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이스마가 그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표정 봐라. 아주 좋아 죽는구먼. 근데 뭘 자꾸 아니래?”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아이칼은 습관적으로 부정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뭐가……. 그러게. 뭐가 아니지?
“껄끄러운 사이니 어쩌니,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느니 어쩌니. 순전히 헛소리였구먼.”
“그건 아니야. 분명히 언젠가는 그냥 밑도 끝도 없이 거슬렸던 적이 있었…….”
“그렇게 짜증스럽게 거슬렸으면 기억을 찾은 즉시 죽여 버리면 될 걸, 뭐 한다고 붙잡아 놓다가 뽀뽀나 받고 있어?”
“……너는 말하는 게 교양이 없다.”
“지랄, 남 말 하네.”
아이칼은 두 번 말하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쩌적, 바닥의 암석을 깨부수고 얼음 줄기가 치솟아 얼기설기 엮이며 벽을 쳤다. 아직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이 들들 끓는 바람에 공격보다는 방어에 가까웠지만, 카티샤가 보았다면 충분히 배신감을 느낄 광경이었다.
“하여튼 괴물 같은 놈, 아파서 데굴데굴 뒹굴어도 모자랄 판에…….”
이스마가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아스라이 멀었다. 그가 뭐라고 지껄이든 아이칼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이 거지 같은 열대 초원에 처박혀 있기를 오늘까지로 일주일.
아이칼은 바닥을 구르는 대신 협곡을 조각내 산사태를 일으키거나 협곡 사이를 눈으로 가득 채우는 일 따위를 쉼 없이 반복하며 기억의 퍼즐을 맞추었다.
카티샤가 영리하게도 그를 보자마자 위화감을 감지했듯이, 그는 분명 영령의 탑이 무너지기 직전의 ‘아이칼’과 동일인은 될 수 없었다. 그가 걸어온 시간과 경험은 그보다 배는 길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전후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아이칼이라는 존재의 기본 성향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놀랍도록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관심과 비정함을 갑주처럼 두르고 그저 관조하는 존재.
그러나 분명 두 배나 되는 경험치에서 오는 앎의 차이는 있었다. 이를테면, 적어도 ‘집착’이나 ‘설렘’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안다는 것이라든가.
물론 그것조차 그가 직접 겪은 감정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세계’에서 제 뒤를 늘 눈으로 좇던 금발 머리 여자 인간이 알려 준 적이 있었다.
“난 당신을 보면 대책 없이 설레요, 아이칼.”
“그래서 자꾸만 집착하게 돼. 결국 날 돌아보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 눈길 한 조각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난 그 짧은 눈 맞춤만으로도 온종일 희망에 젖어 설렐 수 있으니까…….”
니엘라라는 이름의 그 여자는 ‘다시 이어진 세계’인 지금에 와서도 그에게 비슷한 것을 가르치려 했다.
“공녀님, 좋아해요?”
“그냥 집착인가요? 아니면……. 일방적인 집착이 아니라면, 무슨 사이인데요?”
“세상 어느 친구가 그래요? 저, 적어도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는 하지 않아요.”
그렇지.
아이칼은 이제 알았다.
‘친구…….’
확실히, 카티샤와 저를 단순한 친구라는 항목으로 묶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참 많았다.
일단 아무리 막역한 친구 사이라도 매일같이 한 침대에서 잠들지는 않는다. 하물며 동성도 아니고 이성 간에야.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쳐도, 가족도 모르는 서로의 하루 24시간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막말로 같은 욕실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 그랬더라면 아마 자신은 인간화한 모습을 들킨 날 블라스코에서 쫓겨났을 테지만 − 아이칼은 카티샤가 해마다 키가 몇 센티미터씩 자랐고, 몸무게는 몇 킬로그램씩 늘었으며, 손톱은 얼마만큼의 주기를 두고 깎아야 하는지, 심지어는 머리카락이 한 달에 몇 센티미터씩 자라는지까지도 꿰고 있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키, 지난달보다 머리카락이 정확히 2.3센티미터가 자랐어. 5센티미터를 채우면 다시 잘라 줄까?”
“너는 작년보다 정확히 12.2센티미터나 클 동안 나는 왜 고작 4.1센티미터밖에 자라지 않은 거지?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자는데, 이건 뭔가가 크게 잘못됐어.”
그것뿐인가? 서로의 취미, 취향, 입맛, 건드리면 격한 반응이 돌아오는 약점, 간지럼 타는 부분, 싫어하는 접촉, 좋아하는 접촉. 본인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습관들까지.
서로의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아주 바람직한 일상.
하지만 평범한 친구 사이에 공유할 법한 것은 결코 아닌.
아이칼은 얼마 전에 노란 머리 여자 인간이 감히 저를 가르치려 늘어놓았던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면, 설렌다거나…….”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 정도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바로 오늘 이전까지는.
“가슴이 막 뛴다거나. 눈을 못 마주치겠다거나……. 얼굴에 열이 오른다거나, 그런.”
산 생명이 심장이 뛰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과한 것 같기는 했어.’
난리법석을 치는 심장 박동이 제 귀에도 들릴 지경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카티샤의 눈을 피한 적도 처음이었다. 그는 늘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녀를 강박적으로 뒤쫓곤 했다.
“헤어짐이 아쉽다거나.”
이건 부정할 길도 없이 해당이다.
카티샤가 결국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치며 얼굴을 찌푸리지만 않았더라도 안 보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공녀님께 접근하는 게 보기 싫다거나? 그러니까 남자, 가요. 여자 말고 남자. 이성…….”
이건 남녀불문 원래부터 싫었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남자 쪽이 더 싫었던 것 같기도…….’
지난한 근거들을 토대로 점차 결론이 도출되고 있었다.
그 노란 머리 여자 인간이 애초에 그 말을 지껄였던 이유는 그에게 ‘공녀를 좋아하느냐’라는 명제를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저렇게 일곱 가지 항목에 전부 해당한다면…….
얼음벽 너머에서 이스마가 황당하다는 듯 왈칵 외쳤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모르겠네. 좋아하는 거 아냐!”
물론 그 말은 얼음 방벽을 뚫지 못했고, 당연히 고민을 거듭하는 아이칼에게도 닿지 않았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좋아하는 게 맞나?
‘하지만 지금까지도 좋아했는걸.’
카티샤는 그와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역시 새삼스럽다.
‘하지만…….’
하지만 사실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혀 익숙하지도, 낯익지도 않았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아이칼이 내면에서 강하게 충돌했다.
이 시간대로 돌아오기 전의 그는 카티샤의 ‘진짜’ 생김새를 알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건 흐리흐리한 노을색 오러 형태의 영혼 조각과, 그 여린 영혼이 다른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말하는 모습뿐이었다.
아이칼은 문득 조금 전까지 소녀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던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게 닿았던 작고 보드라운 감촉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나며 등줄기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주황색 머리카락, 연녹색 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렇지. 그 애는 그런 얼굴이지. 그렇게 생겼지. 작고 사랑스러운 여름의 요정같이.
내 카티샤는 먼 과거에 어렴풋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지…….
“……카티 보고 싶어.”
“…….”
“지금 당장.”
카티샤가 떠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칼은 점차 들뜨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초조하게 몸을 들썩거렸다.
카티 냄새 맡고 싶다.
뽀뽀 한 번만 더 해 줬으면 좋겠다.
곁에 붙어서 추근대면 당연하다는 듯 몸을 맡겨 줬으면 좋겠다.
평소처럼, 잠결에 데굴데굴 굴러 품으로 쏙 안착했으면. 달갑지 않은 악몽 따위 잠시도 꾸지 않도록 재워 줄 수 있는데.
그때마다 오늘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빠르게 고동쳤으면.
손끝 발끝이 들썩일 만큼 애타면서도 심장 표면에 잔거품이 톡톡 터지는 듯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이스마는 도무지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돌바닥을 까득까득 긁는 소년을 식어 버린 눈으로 바라봤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눈에 다 보인다.
“별…… 내 참. 바보 아냐?”
하기야 난 직후부터 백의 교단에 갇히다시피 하며 자란 놈이니 사회성을 기르거나 감정을 학습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주 유난스럽게 좋아했구먼, 뭘.’
‘거슬렸다’라고 표현하는 첫 만남에서조차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터다. 넓게 보자면 애증으로 쳐줄 수는 있을 테지만, 그것보다는 애정이 애정인 줄도 몰라 서툴었던 풋사랑 정도였으리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서도.
‘지금이야 귀엽기는 한데…….’
이스마는 신수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랑의 영속성에 관해서는 언제나 의문이다. 이클라스도, 그리고 자신 역시도 항상 그것이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이내 그는 쩝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모르지, 또. 정반대일수도.’
이스마는 다시 한번 블라스코의 막내 아가씨에게 심심찮은 애도를 보냈다.
‘일찍부터 발목 잡힌 오렌지 양, 부디 오래오래 저놈 목줄을 꽉 잡고 살아 주기를.’
그리고 사흘이 더 흘러, 이스마가 루테와 약속했던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공작의 초원에 머물던 두 신수가 아르템을 떠나기로 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