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제국력 445년 12월.
이렐 반도, 백의 교단.
“침입자다-!”
살을 에는 추위와 스산한 어둠에 잠겨 있던 교단에 횃불이 밝혀졌다.
목청껏 침입자를 알리며 석영 조각 같은 교단 건물 위로 달려 올라가던 교단병의 등에 무자비한 칼날이 푹 박혔다.
등을 꿰뚫린 교단병이 눈을 크게 홉떴다.
“커흑…….”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시체가 계단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같은 일이 반복해 벌어졌다. 각 층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교단병들이 침입자를 발견하고, 대항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
눈을 부릅뜨고 쓰러진 열일곱 번째 시신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끈을 가볍게 조인 검은 가죽 부츠가 피 웅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밟았다.
잘 깎은 육각기둥 모양의 석영을 닮은 교단은 총 15개 층으로 되어 있었다.
맨 꼭대기의 제단에는 성검을 보관하고, 그 바로 밑은 성검의 주인이자 교단의 파수꾼들이 사용하는 방, 그 밑이 교단주의 공간이다.
‘반쯤 왔나?’
백사 같은 자태를 뽐내야 할 희고 매끄러운 검신은 어느새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한밤중을 틈탄 불청객이 검을 휘둘러 검날에 흥건한 피를 털어 냈다. 핏방울이 허공에 후두둑 흩뿌려졌다.
그를 따라온 이스마가 질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어우, 야. 적당히 해라, 적당히. 내 심미안이 괴롭다고 울부짖잖아.”
“보기 싫으면 꺼지든가.”
심상하게 대답한 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신발창과 얼굴을 가린 후드 끝단에 묻은 핏자국이 스르르 증발한다.
“같이 와 달라고 하지 않았어.”
“저 싸가지…….”
이스마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아버지 명령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직까지 네 옆에 붙어 있었을 줄 아냐? 고마운 줄을 모르고.”
“그럼 곧 갈 때가 되었군.”
“붙잡아도 갈 거다, 이 새꺄.”
당장 떠날 것처럼 험악한 말과는 달리 이스마는 괜스레 동생의 뒤를 서성거렸다.
3년 반이라는 말도 안 되게 짧은 성체화 시기를 버티더니, 키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저를 가뿐히 압도할 만큼 성장한 놈이었다.
이제 성체화 기간 동안 억눌려 있던 신수의 힘이 폭발적으로 강해지는 시기가 올 테지. 그러니 걱정할 건 없어야 하는 게 맞는데.
하필 눈앞의 놈은 이제부터가 더 문제였다.
지금은 445년의 12월. 해가 바뀌면 446년이다.
‘저놈은 초조하지도 않은가……?’
나 같으면, 힐라이야의 권능을 회수당할 시기가 가까워 올수록 뭐 마려운 개처럼 낑낑댔을 텐데.
신수는 타고나길 완전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불완전해진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지상의 종족들보다 우월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권능의 소실은 공포나 다름없었다.
그런 암울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는데, 저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인간을 썰고 다닌다. 성검으로 지나친 살생은 하지 말라 그렇게 일렀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러나 이스마는 곧 생각을 고쳤다.
이 백의 교단은 갓 태어난 저놈을 데려다 장장 50년 동안 학대한 곳이다. 여신을 모시는 신도로서 감히 신수를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려 했으니 죗값을 치르는 게 합리적일 터. 힐라이야께서도 이것만큼은 눈감아 주시리라.
‘게다가 뭐, 처음도 아니고…….’
시간을 돌리기 전, 지금은 ‘사라진 세계’에서도 저놈은 똑같은 방법으로 교단에 복수했다. 그땐 성체화 전이었을 테니 시기상으로 조금 늦기는 했지만, 결과는 같다.
또 한 명의 희생양이 바닥을 굴렀다.
“커헉……!”
“아욱, 내 쪽으로 떨구지 마!”
이스마는 기겁하며 계단에서 우당탕 굴러떨어지는 인간의 위로 불투명한 얼음을 덮어 버렸다.
두 신수는 그렇게 갖은 요란을 떨며 한 층 한 층 교단을 올랐다.
교단의 최상층까지 이제 두 층만을 남겨 두었을 때였다.
아이칼은 문득 멈춰 서서, 계단 옆에 난 쪽창을 내다보았다.
“…….”
새하얀 눈밭과 멀찍이 보이는 자작나무 숲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이 사방이 다 같은 풍경이다.
이 영원의 설원으로, 떠난 지 무려 9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이클라스족의 신수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로 돌아왔으니 감회가 새로울 법도 한데, 놀랍게도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는다.
감히 신수를 학대했던 이들을 하나씩 처리하는데도 쾌감이나 희열이 일지 않았다. 복수의 쾌감은 이미 ‘과거’에 실컷 느껴 보아서인가?
대신 아이칼은 훨씬 더 오래된 과거를 되짚고 있었다. 은푸른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설원 위를 훑었다.
‘저기 어디쯤이었나…….’
약하고 희미한 노을색 오러와 처음으로 마주쳤던 게, 분명 저쪽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윽고 아이칼은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자작나무 숲의 동쪽 가장자리가 시야에 걸치는 곳.
저기다.
그 순간, 새하얀 도화지 같던 눈밭에 거짓말처럼 두 인영이 나타났다. 기억이 그려낸 환영이었다.
과거의 페이지가 예고 없이 넘어가더니, 어느 장면에서 멈췄다. 바로 저곳에서 그 애가 서럽게 토로했었다.
“난 혼자가 싫어. 그런데 너는 혼자여도 상관이 없지.”
“…….”
“그래서 자꾸 외로운가 봐.”
“…….”
아이칼의 눈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현재로 고스란히 전염된 듯, 마음이 세차게 파도치고 있었다. 감정을 쉽사리 짚어낼 수 없는 그의 눈에 순간 애달픔과 후회의 빛이 스쳤다.
아이칼이 조용히,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너랑 같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왔어, 카티.”
지금 당장, 바로 저곳으로 너를 다시 데려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다면 그때처럼 멍청하게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거야.
아이칼은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어느새 교단의 최상층이 바로 머리 위까지 다가와 있었다.
날카롭게 뻗은 성검의 검신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에게는 마저 끝내야 할 일이 남았다. 카티샤에게 돌아가기 위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이제 거의 막바지였다.
아이칼은 억지로 회상을 끊어 내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각.
백의 교단이 위치한 이렐 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아르템에서도 누군가 그날의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조개 모양 로켓 속, 아이칼의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건 [지금 우리, 마법처럼>의 외전 중 일부였다.
“이 부분은 정말, 몇 번을 읽어도 서럽다니까…….”
어느덧 성년을 목전에 둔 소녀가 뾰로통하게 투덜거렸다. 간밤 내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결국 로켓 속으로 들어온 참이다.
길고 곱슬곱슬한 주황색 머리칼이 날씬한 등허리로 폭포처럼 쏟아져 있었다. 얇은 슬립과 하얀 털 카디건 위로 드러난 목과 어깨선이 희고 가늘다.
카티샤가 젖살이 빠져 갸름해진 뺨에 볼록하게 바람을 넣었다가, 푸스스 숨을 뱉어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는 또다시 시무룩해졌다. 두 팔로 끌어안은 무릎에 뺨을 기댄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건 역시 좀 괘씸하지.’
이 외전은 [지.우.마>에서 유일한 아이칼의 시점이었다. 이 외전의 주인공이 보고 싶어질 때마다 들여다보는 바람에 내용을 다 외운지 오래다.
이제는 페이지를 굳이 넘기지 않아도 장면이 저절로 재생될 지경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 기억들이 서서히 돌아왔다.
카티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래도 난 좋았는데…….’
글자 속, 그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그들의 첫 만남이 다시금 생생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어느 날 문득, 그 애가 이렇게 물었다.
“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도 상관없지?”
언제나처럼 눈 위에 얼음을 얇게 깔고 그 위에 올라앉아 있을 때였다.
그 애가 가까이 다가와선 조심스럽게 ‘나’의 등에 제 등을 붙이고 앉았다.
“슬퍼하지도 않을 거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답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자, 맥 빠진 작은 웃음소리가 어깨를 타고 넘어왔다.
“그럴 줄 알았어.”
웬 인간의 몸을 뒤집어쓰곤 말문이 트인 뒤로부터 그 애는 가끔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뜬금없이 너는 글을 읽을 줄 알아서 좋겠다거나, 하늘을 나는 새를 부러워한다거나. 나도 교단에 데려가 주면 안 되냐고 묻거나.
그러니 제가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거냐는 그 질문 역시, 수많은 무게감 없는 말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 * *
그 애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 애의 주장에 따르면, ‘이름이 있는데 어떻게 읽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런……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쥐 새끼처럼 조그만 소녀가 눈밭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열심히 눈 위에 그림을 그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낑낑대더니 이윽고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이게 내 이름이야!”
‘나’는 흘끗 눈밭을 내려다봤다. 지렁이가 꼬불꼬불 기어가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상형 문자?’
“읽을 수 있어? 응? 응?”
소녀가 들뜬 얼굴로 보챘다. 어이가 없었지만 ‘내’ 입 밖으로 나가는 목소리는 무심하고 고저가 없었다.
“대체 이 그림을 보고 뭘 읽으라는 건데?”
“아…….”
작게 탄식한 소녀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지저분한 금발이 앞으로 쏟아지며 얼굴을 가렸다.
“그림 아니야. 글자야…….”
그 애가 우울하게 입을 내밀었다.
“기억나는 대로 썼는데 이게 아닌가 봐. 어떻게 읽는지 알면 좋을 텐데.”
‘나’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지저분한 때가 끼어 엉겨 붙은 금발에 핏기 없이 창백한 뺨, 마른 나뭇가지처럼 비실비실한 몸.
저 몸은 껍데기였다.
그것도 오래전에 얼어 죽어 눈 밑에 묻혀 있던 껍데기.
지금 저 몸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주황색 오러를 희미하게 두른 어떤 영혼이었다. 그 영혼이 어느 날 갑자기 이곳 이렐 반도에 나타난 것이 벌써 몇 달 전이다.
심지어 그것은 약간의 마기를 품고 있었다. 죽은 영혼에게 생명 에너지인 오러 따위가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영혼에 깊숙이 밴 마기가 영혼과 오러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힐라이야를 모시는 신수와 교단이 관장하는 설원에 마기는 불순물이다.
처음에는 설원에 불순물이 끼었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그것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이렐 반도와 북해의 마물을 처리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당장 잡아다 소생하지 못하도록 없애려고 했는데, 그것이 손아귀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도망을 갔다.
그렇게 사라지나 했더니, 다음 날 또 왔다.
이번에야말로 없애 버려야지 생각하는 순간 또 도망가고. 슬그머니 돌아왔다가 또 지레 놀라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고.
그 기현상을 몇 번이나 목격한 끝에 ‘나’는 깨달았다.
그 영혼은 사고할 줄 알았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돌돌 감고 있는 미약한 생명 에너지, 노을색 오러 덕분이었다.
한번은 그것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 대신 손을 내밀어 보았다. 노을색 오러가 주춤거리며 다가오더니, 눈치를 살피며 살며시 손바닥에 앉았다.
따듯했다.
그것이 통통 튀며 ‘내’ 손바닥에 제 몸을 비볐다. 버리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하듯, 내 목을 한 바퀴 휘감았다.
온기가 목덜미와 귓불까지 번졌다. 이 춥고 황량한 설원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온도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