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 * *
내가 깨어난 건 영령의 탑이 박살난 지 닷새가 되던 날이었다.
일어나 보니 아르템 본가의 풍경이 전과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해방된 32인의 영령들 때문이다.
탑이라는 봉인의 매개체가 사라지는 바람에, 영령들은 졸지에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 나앉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대로 두면 영혼에 불과한 그들은 하나둘씩 소멸하거나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 불시착할 게 뻔했다.
“영령의 탑은 초대 황제이자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로 칭송받았던 루베니오 1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마법사들을 전부 다 긁어모아도 이전과 같은 공간을 재건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봉인의 영역이 지나치게 좁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봉인진 자체의 크기를 넓히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그리하여 해결책을 세웠다. 영령의 탑에 국한되어 있던 귀어스트의 봉인진을 아르템의 블라스코 본가 전체로 확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 말인즉슨, 영령들에게 허락된 공간이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즈음 방문을 나서면 복도며 창틀, 천장 − 대체 왜 천장에 붙어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 연무장, 서재, 식당, 정원, 아르닌 언니의 대장간, 심지어는 우물 안에서도 영령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렌이 교육하는 견습 하녀 한 명은 우물에서 두레박과 함께 길어 올려진 19대 가주님의 영령과 맞닥뜨리곤 불경하게도 비명을 질렀다더라.
생전에 온천욕이 취미셨다나…….
[전화위복이라고 하지 않니!]32대 가주, 아셀 님의 영령이 즐겁게 외쳤다. 헤르젠 할아버지의 아버지이자 아빠의 할아버지, 내겐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분이셨다.
[내 손주와 증손주들을 이렇게 직접 만나 볼 수 있게 되다니. 고작 30년 조금 넘게 탑에 있었던 나도 이렇게 즐거운데, 선조들께서는 얼마나 행복하시겠어? 다시 본가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하셨을 거다!]그것만큼은 잘된 일이다. 나쁜 일도 있으면 좋은 일도 온다고, 잔뜩 신이 난 32명의 영령들이 본가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풍경은 내게도 무척 반가웠다.
밀폐된 곳에서 억겁의 세월을 견뎌야 하는 저분들이 항상 마음에 걸렸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매일 아침의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러 아버지의 서재로 내려가려던 길이었다.
나는 복도를 걷다 말고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선이 향한 곳은 북쪽이었다.
저 우거진 삼림 한가운데 숨겨진 거대한 인공 사바나.
‘아이칼은 괜찮을까.’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내가 창가 앞에 꽤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곁으로 다가온 사람은 니엘라였다.
“걱정되세요, 공녀님?”
“아…… 어, 으응. 아무래도.”
수도의 타운 하우스를 박차고 나왔을 때 그녀를 데리고 온다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니엘라는 어제 아르템에 도착한 참이었다. 이제는 시녀가 아니라 내가 초대한 블라스코의 객으로서.
일전에 내가 선물했던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은 그녀는 어느 명망 높은 집안의 단아한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역시 옷이 날개라고.’
게다가 고운 아미를 한껏 찡그리고 있으니 더더욱 모시는 쪽보다는 부리는 쪽…… 음?
“표정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서요.”
“내가?”
“아니요, 그 신수가요. 왜 걱정하세요? 제가 보기엔 걱정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는 노, 분일 것 같던데요.”
“……방금 놈이라고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어머, 그럴 리가요. 감히 백의 교단의 파수꾼께 그 무슨.”
니엘라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의심할 필요도 없이 결백해 보여 떨떠름해졌다.
“넌 배우 쪽으로 나갔어도 크게 성공했을 거야…….”
“몇 안 되는 제 장기죠. 나중에 공녀님께도 전수해 드릴게요. 살아가는 데 굉장히 유용하거든요. 특히 공녀님 같은 분께는.”
“나한테 왜?”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시잖아요. 특히 뭐 씹은 표정이요.”
“……그랬나……?”
“물론 지금이야 작고, 어리고, 귀여우시니 괜찮지만.”
작고…… 과연 칭찬일까?
이것이 칭찬인지 고도의 비꼬기인지 고민하는 사이, 니엘라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이야 블라스코령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계시지만 당장 몇 년 뒤에 사교계에 데뷔할 시기가 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걱정 마세요. 웃는 법, 우는 법, 곤혹스럽게 보이는 법, 두려움을 감추는 법, 효과적으로 엄살 부리는 법, 유혹하는 법, 등등 전부 가르쳐 드릴 테니.”
가식을 떠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군…….
게다가 마지막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나 마지막 건 사양하고 싶어.”
“하긴, 얼굴이 이미 타고났으니 그건 굳이 익히실 필요 없겠네요. 프리츠를 낚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시던데.”
“난 황태자를 낚은 적이 없어, 니엘라. 애초에 프리츠는 생선이 아냐.”
“의식한 게 아니었다면 타고나신 거예요.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물고기들이 알아서 기어들어 온다는 거죠. 그건 엄청난 장점이랍니다, 공녀님.”
내 반박을 죄다 튕겨 내는 니엘라에게서 묘한 열정이 느껴졌다.
뭐, 내게 도움이 될 방법들을 강구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며칠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내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본 니엘라가 빙긋이 웃었다.
“어장은 크고 튼튼할수록 좋죠, 그럼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좁은 것보단 뭐든 큰 게 낫겠지.”
하지만 거기에 정작 한 놈을 못 담으면 어장을 수영장만큼 키운다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키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니엘라는 다시 우울해진 내 표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내 결심한 듯 운을 떼었다.
“공녀님, 주제 넘는다는 건 알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신수 말이에요…….”
“너까지 아키를 조심하라고 충고할 거면 그만둬.”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요즘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주치는 영령들마다 아이칼을 당장 내버리라고 성화였다. 이제는 남의 입에서 ‘아’ 자만 나와도 지레 피곤해졌다.
나는 오늘 아침에 카렌이 정성 들여 묶어 주었다는 사실도 잊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 아키 없으면 못 잔단 말이야…….”
내 애착 인형, 아니, 내 애착 표범인데.
우리의 아침 루틴이 정해져 있듯, 잠들기 직전까지의 루틴도 항상 같았다.
난 어릴 적부터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항상 헤르젠 할아버지를 졸라 내 머리맡에 두고 옛날이야기 해 달라고 졸랐더랬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로 그 역할을 맡은 게 아이칼이었다.
사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내가 잠든 사이에도 그가 계속 내 곁을 지키고 있다는 그 당연함이 좋았던 거니까.
‘물론, 그런 것치고는 근 며칠 동안 생각보다 얌전히 잘 잤지만…….’
아마 그동안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탔던 건 이곳이 진짜 나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기인했던 게 틀림없었다. [지.우.마>를 완결까지 해금해 일의 전말을 알게 된 이후로 예전과 같은 조급함이 씻은 듯 사라진 걸 보면.
그러나 아직 불안함은 여전했다. 아이칼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탓이다.
내 2000골드.
내 훌륭한 이동 수단.
내 솜뭉치.
내 까만 발바닥 젤리.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 줄 아군, 한 몸 같은 나의 그림자.
내 친구.
‘그 애가 없으면…….’
우울한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자 삽시간에 서글퍼졌다.
“……그럼 이제 나 누구랑 놀아?”
“네?”
“내가 자다가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려고 하면, 이제 누가 붙잡아 주지……?”
“…….”
“나 이제 누구랑 수다 떨고, 누구랑 손잡고, 내 오러는 누가 정화해 주고, 또…….”
내가 혹시라도 또 밤에 악몽을 꾸면, 누가 안아 주지, 이제?
창문에 평소보다 핏기가 없는 내 얼굴이 비쳤다. 어렴풋이 비친 표정은 낯설 만큼 공허했다.
아이칼의 부재는 상상만으로도 내게 커다란 상실감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칼은 5년 내내 항상 눈 닿는 곳에 있었다. 단순히 함께 놀 친구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내 심리적 안정제였다.
아이칼이 있는 한 나는 낯선 환경도, 긴 밤도, 정적의 위협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내 하루하루가 평온한 일상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확증하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그건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그때였다. 단호한 목소리가 내 상념을 석둑 잘라 냈다.
“좋지 않아요.”
니엘라였다.
“아, 어? 뭐라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는 니엘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조용히 되풀이했다.
“좋지 않다고요. 그런 관계요.”
“너까지 그런 말 하지 말……”
“아뇨. 당장 멀어지란 말이 아니에요. 끌려다니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죠.”
니엘라가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키가 나보다 한 뼘은 커서, 자연히 나는 니엘라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목소리를 낮춘 그녀가 엄중하게 속삭였다.
“그를 곁에 두실 거면, 그를 좋아하지 마세요. 마음을 주어도 아주 조금만. 그의 마음보다는 훨씬 작은 만큼만.”
“…….”
“관계의 주도자가 되셔야 해요.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있는지, 주종 관계를 확실히 하세요.”
“……잠깐만.”
나는 일단 손을 내저어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확실히 이건 내 예상을 빗나간 내용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하다.
“일단, 주종 관계라니. 아키랑 나는 친구야. 친구 사이에 주종이 어디 있어?”
“공녀님, 인간과 신수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혀를 차는 니엘라의 얼굴 위로 이스마가 겹쳤다. 그도 나를 이런 식으로 애잔하게 보았다. 현실을 볼 줄 모르고 예쁜 꿈이나 꾸는 순진한 어린애 보듯.
니엘라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섞일 수가 없는 존재예요. 구태여 섞이려 들지도 않는 존재예요. 그게 ‘당연한’ 거고요. 처음부터 공감이나 교류 따위는 불가능한, 뿌리부터 인간과는 다른 종족인 거예요.”
“…….”
“지금까지가 정상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았던 거라고요. 이상하리만큼. 물론 어리니까 둘 다 뭘 몰라 그랬겠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어 가는 니엘라의 얼굴에 일순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모르면, 홀릴 수 있어요. 하지만요, 공녀님.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되면…….”
다쳐요.
니엘라가 나직이 속삭인 그 세 글자가 마음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장 [지.우.마>에서의 니엘라가 그를 향한 외사랑에 번번이 상처입지 않았던가?
내가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물자, 니엘라가 달래듯이 내 어깨를 쓸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이젠 관계를 다르게 바꿔야죠.”
“어떻게, 바꿔야 하는데?”
“지금까지 신수와 연을 맺었다가 죽어 간 자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피하려면 방법은 하나. 소유의 주체가 되는 수밖에는 없어요.”
“…….”
“그는 짐승이잖아요. 지금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가까이서 나와 눈을 맞추고서, 니엘라가 빙긋이 웃었다. 어쩐지 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짐승은 길들여야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