정이든 애증이든 그저 증오일 뿐이든, 저 남자의 감정 한 터럭이라도 독차지한 상대가 부러웠다.
아이칼은 그답지 않게도 한동안 고민했다.
이윽고 그의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언젠가 우리…… 아니지. 이제 언젠가가 아니니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조개 모양의 로켓이 활짝 벌어졌다.
입속으로 어떤 말을 중얼거리던 아이칼이 흘끗 이쪽을 보았다.
“시작해, 바로.”
“……!”
안쪽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붉은 빛이 니엘라의 몸을 집어삼켰다.
눈을 딱 한 번 깜빡인 사이, 눈앞의 남자도, 자그마한 영령도, 탑 안의 어지러운 정경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니엘라는 텅 빈 낡은 창고 안에 있었다.
‘시작하라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니엘라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펜은 움켜쥐고 왔지만, 그 어디에도 글자를 쓸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펜촉을 벽에 가져다 대었다. 아공간의 벽면에 글자가 수놓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
그다음에 이어진 아이칼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니엘라는 제가 적은 글자들이 공간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차원의 틈새에 낀 글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에선가,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을까?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거지.’
니엘라의 펜 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고 또 썼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는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에는 제약이 걸려 있어, 때때로 그녀는 로켓 밖으로 내팽개쳐져 다시 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세계의 일부가 무너지는 중에도 시공을 비껴가는 영령의 탑만은 굳건히 서 있었다.
처음 몇 번은 아이칼이 그곳에 있었다. 반파된 폐허 위에 걸터앉아, 제가 파멸로 이끈 세계를 건조한 시선으로 관조하며.
그는 가끔은 기대감과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때는 공허해 보였고, 또 어느 날은 울 것처럼 얼굴을 무참히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칼도, 영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회귀하는 시간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일 테다.
그래도 니엘라는 계속해서 아공간으로 들어가 글자를 썼다. 그녀의 기억을 전부 다 털어 넣었다.
168번째 날부터는 조금 난항을 겪었다. 세계가 본격적으로 되감기기 시작하며 니엘라의 기억에도 점차 공백이 생기기 시작한 탓이었다.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공간 자체의 힘도 크게 줄어들었다. 한 번 튕겨 나오면 다시 들어갈 때까지 꽤 오래 걸려, 시간 계산에도 신경 써야 했다.
슬슬 자신 역시 되감기는 시간 선에 빨려 들어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어.
글자가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가 문장을 이루었으며 문장은 곧 문단이, 하나의 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그리고 마침내는 인격을 갖춘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벽면에 니엘라가 쓰지 않은 글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생했다, ‘전달자’여. 이제 너 또한 역행하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돌아가게 되리라.>그로써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 172일에 걸쳐 완성된, 사멸해 버린 세계의 기록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본다.
이걸로 이제 안녕. 내가 살았던, 거짓과 탐욕, 허상 위에 쌓인 어긋난 세계.
끝.
* * *
그리고 마지막 인간마저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 그 직후, 그녀에 의해 완성된 인격, ‘사라진 세계’가 완전히 눈을 떴다.
* * *
[이걸로 이제 안녕.내가 살았던 거짓과 탐욕, 허상 위에 쌓인 어긋난 세계.>
나는 [지.우.마>의 마지막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더 넘기지 않아도 이것으로 완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니엘라의 손에 의해 이야기의 형태로 기록된 세계이니, 그녀의 기억이 말소된 순간 이후로부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당연할 터.
또한 니엘라가 듣거나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마음이 비바람 몰아치는 바다처럼 마구 출렁거렸다.
그 순간,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스크린에 빈 백지가 나타나자마자 나는 맥없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사라진 세계 님.”
[음, 아무래도 그렇지? 꼬박 4년 만이니까.>타자기가 저절로 눌리며 스크린에 글자를 띄웠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화면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혹시 지금 말씀하시는 분의 정체가 니엘라의 영혼이라거나……?”
그 소녀는 일종의 ‘전달자’지. 나는 전달자가 남긴 기록에 깃든 ‘사라진 세계’의 조각이고, 이야기 그 자체이다.
어쨌거나 축하해. 드디어 최종화까지 전부 해금했구나.>
사라진 세계로부터 확언을 받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이왕 남긴 기록, 처음부터 끝까지 시원하게 공개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왜 한 화씩 해금하도록 하셔서는, 헷갈리게.”
[말했잖아, 원래 사멸한 세계가 이렇게 존속하는 건 불가능하다고.특히나 이야기가 세계가 사멸하는 순간에 가까워질수록 나를 이곳에 붙잡아두는 힘도 약해진다.
‘해금’은 사라진 세계에 대한 이 기록을 최대한 오래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채택한 방법이야.
헤르젠과 아이칼이 기록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은 분명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만, 넌 누구보다 내게 고마워해야 해.>
“아아…….”
[내가 너 놀라지 말라고 네게 익숙한 포맷으로까지 나타나 줬잖아? 얼마나 배려심 있어. 독자 한 명 한 명의 편의도 다 고려해 주고.>사라진 세계가 내 눈앞에 있었다면 아마 잔뜩 으스대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럼 여기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제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내게 물어봐. 답해 줄 테니.>여기까지 읽었음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가장 시급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저는 어떻게 다시 이 세계로 오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분명, 전생에서 죽어서, 이곳에서 환생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겠지. 너의 영혼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다가 다른 차원에 불시착했을 테니까.하지만 시곗바늘이 되감겼잖아. 너도 다시 이쪽 세계로 ‘끌려온’ 거지. 네 기준으로는 전생으로 ‘돌아온’ 셈이겠어.
영혼이 과거의 자리로 돌아오려면, 네가 환생한 후 얻었던 몸뚱이에서 자연히 떨어져 나와야 했을 거야.>
“아, 그래서 어이없이 대낮에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나는 그만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빙의나 환생이 아니라 전생으로 끌어 당겨진 거였다니.
결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전생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불시착’한 세계라 그렇게 암울하고 퍽퍽한 삶이었나.
[그래도 블라스코의 피가 흘러서인지, 아니면 마귀와 공명하는 ‘자질’을 타고난 ‘운명’ 덕분인지, 혹은 여신과 마귀 사이의 해묵은 애증을 유산처럼 물려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역시 ‘기록’을 접하지 않았나?물론 오로지 네게만 보이는 글이었을 테고. 이곳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억이 떠올랐겠지.>
그랬다. 나는 전생에서 [지금 우리, 마법처럼>이라는 소설을 읽었고, 이곳에서 환생한 지 5년째 되던 해에 전생을 떠올렸다.
[지.우.마>는 애초에 인기 소설도 아니었고, 플랫폼에서도 독자들에게서도 잊힌 연중작에 불과했고……. 그게 오로지 내 눈에만 보이는 소설이었다니, 어쩐지 으스스하다.사라진 세계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스크린에 커서가 깜빡거렸다.
[아마 지금쯤 ‘마지막 순간에 선 자들’의 기억 또한 제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 때문일 거야. 예정에 없던 내용이 추가된 것은.>“예정에 없던 내용이요?”
[그래. 어디 보자. 이건 ‘전달자’가 따로 없는 내용이라, 별 수 없이 내가 직접 정리를 좀 해봤는데……. 음, 신수의 기억은 손을 대기가 좀 껄끄럽단 말이지. 이건 나중에 하고……. 그래, 네 할아버지의 기억부터 시작하면 되겠구나.>헤르젠 할아버지의 기억? 무슨 기억?
내가 무어라 되묻기도 전에, 페이지가 저절로 한 장 넘어가며 화면에 알림 창이 떠올랐다. 이야기가 완결이 난 이 시점에서는 떠오르면 안 되는 알림이었다.
그러나 내가 예/아니오를 고를 새도 없이 저절로 예 버튼이 눌렸다.
이윽고 새로운 페이지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건,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돌아간 헤르젠 할아버지가 막 눈을 떴을 때부터 시작하는 짤막한 이야기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