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그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눈을 감고 두피로 전해지는 기분 좋은 감촉을 즐기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스마 아저씨가 며칠 뒤에 널 데려갈 거래.”
잠시 망설이던 아이칼이 짧게 긍정했다.
“응.”
“진짜 갈 거야?”
“…….”
“2000골드, 왜 대답이 없어? 주인님 버리고 진짜 갈 거야?”
훅 솟구치는 불안감에 나는 아이칼의 양어깨를 잡고 몸을 떼어 냈다.
그가 드물게도 내 시선을 살짝 피했다.
“……몇 년, 정도는.”
“뭐?”
“지금은 내가 널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옆에 있으면 안 돼. 하지만 성체화가 끝나면 괜찮겠지.”
“……그래서 그때까지 떠나 있겠다고? 어디로 갈 건데?”
“뭐, 어디든. 아마 남단이나 북단으로.”
“…….”
“아마 짧으면 3년, 길면 4년……. 그보다 길어지진 않을 거다.”
4년 뒤면 성체화는 끝나겠지만, 넌 힐라이야의 권능을 잃게 되잖아.
그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다. 끝내 그 물음을 삼킨 건 확인받기가 무서워서였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아이칼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되살렸든, 설령 그 동기가 불순하다고 해도, 그리고 원래 우리가 어떤 사이였건 간에, 나를 위해 그가 감수해야 할 대가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재생의 권능을 잃게 된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를 잃는 것과 같다.
첫째로는 신수의 긴 수명, 둘째로는 성검 힐라이야의 주인 될 자격, 셋째로는 자체 회복 능력과 치유 능력.
물론 눈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은 여신의 권능과는 별개이니 존속하겠지만…….
‘권능을 쓰지 못하면 쿼터 정도의 힘도 못 낸다는 거잖아.’
나 때문에.
그렇다면 아이칼은 더 이상 ‘홀로 완전한’ 신수도 아니게 된다.
고슴도치가 심장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같이 가슴이 따끔거렸다.
“……알겠어. 길면 4년, 그쯤이라는 거지?”
“응. 그러니까 카티도 이제 혼자 자는 법을 배우……”
“4년 뒤엔 내가 전적으로 먹여 살릴게.”
“응?”
아이칼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나는 눈을 다부지게 뜨고 호언장담했다.
“걱정하지 마, 아키. 주인님이 돈 많이 벌어서 평생 호의호식하게 해 줄 테니까!”
“좋은 거야?”
“당연하지. 앞으로의 네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뜻인걸.”
아이칼이 내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기회를 주고 내 진짜 가족들을 돌려준 셈이니, 내가 이놈을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려야 하는 건 무척이나 마땅한 일이었다.
“책임…….”
아이칼이 생경하게 그 말을 되뇌었다.
그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치나 싶더니, 아이칼이 묘하게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이참에 망할 오르겐도 싹싹 긁어먹고, 가능하다면 황실까지……. 웃지 마, 난 진지하니까.”
“안 웃었다.”
아이칼이 대번에 표정을 싹 지웠다.
말 한마디에 대번 삭막하고 묵묵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쩔 도리 없이 웃음이 났다. 융통성을 모르나 싶을 만큼 고분고분한 이 모습 역시 내 아이칼이 틀림없었다.
‘그래. 뭘 걱정했던 거야.’
아이칼의 말랑한 양 뺨을 쭉 꼬집어 늘리자, 그가 고개를 비틀어 내 손가락을 앙 깨물었다.
으악,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빼자 잽싸게 몸을 다시 붙인 아이칼이 이번에는 내 손목을 덥석 물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에게 반쯤 깔리고 손까지 물린 채로 울상을 지었다.
“아야, 아파!”
“네가 먼저 시작했어.”
“야아아…… 아, 간지러워. 핥지 마……!”
“좋은 냄새 나.”
“씻고 왔으니까……. 왜 자꾸 깨물어. 저리 가!”
아이칼이 습관처럼 내 손목이며 턱선, 귓불을 할짝거리는 통에 우는소리를 하다 말고 웃음이 터졌다. 내 작은 새끼 눈표범이 매번 하던 짓과 정말 똑같았기 때문이다.
응, 역시 내 아키 맞지.
나는 내 위를 독차지한 소년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너 이제 옛날처럼 작지 않거든? 무거워. 내려와.”
“싫어. 카티 시원해서 좋다. 안고 있을래.”
“네가 뜨거운 거라니까…….”
그렇게 얼마나 하나처럼 엉겨 엎치락뒤치락했을까. 퍼뜩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맞다. 나 몰래 온 거지.’
가족들이 찾기 전에 돌아가 봐야 했다.
나는 서둘러 아이칼을 밀어내고 몸을 바로 세웠다.
“이제 가야겠다. 오래 머무른 걸 알면 할아버지한테 또 혼날 거야. 이제 아빠 방패도 오래 못 쓰니까.”
“간다고?”
“일단 오늘은. 네가 떠나기 전까지 몰래몰래 올게.”
아이칼의 눈썹이 가파르게 솟아오르다, 급히 덧붙인 말에 스르르 원위치로 돌아왔다.
아이칼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꼭 와야 해, 카티. 이번엔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하고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싸늘하고 냉막하던 인상이 훅 날아가고 남은 건 곱고 얌전한 미소년이었다.
‘……귀여워.’
머리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1초쯤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열 살배기 시절의 젖살은 간데없지만 여전히 희고 보드라운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그의 왼뺨에 쪽 뽀뽀했다. 순종적으로 내게 이끌리던 아이칼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아 참.’
은푸른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급격히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애정 표현으로 뽀뽀는 재작년에 졸업했다는 게 떠올랐다.
그 뒤로는 인간화한 아이칼에게 입 맞춰 준 적이 없었다. 엄청 오랜만이구나.
‘음…… 뭐. 아키니까.’
어차피 눈표범의 촉촉한 콧잔등에 뽀뽀해 줬던 적은 수도 없이 많은걸.
손등을 간지럽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복슬복슬한 털을 상기시켰다.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손빗으로 가볍게 쓸어내리는데, 아이칼의 뺨이며 이마가 점점 더 따듯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이칼?”
“어, 응. 알겠다.”
의아하게 그를 부르니 생뚱맞은 답이 돌아왔다.
나는 미심쩍게 그를 봤다.
“뭘 알겠다는 건데?”
“매일 온다고…….”
“매일 온다고는 안 했어.”
“아, 으응. 이틀에 한 번 온다고.”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않았어…….”
얘가 갑자기 왜 이런담?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아이칼을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귓불도 빨갛잖아.’
검지와 엄지로 따끈하고 말랑말랑한 귓불을 살살 만져 보았다.
역시 아까보다 좀 더 뜨겁다.
발간 열 기운은 어느새 섬세한 눈매와 뺨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칼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카, 카티.”
“응?”
“……그만해.”
그가 황급히 내 손목을 잡아 내렸다. 나를 피해 부산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동작이 삐걱거리는 듯도 했다. 아무래도 성체화 곡선이 다시 상승세를 그리는 모양이었다.
‘정말 많이 안 좋은가 봐…….’
“대체 어쩌다 눈표범이 푹푹 찌는 열대 초원에 던져져서는……. 물론 업보지만…….”
“…….”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너무 성질부리지 말고, 알겠지?”
“응…….”
“다음에 올 땐 얼음 가져다줄게, 아키. 이제 정말 가야 하니까 이 팔도 좀 놓고. ……놓으라니까. 아이칼?”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팔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는데도 허리를 꽉 옭아맨 힘은 그대로였다. 결국 아이칼은 내게 손등을 찰싹 얻어맞고 나서야 나를 풀어 주었다.
* * *
이스마가 어슬렁어슬렁 협곡 아래로 내려온 것은 카티샤가 가오리를 타고 떠난 직후였다.
그는 협곡의 그늘에 진하게 번져 있는 주황색 오러를 감지하고는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오렌지 양 왔다 갔구먼? 그 소녀도 참, 겁이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아니면 아주 죽고 못 사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너 뭐 하냐?”
돌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은 아이칼의 표정이 무척 멍청했다. 어디서 났는지 주황색 끈으로 머리 꽁지까지 묶고 있다. 카티샤의 작품인 게 틀림없었다.
‘하이고야, 소꿉장난도 아니고. 귀여워라.’
그러나 이스마의 흐뭇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이칼이 문득 홀린 듯 중얼거린 것이다.
“카티가, 오랜만에…….”
“오랜만에, 뭐?”
“뽀뽀해 줬어.”
“아, 그래. 뽀…… 뭐?”
이스마가 질겅거리던, 몸을 차게 만들어 주는 풀뿌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가 턱이 나가도록 입을 쩍 벌렸다.
“너…… 너 임마, 그 작고 순진한 소녀를 데리고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뽀뽀 졸업했다고 했는데…….”
“힐라이야시여, 맙소사! 아버지! 막내가 발랑 까져서는……!”
“좀 닥쳐 봐.”
아이칼이 온갖 수선을 떨어 대는 이스마에게 위협적으로 그르렁댔다. 그러나 방금까지 카티샤가 있던 자리를 보자마자 훼방꾼을 향한 짜증과 분노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대신 제 얼굴을 조심히 쓸다가 갑자기 뺨에 입을 맞추고, 그걸로도 모자라 함부로 귓불이나 만지작거리던 소녀의 얼굴만 눈앞에 둥둥 떴다.
사실 아주 새삼스러웠다. 아이칼이 시도 때도 없이 카티샤를 끌어안고 깨물고 목에 뺨을 비벼 대는 것만큼이나 카티샤도 그에게 스스럼없이 굴곤 했던 것이다.
가끔은 이 애가 지금 날 밤마다 끌어안고 자는 푹신한 인형 따위로 여기는 걸까 싶을 만큼.
그런데 지금은.
“……뭐야, 이거.”
아이칼은 손등으로 거칠게 목을 문질렀다. 귓불과 목덜미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고 있었다.
단전에서부터 참기 힘든 고통을 동반하며 끓어오르는 오러의 열기와는 달랐다. 그보다 조금 더 얕고, 간지럽다. 꼭 살갗 위에서 작고 가벼운 나비 수십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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