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Heiress of the Villai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하고 거슬리던 감정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여기 있고 싶어?”
그렇게 묻자, 노을색 영혼이 위아래로 살랑거렸다.
그것을 손안에 올려 둔 채, ‘나’는 잠깐 고민했다.
교단에서는 마물을 발견하면 가리지 않고 척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슬슬 그들의 교육 방식에 반감이 일던 차였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이렐 반도에 세워진 백의 교단으로 왔다. 신수 이클라스와 관계해 ‘나’를 낳은 여자가 ‘나’를 백의 교단에 넘겼기 때문이다.
그 뒤로 50년. ‘나’는 무엇이 잘못된 줄도 몰랐다. 원래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줄로만 알았다.
가끔 가슴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면, 교단의 인간들은 귀신같이 구속구를 조였다. 그들은 신수의 본능을 억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분이 더러운 것까지 어찌할 순 없었겠지.
‘나’는 종종 그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었다. 교단을 몰살시키고 자유를 찾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망할 구속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새끼 때부터 길들여진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반항뿐이었다. 담당 교단병을 물어뜯는다거나, 마물 소탕을 위해 북해로 내몰릴 때 일부러 몇 마리는 달아나게 놔둔다거나.
그래서 ‘나’는 그 노을색 영혼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 * *
정체 모를 영혼이 교단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설원을 드나들기를 몇 달째.
어느 날 그것은 어떤 몸을 주워 입고 왔다. 설원의 혹한에 꽝꽝 얼어 버린 인간의 육신을 찾아 그 속에 쏙 들어간 것이다.
‘나’는 삐걱삐걱 움직이는 동사한 시체를 보곤 할 말을 잃었다.
“……비위도 좋네.”
그래 봤자 제 몸도 아니라 고작 몇 시간 버티고 튕겨 나오곤 했지만, 본인은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수염 숭숭 난 중년 사내의 몸을 뒤집어쓰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걸 떨떠름하게 지켜봤다.
그것이 가져오는 몸은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날은 겁 없이 이렐 반도를 횡단하겠다며 건방을 떤 탐험가의 몸을 입고 왔고, 또 다른 날은 부모가 의도적으로 이곳에 갖다 버린 어린애의 시체를 입고 왔다.
언젠가는 목이 잘린 마물의 몸에 들어간 채 나타나 ‘나’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육체를 입으면 아주 잠깐이나마 입을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아.”
“…….”
“아, 아, 아아. 아아……. ……아.”
보통 그렇게 얼빠진 소리만 내는 게 전부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학습 능력이 얼마나 좋은지,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나자 얼추 인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으이아.”
“…….”
“으헤이우에……. 에베베베.”
그렇게 열심히 입을 움직이더니, 얼추 1년 정도가 지나자 말을 했다.
“너어, 되에에게, 이에브다아.”
“……내가 예쁘다고?”
“우응!”
이곳저곳 떠돌며 보고 들은 게 많아서인지, 그것은 빠르게 말을 배웠다. 그렇게 2년쯤 지나니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너도 이름이 없어?”
그 애는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유창하게 말할 줄 알게 됐다.
‘나’는 그 사실이 약간 짜증스러웠다.
뭐야, 뭔데 나보다 말을 더 잘해?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갔다.
“이름 있어.”
“알려 주면 안 돼?”
“싫어.”
“……알겠어. 그래도 너는 이름을 알아서 좋겠다.”
“어쩌라고?”
“치이.”
말문이 트이고 나니 그 앤 무척이나 수다스러워졌다. 쌀쌀맞은 대꾸나 무응답으로 일관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즈음 되니 내가 저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렇게 애매한 관계가 된 채로, 또다시 1년이 더 흘렀다.
내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북해를 떠돌며 마물을 소탕하다가 다시 교단으로 소환당했다.
교단 밖에 나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시간 전까지 두어 시간이 채 안 됐다.
내가 경계를 풀고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작은 시간의 토막을 언젠가부터 그 애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 해애?”
불쑥, ‘내’ 눈앞에 지저분한 금발을 들이밀었다.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그 애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나타나지 말랬잖아.”
“미아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소녀가 말꼬리를 늘였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내 옆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오늘은 또 어디선가 일고여덟 살 즈음 되는 어린 여자아이의 몸을 찾아왔다. ‘나’는 그 애를 힐끗 일별할 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또 금발이네.”
무심결에 중얼거리자 그 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노을색 영혼이 주워 입는 껍데기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금발이라는 것이다.
생글생글 웃는 걸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 금발이야?”
“몰라!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까?”
이상한 대답이지만 그럴 만했다. 딱 보기에도 저 앤 완전히 성장하지도 못한 어린 영혼이었다. 제 외형적 특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나이에 육신에서 떨어져 나왔음이 틀림없다.
그럼 두세 살 즈음에 죽었거나, 혹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영혼이 몸에서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아마도 아기였을 때.
“난 금발이 좋아. 예뻐.”
그때 금발의 누군가를 봤나 보지.
단순한 깨달음. 그 외에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다.
그 애가 몇 살에 죽었건 몇 년을 떠돌아다니고 있건 나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이지 그것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적어도 ‘익숙해지기는’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꼬박 3년 가까이 그 영혼을 보아 왔다.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심지어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지조차 모르는데도 그 존재 자체만은 공기처럼 익숙해진 참이었다.
가끔 그 애가 보이지 않을 때면 어디로 간 걸까, 궁금해지기는 할 만큼. 하지만 구태여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는, 딱 그 정도.
그런 ‘나’의 무심한 태도를 그 애도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있잖아. 넌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겠지?”
또 같은 질문.
요즘 부쩍 이렇게 묻는 날이 잦았다. 늘 무시하거나 단답으로 일관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그렇게 넘기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오늘따라 저 애의 영혼체가 유독 불안정하게 느껴져서인가?
‘나’는 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며 말을 골랐다.
‘아무렇지 않지는…….’
그렇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굳이 찾지는 않는다고 쳐도 빈자리를 느끼기는 할 것 같았다. ‘내’ 세상에는 딱 네 가지밖에 없었다. 눈, 마물, 교단, 그리고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태양빛을 닮은 노을색 영혼.
그러니 네가 없어지면, 내게 익숙한 세상의 일부가 뚝 떨어져 나간 기분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고민을 거듭하다 목 뒤로 밀어 삼켰다.
돌아오지 않는 답을 한참 기다린 그 애는 결국 아쉽게 고개를 떨궜다.
“너는 안 변할 거야.”
“…….”
“나를 안 찾아 주겠지?”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응.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잖아.”
입을 꼭 다물어 버리는 모습이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는다.
“난 혼자가 싫어. 그런데 너는 혼자여도 상관이 없지.”
“…….”
“그래서 자꾸 외로운가 봐.”
‘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이 홀로라는 사실이 불러오는 부정적인 감정이라면 아마 평생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옆에 누가 있어 좋은 꼴을 봤던 적이 없으니까.
내게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못하는 너 하나만 빼고.
그렇다면 나는 네가 없으면 외로워질까?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등 뒤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래도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어.”
조금 어이가 없어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하던 고민이 싹 증발하고, 황당함만이 남았다.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거야?”
내가 없으면 당장 소멸하고도 남았을 텐데, 누가 누굴?
육신을 떠난 영혼이 아무리 지상에 오래 머물러 봤자 몇 달일 뿐이었다.
저 애가 아직도 여기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곳이 이클라스족의 신수와 백의 교단이 관장하는 설원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재생과 치유의 힘이 넘쳐흐르는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 곁에서 내 오러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저 애의 영혼체는 조금씩 정화된다.
그걸 반대로 말하면.
내 곁을 떠나 이 설원을 벗어나면, 저 애는 당장 소멸이다.
“가기 전에 도와줄게!”
그런데 저 애는 이상한 말만 자꾸 했다. 가긴 어딜 간다고?
어느새 소녀는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교단에 있는 인간들 좋아하지 않잖아.”
“난 원래 인간을 안 좋아해.”
“그들은 특히 더 좋아하지 않잖아.”
그 애가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왔다. 목을 향해 뻗어지는 푸르딩딩한 손을 미처 막지 못했다.
그 애는 내 목에 찬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리며 속삭였다.
“이게 널 아프게 하지? 나 알아. 다 봤어.”
금제구가 달그락거리며 목에 난 상처를 짓눌렀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는데 통증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애가 서슴없이 내게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곤 서툰 손놀림으로 망토를 벗겼다.
“뭐 하는 거야?”
“있어 봐.”
망토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목과 손목에 찬 구속구가 드러났다.
소녀는 무거운 족쇄가 달린 내 손목부터 하나씩 잡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
‘나’는 적잖이 당황하는 바람에 미처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누가 ‘나’를 그렇게 세심히 살피는 건 처음이었다. 참 오묘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잡히지 않는 어딘가가 자꾸만 간지러웠다.
오