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
15화
* * *
“햐, 과소비 만만세다.”
나는 내 방을 한가득 채운 약초 꾸러미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약초 냄새가 온 방에 흠뻑 배었다.
킁카킁카. 너무 향긋해.
사람들이 이래서 플렉스를 하나 봐!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나는 한참이나 꾸러미들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은 뒤, 양 소매를 둘둘 걷어 올렸다.
“자, 그럼 이제 작업에 돌입해 볼까!”
오후 늦게 시작한 작업과 내일을 위한 만반의 준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났다. 약초 더미에 파묻혀 곯아떨어졌다가 일어나 보니 벌써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공작의 서재를 노크하자, 곧장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작님.”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는 공작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만 까딱했다.
이미 익숙한 반응인지라, 얼른 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미 테이블 위에 오늘의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내가 브로콜리 치즈 리소토를 거의 다 비워 갈 즈음, 공작이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어제 뭐 했어?”
“그냥 방에서 혼자 놀았어요.”
“풀 뜯으면서?”
에엑! 어떻게 알았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공작이 쯧쯧 혀를 찼다.
“약초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혹시 자기 집에서 마음대로 일을 벌였다고 꾸중할까 봐 긴장했으나, 공작은 별다른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래도 찔리는 마음에 얼른 변명을 내놓았다.
“실은, 어제 공녀님과 공자님이 대련을 하셨는데, 공녀님께서 조금 다치신 것 같아서요.”
“아르닌이? 왜, 어깨가 불편해 보이던?”
“네. 주치의도 물리시던걸요.”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내리깐 청안에 옅은 시름과 염려가 어렸다.
“하여튼 미련한 것. 누굴 닮았는지…….”
그 역시 딸의 부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공작의 걱정을 덜어 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공녀님을 찾아가 보려고요.”
“그 아이는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해.”
“그야, 공작님과 공자님께는 그러시겠지만요……. 저는 남이니까요.”
“……남이라.”
공작이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자존심을 세워야 할 필요조차 없는 상대라고 인식하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베르너가 나를 하녀로 착각하고 초코 쿠키를 내민 것처럼 말이다.
공작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잠깐의 틈을 둔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군.”
“그쵸? 첫 만남이니까, 선물을 들고 가고 싶었어요. 별건 아니지만요!”
나는 주머니에서 파란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공작의 눈초리가 흥미로 가늘어졌다.
“그래서 어제 하루 종일 그거 만들었어?”
“네! 딱 200개 만들었어요.”
200개? 공작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많이도 만들었네.
하지만 내 기준에선 200개도 부족했다. 일회성인지라 될 수 있는 한 많이 만들고 싶었는데, 체력과 시간이 따라 주지 못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내게 공작이 툭 물어 왔다.
“200개 다 아르닌 줄 거야?”
“네! 공녀님 다 드릴 거예요!”
당연하다. 점수 따야 하니까!
“아…… 그래.”
그런데 어쩐지 공작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도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르닌은 좋겠네. 선물 많이 받아서.”
“우와, 그러시면 정말 좋겠다……!”
제발 이 뇌물이 먹혀야 할 텐데!
그런데 어째 공작의 표정이 점점 더 냉랭해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입을 앙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공녀님께만 선물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빠졌나?’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이고, 또 아버지인데 그렇게까지 속이 좁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다행히, 내겐 이런 상황에 대비한 선물이 하나 더 있었다.
“저어, 공작님. 실은 이거…….”
슬그머니 그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 내가 특별히 배합한 찻잎을 넣어 놓았다.
“이거, 밤새우실 때 따듯한 물에 우려 드세요. 집중이 잘되실 거예요.”
내게서 주머니를 받아 든 공작의 입매가 약하게나마 허물어졌다.
“뭔데, 이게? 피로 회복제?”
“아뇨, 카페인이요.”
“…….”
“극강의 각성제! 고작 카페인 함량 100밀리그램 남짓의 커피나 홍차 따윈 다 저리 비켜, 일주일 걸리는 일도 단 하루 만에 뚝딱……”
“나가.”
나는 회심의 영업을 끝맺기도 전에 서재에서 쫓겨났다.
나름…… 비장의 무기였는데…….
나는 문틈으로 다하지 못한 말을 외쳤다.
“인체에 무해해요, 공작님! 헤르젠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배합법인데, 효과 엄청나니까 미친 듯이 바쁘실 때 한번 도전해 보세요! 대신 한 달에 한 번! 자주 마시면 위장에 안 좋대요!”
이왕이면 짧고 깊은 수면을 취하게 해 주는 유도제나, 피로 회복제를 드리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난 그 정도로 약초 베테랑은 아니었다.
애초에 알고 있는 배합법도 다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내가 아는 것 중에 가장 공작에게 필요할 법한 것을 시도해 봤는데, 반응이 아주 냉담하다.
“못된 것. 멀리 사라져.”
나는 틀어박혀서 일이나 하라 이거냐?
그 뒤로도 공작이 뭐라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곧 잦아들었다.
그제야 아차 싶은 깨달음이 왔다. 혹시 정말 피로 회복제 같은 걸 기대하셨던 걸까?
‘죄송해요. 더 정진해서 꼭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공작의 서재를 뒤로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마가렛, 아르닌 공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공녀님은 어제부터 죽 별채에 계신답니다. 데려다드릴까요?”
“네! 이것도 같이 옮겨 주시면 안 될까요?”
“당연히 되죠!”
이번에도 마가렛이 나를 공녀가 머무르는 별채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아르닌 아가씨의 별채는 지하와 1층을 통으로 대장간으로 개조했답니다. 본가로 돌아오시는 날이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세요.”
“네에.”
“혹시라도 공녀님께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얼른 다시 나오셔야 해요. 아르닌 님의 대장간엔 그분의 마력으로 컨트롤하는 설비들이 많거든요.”
그 내용은 [지.우.마>에도 나와 있었다.
아르닌은 일부러 니엘라에게 어려운 재료들을 구해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니엘라는 대장간의 트랩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며 그녀에게 재료를 가져다 바쳐야 했다.
“어제 보셨다는 그 하늘색 오러 있지요? 그것만 보고 따라가시면 돼요.”
“네에. 걱정 마세요.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요.”
나는 씩씩하게 대답한 뒤, 조심스럽게 대장간 깊이 진입했다.
아르닌에게 가고 싶은 이유가 그녀가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상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르닌 블라스코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지금 우리, 마법처럼>에서는 블라스코 공작가 일원들에 대한 설정이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그들이 얼마나 니엘라에게 매정하게 굴었으며 그로 인해 니엘라가 얼마나 몸과 마음이 병들었는지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다.그러나 그들이 활자 몇 줄, 종이 몇 장으로 표현되는 책 속 등장인물이 아닌 이상, 소설 속에 드러난 건 그들의 극히 일부일 것이다.
그럼 소설 이면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진짜 인간 폐기물들? 아니면 생각보다 따듯한 마음을 가진 악당?
‘어느 쪽이든, 그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작가님이 의도하신 부분일까?’
여기는 정말 소설 속일까, 아니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일까?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마주치다 보니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내게도 몹시 중요한 문제였다.
‘카티샤 아인슬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내가 누군가가 창조해 낸 캐릭터인지, 그리하여 정해진 플롯을 따라가야만 하는 인물인지 알고 싶다. 그래야 당장 눈앞의 상황을 모면한 이후에도 내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결국 다 내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일단 주요 인물들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로켓의 비밀도 풀어 이 세계의 근간에 접근해야 한다.
공작은 소문만큼 싸늘하고 다혈질이지만, 소문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의외의 면에서 다정했다.
공자는 말수 적고 오만한 것치고는 눈치가 바닥이다. 둘 다 원작에서 설명한 것과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럼 공녀는 어떨까?
아르닌의 위치를 찾는 건 쉬웠다.
마가렛이 말한 대로, 어제 연무장에서 본 흐릿한 하늘색 마나가 아직 갈무리되지 않은 채 허공에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드문드문 이어진 검기를 따라 대장간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공녀의 대장간은 소설 속 묘사와 정확히 일치했다.
‘저건 꺼지지 않는 이실라드의 불꽃일 거고, 저건 전설의 대장장이 카야트가 사용했다던 망치와 숯돌이겠네.’
불의 정령이 직접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불꽃이 화덕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망치와 끌, 줄과 집게 같은 도구들과 미완성인 무기들이 양쪽 벽면을 빽빽이 채웠다. 조금 더 깊숙한 곳에는 아마 연금술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리라.
이곳에서 원재료인 금속들을 정련하고, 강화 재료들을 더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게 아르닌의 일이었다.
나는 슬쩍 문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아르닌은 불꽃이 거대하게 넘실거리는 화덕 앞 낮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쪽을 등진 채였다.
그녀는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는데, 통증이 있는지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통증이 남은 모양이었다. 붕대를 감고 있지 않은 걸 보니 아직도 주치의에게 보이지 않은 듯했다.
‘이럴 줄 알았어. 아픈 걸 티 내지 않는 타입이구나.’
딱 혼자 참고 삭이다가 속병 들 타입이다.
‘자존심도 지나치면 미련함이 되는 법인데.’
나는 일단 그녀가 검을 들고 있지 않다는 걸 먼저 확인한 뒤, 살금살금 움직임을 개시했다.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발소리를 죽여서, 최대한 가볍고 민첩하게.
아르닌의 바로 뒤편까지 다가간 나는 그녀의 오른팔 옆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니, 이거 드릴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