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루테가 이미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카티를 제게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 인사는 이제 됐다. 몇 번을 더 할래?]“백 번 천 번 말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많은 걸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무리 메꿔 보려고 애써도 구멍 난 자루에 물을 붓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았던 것들을, 아주 쉽게. 단지 존재 자체만으로.”
카티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그러곤 루테 쪽으로 낑낑거리며 돌아눕더니, 베개에 뺨을 파묻고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다.
루테가 미끄러진 물수건을 주워 올리며 한숨 쉬듯 웃었다.
“아버지, 저는 베르너와 아르닌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5년 전까지만 해도 감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도 이미 그 애들을 11년이나 키웠는데도요. 저는 지금도 베르너가 스스럼없이 제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
벌컥.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카티샤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베르너가 제 말 하면 오는 호랑이처럼 들이닥쳤다. 그는 아직도 침대맡에 자리 잡은 루테와 헤르젠을 발견하곤 후,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여기 계셨습니까? 두 분다.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시라니까요.”
성큼성큼 다가온 베르너가 딱 다섯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상체만 길게 빼 잠든 막냇동생을 이리저리 살폈다. 흙먼지투성이인 제 꼴을 자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열은 좀 내렸나 보네요. 쥐콩만 한 게, 이렇게 자주 아프니까 키가 안 크지…….”
“훈련 다녀오는 길인가 보구나.”
“예. 이제 씻으러 갈 겁니다. 카티 잘 있나 확인하러 잠깐 들른 거라서요. 씻고 다시 오겠습니다.”
연무장에서 어찌나 몸을 굴렸는지, 베르너의 팔뚝이며 목덜미에서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대충 수건으로 먼지만 털어 내고 곧바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금방 올 테니 저랑 교대하세요, 아버지. 식사도 제때 하시고요. 카티가 깨어나면 죄다 이를 겁니다.”
“그래. 알겠다.”
“예, 그럼.”
베르너가 루테와 헤르젠에게 한 번씩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도로 침실을 나섰다.
헤르젠은 소리 없이 문을 닫는 베르너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저 녀석이.]“재작년 제 생일 때부터 호칭을 슬쩍 바꾸더군요. 그땐 눈물이 좀 날 뻔했습니다.”
[…….]“형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마 카티가 없었더라면 베르너가 제게 이만큼이나 다가올 일은 없었겠죠. 우리 씩씩한 호박, 어디서 이렇게 넝쿨째 굴러들어 와선…….”
루테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잠든 딸의 말랑말랑한 뺨을 콕 눌렀다.
그러나 그 온유한 표정은 곧 씻은 듯이 사라지고, 냉혹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막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해 줬으니, 이제 저도 할 일을 마저 해야겠죠. 제 발치에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자들은 따로 있으니까요.”
[어쩔 셈이냐?]“아스트로카의 재정부터 털어 볼 셈입니다.”
[국고를 털겠다고? 무슨 수로?]“카티샤가 똑똑하게도 오르겐 후작에게 거짓 미끼를 물려 놓았더군요. 마공학 무기를 후작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아르닌이 직접 나서겠다고 합니다.”
[호오, 8대께서 들으시면 뛸 듯이 기뻐하시겠군. 마침 영령들도 해방되었겠다, 아르닌에게 힘이 되어 주실 수 있겠어.]블라스코의 8대 가주 이슬라.
아르닌의 미들 네임의 주인이기도 한 그는 블라스코만의 제련술을 확립한 뛰어난 대장장이였다.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은 루테가 느른하게 발을 까딱거렸다.
“최근 오르겐과 아스트로카 황실이 휘청이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죠. 황실이 멍청한 후작가의 구멍을 메꿔 주느라 황실 예산을 끌어다 쓰고 있다는 걸. 황제는 황후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습니다. 뭐, 어차피 황제와 황후, 오르겐은 한통속이니 마공학 무기 개발에 전력을 쏟을 겁니다.”
현재 블라스코를 압도할 만한 기술력과 해외 수출의 기대 가치가 높은 산업은 마도 공학 무기 개발 분야밖에는 없다.
그 노다지를 놓칠 리가.
루테의 입꼬리에 진한 비웃음이 걸렸다.
“아르닌이 만들어 낼 하자품의 수준이 대단히 기대되는군요. 부디 후작과 황제가 그것들을 인접국들에 많이 팔아 치워 줬으면 좋겠는데요.”
[외세까지 끌어들일 셈이냐?]“나쁠 것 없죠. 개털이 되어 금고에는 파리만 날리는 와중에 국제적인 망신까지 당하면 아스트로카의 위상도 고꾸라지지 않겠습니까? 신뢰도가 뚝 떨어진 주변 국가들의 압박이라. 괜찮지요.”
[과연 생각대로 될까?]“되게 할 겁니다. 저는 황실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꼴도 봐야겠거든요. 그 외에 걸고넘어질 만한 건 또 뭐가 있을까…….”
루테의 푸른 눈이 진득한 즐거움으로 반들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들은 죄다 핏빛이었다.
“반란을 일으키기에 아주 좋은, 흔한 명분. 무능한 황제의 폭정.”
결국에는 저놈이 반란까지 입에 올렸다.
헤르젠은 한숨을 쉬었지만, 내쉰 숨 끄트머리가 희열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란이라니, 지독하게 달콤한 단어였다. 황실을 쓸어버리겠다니……. 헤르젠의 귀에는 그 어떤 명문이나 노래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건드릴 수 있는 건 다 끌어다 쓸 겁니다. 아스트로카 귀족들의 세로 불리하다면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아, 전쟁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군.”
루테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전쟁은 루테 블라스코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입니다.”
[드디어 네 이름을 찾을 생각이 들었나 보구나.]“죽은 줄 알았던 루테에게 죽임당해야 더 극적일 테니까요. 궁금합니다. 페르테스 베르누아, 그놈이 내 존재를 알아채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끓고 온몸이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그 순간만을 위해 이제껏 참아 온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몸에서 미세하게 피어오르는 살기를 느꼈는지, 잠결에도 카티샤가 움찔거렸다.
루테는 이불을 말고 길 잃은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막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나는 가만두지 않을 거야, 카티. 네 엄마를 그렇게 가게 한 놈들을. 물론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고.
루테가 잠든 아이에게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그냥 잘 먹고 잘 놀면서 예쁘게 크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내가 네게 뒤바뀐 세상을 선물해 줄 테니.
루테는 허리를 숙여 딸의 이마에 뽀뽀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루테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카티샤가 부스스 눈을 떴다.
기척을 느낀 헤르젠이 반색하며 창문을 통해 침실로 홱 날아들었다.
[아이고, 우리 꼬맹이. 정신 차렸냐!]“네에…….”
아직 졸음이 다 가신 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꼬박 나흘을 열에 시달리던 아이치고는 눈빛이 또렷하다.
헤르젠은 부산스럽게 이불보를 허공에 둥둥 띄워 카티샤의 몸을 똘똘 감싸도록 했다.
[아무래도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데 말이다, 카티. 너 그 로켓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끙끙 앓는 게지? 거기 뭐 더 새로운 게 있던?]“……할아버지, 카티 안아 주세요.”
카티샤가 대답 대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땅꼬마 시절부터 할아버지에게 안겨 다니거나 옆구리에 달랑달랑 끼여 다니는 바람에 든 습관이었다.
[네가 몇 살인데 아직도 어리광이야?]말만 그렇게 했지, 헤르젠은 이미 아이에게 전력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두 팔로 안아 줄 수 없는 대신 손톱만 한 손바닥으로 카티샤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카티샤가 벌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작디작은 영령의 이목구비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어이구, 웬일이야. 나도 사랑한다, 우리 꼬마.]“아빠도 사랑하고, 또 엄마도…….”
엄마?
헤르젠은 카티샤의 뺨을 쓰다듬다 말고 고개를 기울였다.
갓난아기였던 카티샤가 어미를 기억할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잠결에 그와 루테가 나눈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
카티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엄마도 나를 많이 사랑했겠죠?”
[그럼, 당연하지.]“그렇구나……. 이제야 정말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네 집은 항상 이 할아버지 옆이었단다.]확언하는 말에 카티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윽고 눈물 젖은 연녹색 눈동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활짝 휘어졌다.
“할아버지, 나 돌아와서 너무 좋아요. 너무너무.”
아. 그제야 헤르젠은 아이가 로켓 속에서 그간의 일들을 모두 읽고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돼서 너무 좋아…….”
그 순간, 헤르젠은 영령의 탑에서 신수의 미친 제안을 받아들인 과거의 자신에게 깊이 감사했다.
루테의 말대로 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언제든 한 줌 흙으로 돌아간대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