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 * *
[가끔 이렇게 앓아눕는다고?]“예. 4년 전에 크게 한 번, 바로 며칠 전부터 어제까지. 오늘까지 치면 세 번째입니다.”
차분히 대답하는 루테의 눈 밑에 수심과 피로가 짙었다.
잠이 쏟아진다며 눈을 비비곤 곧바로 축 늘어진 아이가 또다시 자리보전한 지 사흘이 지났다.
카티샤는 열다섯 살치고도 무척이나 작았다. 헤르젠이 아이를 키우면서도 종종 걱정했던 부분이다.
카티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이는 뒤집기도 걸음마도 심지어는 옹알이조차 조금씩 늦었다.
열 살에 블라스코로 오던 때에도 예닐곱 살처럼 보인 데다 지금도 높이 쳐줘야 겨우 열서너 살 될까 말까 해 보인다.
그 때문에 의원에게 데려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헤르젠은 ‘이 아이는 성장이 조금 느릴 뿐 오히려 또래들보다 훨씬 건강하다’는 답만 받아 왔다.
하지만 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 내 새끼가 남들과 어디 한구석이라도 다른 점이 있다면 도무지 걱정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헤르젠은 건강하다 못해 겨울에도 민소매를 입고 검을 들고 뛰쳐나가는 망아지 같은 쌍둥이 아들들을 키워 본 경험밖엔 없었다.
심지어는 베르너와 아르닌도 자라는 속도와 체력만큼은 끝내주던 아이들이라, 헤르젠의 혼란은 극심해져만 갔다.
[……성장이 느린 것도 다른 차원에서 갑자기 끌려온 영향 탓인가……?]루테의 안색은 거의 흙빛이라 해도 좋았다. 그가 거의 죽고 싶은 표정으로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아이의 존재를 제때 알아채지 못해서…….”
[그건 아니래도.]“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해서 본가로 데리고 왔으면, 잘 먹이고 잘 치료하며 키웠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지금 내가 애를 잘못 키웠다, 이 소리더냐?]“아비가 변변찮아서 엄마도 없이 컸는데…….”
저놈이 정말, 듣자 듣자 하니까.
헤르젠은 조금 울컥했다.
[할아비는 있었는데? 네 말은 그러니까 네가 아니라 내가 키워서 우리 꼬마가 아픈 거다, 이거지, 지금?]“꼬아 듣지 마세요. ……아무렴, 리덴이 아무리 평화롭대도 아르템의 본가만큼 부족함 없이 풍요로웠을까…….”
[작게 말해도 다 들리거든! 꼬아 생각하는 게 대체 누군데? 뒤에 이어진 말조차 배배 꼬여 있잖느냐?]물론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지, 루테의 속이 시커멓게 타고 있는 걸 모를 헤르젠이 아니었다.
드높은 자존심의 루테 블라스코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실은 힘에 부쳤다고 토로하는 모습을 지켜본 헤르젠의 심정이 딱 지금의 루테와 비슷했다.
곁을 지켜 주지 못했던 시간의 공백만은 아무리 무한한 사랑을 쏟아부어도 메꿀 수가 없었다.
죄책감도 미안함도 애틋함도 전부 그 공백으로부터 왔다.
[그래도 열 살까지는 내가 최선을 다해 키웠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고, 아니, 오히려 너무 팔팔해서 문제였지. 배우는 것도 빠르고.]“그래서 사과를 백조 모양으로 깎는 법을 가르치셨고요.”
[……날붙이를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는지 파악하려고 그런 거야. 혹시 검에 재능이 있나 해서.]“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잔심부름이나 시키시고…….”
[보통 열 살이면 심부름 정도는 다 하거든!]“그 조그맣던 아이를, 지금도 이렇게 작은데…….”
저건 중증이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리는 게 분명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헤르젠이 창가로 포르르 날아갔다.
열린 창문으로 무려 16년 만에 보는 아르템 본가를 내려다본다.
카티샤가 잠든 지 나흘. 아이칼이라는 이름의 신수가 사바나에 감금되다시피 한 지도 딱 그만큼이 지났다.
그동안 파편으로 가득하던 헤르젠의 기억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부서진 탑과 파멸하는 세계, 그리고 과거로 거슬러 와 새롭게 다시 이어진 시간들. 기억이 온전했던 딱 하룻밤 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까지.
[…….]그러니까 회귀하는 시공의 소용돌이가 거의 멎었을 즈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령의 탑은 사라지고, 그는 수 년 전에 떠나온 육신을 다시금 입고 있었다.
그가 있는 장소도 바뀌었다. 그의 고향이자 뿌리인 아르템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리덴 지방의 아담한 3층집으로.
블라스코의 비극이 터지고, 헤르젠이 아르템을 박차고 나온 그 이듬해의 봄. 446년에서 19년을 거슬러, 427년의 봄으로 돌아온 것이다.
헤르젠은 리덴의 3층집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에 조가비 모양의 로켓을 쥔 채였다. 탑에서 떨어져 나오던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낚아챈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면. 기억이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조금은 움직일 수 있을지도.”
신수가 했던 말대로였다.
머릿속에 서서히 망각의 장막이 덮이는 게 느껴졌으나 아직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깨달은 즉시 그는 집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이왕이면 딱 1년 더 거슬러 갔으면 좋았으련만…….’
되돌아온 현실에서도 차가운 땅에 묻혀 있을 루티어드와 이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결국 여신의 안배는 여기까지였나.
헤르젠은 애써 그 얼굴들을 털어 냈다. 아직 잃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가문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여태껏 손녀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말이 되나?”
“야토르국의 상단이 이 증서와 함께 갓난애를 넘겨받았다더군. 세레이나 아이옐나스에게서.”
그길로 헤르젠은 루테가 세레이나를 피신 보낸 장소를 찾아갔다. 세레이나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던 곳을 기억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하마터면 아슬아슬하게 엇갈릴 뻔했다. 세레이나가 막 아이의 태생을 증명하는 서류와 함께 갓난아이를 야토르국의 상단에 맡기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헤르젠은 어느 오래된 여관방에서 세레이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의 기준으로는 거의 20년 만에 만나는 루테의 약혼녀를 앞에 두고, 그는 또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을 느껴야 했다.
‘여신이시여, 기왕 관용을 베푸는 김에 며칠만이라도, 딱 하루만이라도 더 묵인해 주실 수는 없었습니까?’
헤르젠이 품에 안게 된 건 정말이지, 팔뚝보다 작은 핏덩이였다.
그녀가 이곳에 숨어든 이후로 몰래 돌봐 주었다던 옆방의 늙은 집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는 몰라도, 어미 쪽은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렵겠다며.
출산 직후 기사들을 피해 도망치며 입었다던 복부의 열상이 위중했다.
그렇다고 세레이나를 그곳에 홀로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덴으로 가자, 아가. 루테에게는 내가 따로 연락을 취해서……”
“안 돼요, 아버님.”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려는 헤르젠을 세레이나가 막았다. 몇 주간 이 근방을 맴돌며 추적을 피하느라 병색이 완연해진 낯이었다.
“그들이…… 황실 기사들이 알았어요. 제게 아이가 있다는 걸요. 연락책도 그들이 모두 막았고요. 아직도 이 주변을 뒤지고 있을 거예요.”
“세니, 하지만……”
“그들은, 특히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루테의 흔적이라면 가리지 않고 없앨 기세예요. 그리고 이 아이는, 그를 많이 닮아서…….”
“얘야, 아무리 그래도……”
“어쩌면 자랄수록 저를 닮을지도 모르고요. 주황색 머리카락은 야토르에서는 흔한 색이니까. 눈동자 색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비단 황실이 아니더라도…….”
세레이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초췌한 입술이 몇 번이나 질끈 깨물렸다 다시 벌어지기를 반복한 끝에, 그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세상에 일찍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버님. 하루 전에 꿈을, 꿨는데…… 너무, 차가웠어요. 너무 추웠어요.”
“……추웠다고?”
“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불길해요. 마주쳐서는 안 될 것과 맞닥뜨린 것처럼,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를 안고 달아나는 꿈을 꿨어요.”
“…….”
“그런데 한참 달리다 보니까 아기가 제 품에 없었어요. 데려간 거예요, 저를 쫓던 그 뭔가가…….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온 세상이 마기로 뒤덮여 있었어요.”
세레이나의 숨이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가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애는 당분간 세상의 눈으로부터 숨겨야 해요. 루테에게 알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아기 먼저 데려가세요.”
“그럼 너는 어쩌려고 그러느냐? 루테가 언제 올 줄 알고!”
“그 사람 눈앞에서 죽고 싶지는 않아요.”
세레이나의 고집도 대단했다. 아마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직감한 탓이었으리라.
헤르젠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머리가 핑글 돌았다. 기억이 하나둘씩 백지로 변하고 있었다.
세레이나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사막은, 아기에게는 혹독한 곳이라. 보내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는데. 각하께서 와 주셔서…….”
헤르젠은 세차게 흔들리는 눈으로 평온하게 웃어 보이는 세레이나를 보았다. 그 모습 하나하나 눈에 담아 잊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돌아서면 잊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